15. 고려 의천이 송 정원에게
15. 고려 의천이 송 정원에게
  • 이재형 기자
  • 승인 2014.10.0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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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 불교중흥 서원하며 진리의 등 밝히겠나이다”

19살에 교장수집 발원한 의천
20대 후반에 정원법사와 인연
직접 송에 와 공부할 것 권유

임금·어머니 만류 물리치고
1085년 마침내 송 유학 감행

50여 고승 만나 불법 공부
3000여권의 불교전적도 모아

“지난해 2월에 쓰신 편지 한 통과 손수 지으신 책을 받아들고 돌아와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법사께서는 제게 언어의 밖에서 종지(宗旨)를 터득한 그 뜻이 나의 마음과 같다며, 바람을 타고 와서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전할 수 있다면 하늘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겨자씨를 맞히는 듯 기쁨이 클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문하에 들어올 것을 권면하셨기에 당장 달려가 뵙고 싶지만 감히 그럴 여건이 못 되기에 그저 탄식만 하며 만나 뵐 수 있는 인연이 이뤄지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1085년 정월, 고려 13대 왕 선종(宣宗, 1049~1094)은 동생 의천(義天, 1055~1101)의 절망감을 알 것 같았다. 동생은 오래 전부터 송으로 건너가 공부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부왕 문종(文宗, 1019∼1083)의 재위시절에도 그 뜻을 밝혔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번 역시 의천은 자신과 신하들이 있는 내전에서 눈물로 호소했다.

“성현들께서는 몸을 던져 도를 구했으니 현장법사가 서역으로 향한 것이나 의상대사가 당으로 들어간 것이 그렇습니다. 편안함에 안주해 애써 스승을 찾지 않는다면 출가의 본의가 아닙니다.”

선종은 20년 전 일을 떠올렸다. 부왕이 아들들을 모아놓고 “너희들 중 누가 출가해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공덕을 짓겠느냐?”고 물었을 때 기꺼이 출가를 자청한 게 넷째 후(煦)였다. 1065년 5월14일, 11살의 어린 동생이 영통사 난원(爛圓, 999∼1066) 문하로 출가할 때까지 안타까움이 컸다. 아들 셋이면 그 중 하나는 출가해야 한다는 ‘삼자출가(三子出家)’ 제도의 희생양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허나 아니었다. 불문에 든 아우는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박람강기(博覽强記)에 힘썼다. 13살 의천이 승통(僧統)에 임명된 것은 분명 특혜였지만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면 재앙에 불과했다. 의천은 일정한 스승이 없이 도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배웠다. 20대에 접어들 무렵 그는 이미 경·율·론 삼장은 물론 제가백가의 사상과 역사를 꿰뚫는 최고의 지식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선종은 의천이 송나라 유학에 뜻을 뒀음을 일찌감치 알았다. “비록 경론이 갖춰졌더라도 그것을 풀어쓴 장소(章疏)가 없다면 법을 펼 길이 없다”던 의천은 19살 때 교장(敎藏) 수집을 발원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 경(經)이며, 경전을 말미암아 지은 것은 논(論)이니, 경은 논으로 말미암아 들어가고 논은 소(疎)를 기다려서 통한다’는 게 의천의 지론이었다. 동생이 송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교(敎)를 중시하는 자들은 선(禪)을 외면하고 선을 행하는 자들은 교를 무시하면서 대립하는 고질적인 교단문제를 천태 사상에서 해결하려 한다는 점도 알았다.

선종은 의천의 뜻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대가 거셌다. 송과 요(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왕자가 송으로 건너가면 심각한 외교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어머니 인예왕후(?~1092)도 아들을 낯선 땅으로 보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선종이 아무리 임금이라지만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깊은 절망에 괴로워할 동생을 위로해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대각국사 의천(1055~1101).
그렇지만 의천은 선종의 생각과 달리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내면에서는 구법의 염원이 더욱 깊어졌다. 그 배경에는 당대 송의 최고 화엄학자인 진수정원(晋水淨源, 1011~1088)과의 인연이 있었다. 의천은 고려와 송을 오가던 무역상 이원적(李元積)의 소개로 정원을 처음 알게 됐다. ‘화엄사문(華嚴沙門)’을 자처했던 의천은 정원에 깊은 호감을 가졌다. 정원은 화엄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송 불교계의 주류로 떠오른 천태(天台)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정원도 의천의 안목과 열정을 단번에 알아봤다. 조금만 갈고닦으면 큰 그릇이 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정원은 편지를 썼다.

“대저 사람의 몸에는 동서남북의 차이가 있어도 불성에는 원근과 피차의 간격이 없습니다. 그대의 영특한 자질을 가지고 학문에 더욱 노력해 끊임없이 근행(勤行)한다면 어느 경지인들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둘은 오래지 않아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다. 의천은 정원의 도움으로 고려에는 없는 많은 책들을 구할 수 있었다. 의천도 당무종의 회창폐불(會昌廢佛, 841~846)을 겪으며 소실된 ‘화엄공목장(華嚴孔目章)’ ‘정원신역경소(貞元新譯經疏)’ 등 화엄관련 서책 46권을 정원에게 보내주었다. 정원은 감사의 표현과 더불어 자신이 손수 지은 ‘화엄경보현행원참의’ ‘대방광원각참의’ ‘대불정수능엄참의’ ‘우란분예찬문’ 등 8권의 책을 보내왔다.

정원의 저술의 읽어본 의천은 감탄했다. 그는 정원이 평생 두 번 만나기 어려운 선지식임을 새삼 깨달았다. ‘늙음과 질병이 함께 몰려오건만, 산과 바다로 멀리 가로막혀 만날 수가 없으니 그 한스러움을 어디에 비하겠소?’라고 답장해온 75살의 노승. 의천은 정원이 세상과의 연을 접기 전에 반드시 만나겠다고 다짐했다.

왕과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힌 의천에게 마지막 선택의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았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그토록 갈망했던 송나라 유학은 한갓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1085년 4월7일, 그는 제자 수개(壽介)와 양변(良辯)을 데리고 예성강 하구의 정주(貞州)로 향했다. 왕명이나 모정도 더 이상 그의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그곳에서 송 상인의 배를 탄 의천은 떠나기 전 선종에게 표문을 올렸다.

“정법이 이단의 학설에 무릎 꿇고 현묘한 진언이 속임수에 가려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글 뜻을 완미(琓味)하며 공연히 옛 성현을 그리워할 뿐 공부하러 찾아갈 선지식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송에 건너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로 눈을 뜰 수 없는 소경과 같습니다. 주상께서는 신이 형벌을 무릅쓰는 심정을 이해해주소서. 이제 죽음을 돌보지 않고 긴 파도를 건너가려 합니다. 우리 임금님 성덕과 부처님 가피로 서역에서 전한 지혜의 불꽃을 밝히고 동방에 돌아와 법륜을 굴린다면 도광(道光)이 천고에 거듭 비치고 자비로운 바람이 삼한에 불어오게 될 것입니다.”

한 달 뒤 의천은 거센 파도를 넘어 송 판교진(板橋鎭)에 도착했다. 고려 왕자가 송에 밀입국한 사실이 알려지자 송 조정은 깜짝 놀랐다. 당장 추방하거나 가둘 수 있는 막중한 죄였다. 하나 황제 철종은 의천을 국빈으로 맞이했다. 왕족 출신의 승려가 불법을 위해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온 것이 가상했지만 고려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호기이기도 했다. 신심 깊었던 황태후의 적극적인 옹호도 큰 도움이 됐다.

철종은 의천을 수도인 변경(汴京)으로 불러들여 화엄학의 대가인 유성(有誠)법사에게 교학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천태의 교관겸수(敎觀兼修)가 고려불교의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으리라 여겼던 의천은 유성에게 화엄종과 천태종의 같고 다른 점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유성은 뛰어난 학승이었으나 의천의 안목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천은 여러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법을 물었고 때로는 치열한 토론을 벌었다. 화엄종 승려를 비롯해 천태종, 계율종, 법상종, 선종 등 각 종파의 고승들이었다. 이때 만난 운문종 선사 종본(宗本)은 “이 세상 그 누가 만리의 높은 파도 타고, 불법 위해 몸 잊은 채 선재를 본받았던가? 생각건대 염부제에서는 참으로 희유한 일, 마치 우담바라가 불 속에서 핀 것 같네”라고 의천을 칭송했다. 내외전을 막론한 의천의 박식함과 당당함,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구도정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의천의 마음에는 정원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갔다. 변경에 머문 지 한 달이 흘렀을 때 의천은 철종에게 스승 정원을 만날 수 있도록 요청했다.

“신은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부처님 가르침에 뜻을 두었습니다. 깊은 가르침을 연구하기 어려워 개탄하고 정법이 쇠퇴함을 슬퍼하면서 오직 촌음을 아껴가며 불전을 탐색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정원 강주가 현수 조사의 가르침을 해석한 문자를 얻어서 펼쳐 보고 감격했습니다. 이에 스승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져 멀리서 제자의 예를 올렸습니다. 이제 스승을 찾아가 배우기를 청해 학업을 넓히고 부지런히 공부하려 합니다. 삼가 신의 간청을 들어주소서.”

▲ 송대 최고의 화엄학자인 진수정원(1011~1088)
철종은 의천의 청을 받아들였고, 고위관리를 시켜 정원이 있는 항주까지 모시도록 명했다. 8월14일 변경을 출발한 배는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를 따라 내려갔다. 배가 정박할 때면 의천은 그 지역의 고승을 찾아갔다. 운문종 요원(了元)은 그에게 가사와 경전을 전해주며 법을 부촉(付囑)했다. 의천은 항주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뛰었다. 정원을 만난 곳은 항주의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였다. 이역만리에서 편지만 주고받다가 마침내 첫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두 사람은 감격했다. 의천은 곧바로 스승을 찬탄하는 글을 올렸다.

“비록 강산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하늘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겨자씨를 맞히는 듯 귀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이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말법시대에 불법의 중흥을 서원하며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진리의 등을 밝히겠나이다.”

스승 정원은 고려 승통에 대한 깍듯한 예를 갖추며 아침저녁으로 화엄의 정수를 전하려 애썼다. 제자 의천은 그런 스승의 기대에 부응해 부지런히 정진했다. 정원은 화엄을 근간으로 두되 천태의 참회(懺悔)와 관행(觀行)을 적극 수용해 융화시켰다. 그런 정원의 강의를 듣고 의천은 비로소 화엄과 천태의 조화 문제와 교관(敎觀)의 겸수(兼修)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의천은 정원의 회상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틈틈이 인근의 고승을 찾아다니며 법을 묻고 전적을 수집해나갔다. 그해 12월 율종을 대표하는 영지사(靈芝寺) 원조(元照)를 만나 율과 정토에 대한 요의를 전수받았다. 특히 다음해 1월에는 상천축사(上天竺寺)의 자변종간(慈辯從諫)으로부터 천태의 법을 계승할 수 있었다. 당시 항주에서는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한 고려 제관(諦觀, ?~970)의 활동으로 천태종이 크게 부흥했다. 종간은 천태의 법을 계승한 대표적인 고승이었다. 그는 의천에게 천태교관을 전수하며 ‘오조(천태지의)가 옛날에 크게 깨달으셨는데 승왕(僧王)이 지금 기쁘게도 고풍을 이으셨네. 뒷날 해동에서 법을 펼치는 곳곳마다 지혜의 등(燈) 1천 불꽃 무궁히 비추리라’는 시를 전했다.

그 무렵 고려에서 입국한 사신들은 철종에게 인예왕후의 서한을 전했다. 의천이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간곡한 내용이었다. 철종은 모친의 뜻을 전하려 의천을 다시 수도 변경으로 불러들였다. 의천은 더 머물고 싶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1086년 2월, 그는 변경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때 정원은 의천의 걱정에도 아랑곳 않고 배에 동승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정원은 항주를 떠난 배가 변경에 이를 때까지 매일 화엄을 강의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제자를 향한 76살의 고승의 마지막 정성이었다. 철종으로부터 금·은·비단 등 많은 귀중품을 하사받은 의천은 귀국을 위해 정원과 함께 항주로 돌아왔다. 항주에 도착한 의천은 천태산에 올라 천태지자(天台智者, 538~597)의 부도에 예배하고 천태종을 해동에 전할 것을 맹세했다.

의천은 퇴락한 절이 있으면 많은 재화를 희사해 수리토록 했다. 특히 정원이 대중상부사에서 옮겨와 머무는 혜인원(慧因院)에 막대한 재물을 보시했고, 7500여질의 경전을 비롯해 화엄·천태 등 각종 논서들을 비치하도록 했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보은이기도 했지만 논서들이 널리 읽혀지면 침체된 화엄종이 부흥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정원은 의천이 떠나기 전 화엄의 법을 이었음을 세상에 공표했다. 향로와 불자(拂子)를 건네고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했다.
‘청담(淸談)을 도와준 푸른 향로 검은 불자(靑爐黑拂資談柄)/ 연화대에 함께 오른 지 50년 세월(同陟蓮臺五十年)/ 오늘 모두 해동의 나라에 전하노니(今日皆傳東海國)/ 사르고 휘둘러 설법하여 인천을 제도하오(焚揮說法度人天).’

늙은 스승의 안타까운 시선을 애써 뒤로 하고 의천은 그해 5월12일 명주(明州)를 떠나 7일 뒤인 19일 국경에 도착했다. 그 배에는 13개월 동안 의천이 각지에 수소문해 모은 불교전적 3000여권이 실려 있었다. 의천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종은 어머니 인예왕후를 모시고 예성강 근처까지 마중을 나갔다. 의천은 선종에게 죄를 청했고, 선종은 오히려 그의 업적을 크게 칭찬했다.

▲ 의천의 스승인 정원이 상주했던 혜인원. 이 절은 의천을 시작으로 고려왕조의 전폭적인 지원이 계속됐고 그로 인해 훗날 고려사로 불리기도 했다.

고려로 돌아온 의천은 송의 고승들은 물론 고창, 천축, 요, 일본 등지의 승려, 귀족, 국왕들과도 교류하며 불교 전적을 모았다. 23살 때부터 지속해오다 잠시 중단된 경전 강의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의천은 새벽부터 밤까지 촌음을 아껴가며 전적을 모으고 검토했다. 때로 의천의 안목은 정원을 뛰어넘었다. 정원이 현수법장의 저술이라고 보내준 ‘화엄기(華嚴記)’3권을 면밀히 검토한 의천은 “그것은 현수의 저술이 아니고 일을 좋아하는 자가 그 이름을 빌린 것 같으니 자세히 살펴봐 달라”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1089년 어느날 의천은 비통한 소식을 접해야 했다. 1088년 11월 스승 정원이 입적했고, 이에 시자 안현(顔顯)이 정원의 사리를 수습해 가져온 것이다. 안현은 정원이 마지막 순간 의천을 떠올리며 썼다는 편지를 전했다. 화엄종 전통을 지켜달라는 말과 함께 새로 쓴 주석서를 보내니 자신을 위해 교정하고 유통해달라는 당부였다. 정원은 이 편지에는 ‘그대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의천은 가슴이 미어져왔다. 그는 글을 짓고 재를 올리며 스승의 업적을 찬탄했고 다음 세상 화장세계(華藏世界)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고려를 떠날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제자 수개를 항주 혜인원에 보내 명복을 빌도록 했다.

의천은 정원이 직접 쓴 주석서를 직접 교정해 널리 배포했다. 또 법을 펴고 불전을 수집하는 일에 더욱 매진했다. 그 결과 다음해인 1090년 8월 1010부 4857권의 장소(章疏)를 모아 교장(敎藏)으로 간행하고 이를 두루 유포할 수 있었다. 또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1097년에는 국청사(國淸寺)를 건립했고, 그토록 염원하던 천태종을 개창할 수 있었다.

의천은 원효를 유독 존경해 ‘해동교주 원효보살’이라고 받들었다. 그는 분황사를 직접 찾아가 백가의 쟁론을 회통시킨 원효의 업적을 서술한 뒤 “역대 성현들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우리 성사(聖師)보다 뛰어난 이는 없었다”고 찬탄했다. 그러고는 원효의 저서를 열심히 수집해 간행하고, 송·요·일본 등 다른 나라에 보내주며 원효를 국제적으로 선양했다.

11살에 출가해 일생을 노심초사하며 온 힘을 기울여 구법과 전등의 삶을 살았던 의천. 그의 일이 늘어날수록 건강도 악화돼 갔다. 의천은 “나는 심로(心勞)의 병이 있는데 근래에는 점차로 더해서 경서를 보고 읽을 때 매번 통증을 느껴 학업이 어렵다”고 탄식하고는 했다. 1101년 10월5일, 의천은 선종임금에 이어 자신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어주었던 숙종(肅宗, 1054~1105)에게 “원하는 바는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일인데, 병이 저의 뜻을 빼앗아가니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외호하여 여래의 유교에 부합하도록 하면 죽어도 썩어 없어지지 않을 공덕이 될 것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세수로 47살이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의천의 비문을 지으며 “국사를 다시 이 세상에서 뵐 수 있다면 내 머리칼을 깔아 그 위를 밟고 가게 해드리고 싶다”고 안타까워했다.

대각국사 의천과 그의 스승 정원과 주고받은 편지는 ‘대각국사문집’에 전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 ‘대각국사집’(이상현 옮김, 동국대출판부), 차차석 ‘대각국사 의천’(밀알), 오윤희 ‘일꾼 의천’(불광출판사), 최병헌 ‘대각국사 의천의 도송(渡宋)활동과 고려·송의 불교교류’(진단학보 71·72집), 김상현 ‘의천의 연학과 학술사적 위상’(천태학연구 1집), 신규탁 ‘고대 한중불교교류의 일고찰-고려의 의천과 절강의 정원’(동양철학 27집)

[1264호 / 2014년 10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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