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서원과 천진암
도봉서원과 천진암
  • 김형규 기자
  • 승인 2014.10.0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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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봉구에 도봉서원이 있다. 2009년 시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복원사업이 진행되던 곳이다. 최근 이곳에서 뜻밖의 진실이 드러났다. 영국사라는 절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서원을 세웠음이 밝혀진 것이다. 발굴과정에서 절터임을 암시하는 각종 기와와 암각석판이 발견될 때만 해도 크게 관심을 끌진 못했다. 그러나 건물터 기단 아래에서 국보·보물급 불교용구 77점이 출토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특히 이들 불교용구가 파괴되지 않고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것은 사찰이 건립될 당시 제의 차원에서 묻었기 때문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밝히고 있다. 유림이 서원을 세우면서 건물과 기단을 재활용했기 때문에 땅 속에 묻힌 불교용구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가톨릭 신자라면 죽이던 시절
천진암과 주어사가 그들 보호

관에 발각돼 사찰 폐허로 변해
가톨릭, 성지화하며 역사지워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에서 불교에 대한 탄압은 피맺힌 역사로 남아있다. 스님들을 노비로 부리고 각종 부역에 동원했으며 사찰에서 기생을 끼고 술판을 벌였다. 도봉서원은 서원건립을 이유로 멀쩡한 사찰을 폐사시켰던 불교탄압의 생생한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불교는 조선시대와 많이 다르다. 불교는 국내에서 신자수가 가장 많은 종교다. 문화유산의 60~70%를 보유하고 있으며 해외에서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불교전통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몰려오고 있다. 삭발을 하고 출가한 외국인 스님들도 적지 않다. 유림의 유세에 눌려 눈치나 살피던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크고 우람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힘이 없어 사찰을 빼앗겨야 했던 아픈 과거가 재현되고 있다. 가톨릭이 성지화를 추진하고 있는 천진암과 주어사 이야기다. 천진암과 주어사는 이름만으로도 절터다. 그런데 이곳은 가톨릭이 점유하고 있다. 특히 가톨릭은 8000평이 넘는 터에 ‘천진암 100년 대성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가톨릭 내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천진암과 주어사를 놓고 어디에서 먼저 한국가톨릭의 역사가 시작됐는지 논쟁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들 절은 가톨릭을 공부하던 강학회가 처음 이뤄진 곳이다. 당시는 가톨릭 신자임이 알려지면 죽임을 당했던 무서운 시절이었다. 함께 섞이기조차 두려워해 공부할 곳을 찾지 못했던 그들을 받아준 것은 스님들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자비였다. 허나 이런 사실이 관에 알려지면서 결국 스님들은 처형당하고 천진암과 주어사는 폐사돼 버렸다.

그러나 종교화합의 상징과도 같던 이곳에 가톨릭이 성지화를 추진하면서 사단이 일고 있다. 호의를 베풀었던 스님들의 역사를 지우고 절터에 대규모 성당 건립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천진암터에는 천진암강학당지 비석과 함께 당시 강학에 참여했다 처형된 5인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주어사터에 있던 해운 스님의 비석은 멋대로 가톨릭 절두산 성지로 옮겨버렸다. 어디에도 호의를 베풀었던 스님들의 기록은 없다. 그들이 말하는 대규모 성전이 들어서면 사찰의 흔적도 고스란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 김형규 부장
가톨릭이 이곳을 중요한 장소로 여기는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자비를 베풀었던 스님들의 기억을 지우고 사찰의 흔적을 없애겠다는 발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다. 약소국의 신성한 공간을 파괴하고 그들만의 성전을 쌓았던 제국주의의 시절 가톨릭의 DNA가 느껴진다. 가톨릭에 양심이 있다면 목숨을 걸고 자신들을 보호했던 스님들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봉서원이 불교탄압의 현장으로 되살아났듯 천진암 역시 먼 훗날 한국불교의 은혜를 짓밟은 공간으로 기억될 지 모른다.

김형규  kimh@beopbo.com
 

[1264호 / 2014년 10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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