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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감정의 노예

기자명 혜국 스님

“한 생각 일어난 다음 감정 좇고 있다면 그것이 노예의 삶”

▲ 중국 용문석굴의 봉선사 대불. 당나라 측천무후 때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명자조(虛明自照)하야 불로심력(不勞心力)이라, 비고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로다.”

참으로 소중한 말입니다. 텅 비면 밝게 마련이고 밝으면 스스로 비추고 있게 마련입니다. 밝음과 비춤은 둘이 아닙니다. 텅 비게 되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虛無)로 생각하는 이도 있을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텅 비고 밝다는 말은 번뇌망상 즉, 미운마음이나 원망하는 마음 그러한 잡스러운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요, 바로 공(空)이라는 말입니다. 공(空)이라는 말은 나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나의 본래 마음에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진리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함경에서 처음 법을 설하실 때는 “이 세상이 모두 무상하고 모두가 환영”이라고 하시면서 마지막 법화경에 와서는 “일체 모든 법(法)이 적멸(寂滅) 아닌 게 없다 즉, 진리(眞理) 아닌 게 없다. 수행자들이 이러한 이치를 깨달으면 내 자신이 확연한 부처임을 보게 된다”고 이르셨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알음알이로 따져본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 모든 것은 도(道)에 의해서 살아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번뇌방상이 몰록 소멸해도
특별한 세상 나타나지 않아
바로 그곳이 지혜광명 자리
스스로 밝게 비추고 있는 것

본래 비고 밝은 자리라는 건
스스로 항상 비추고 있기에
따로 마음 쓸 일 전혀 없어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이제는 한바탕 쉬고 볼일


꽃 한 송이를 예로 들어봅시다. 한 송이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첫째 씨앗이 싹이 되어 뿌리를 내려야 하고 그러려면 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라나려면 물과 공기, 햇볕 온 우주가 다 함께 모여야 합니다. 즉 한 송이 꽃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꽃 한 송이만이 아니라 나무 한그루, 벼나 보리 모든 식물도 또한 이와 꼭 같습니다. 새나 곤충 모든 생명 또한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인연이 모여서 생겼기에 인연이 흩어지면 꽃은 떨어지고 죽어갑니다. 이러한 이치는 사람이라고 해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가 모여 인연이 되면 태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죽는 겁니다. 그러나 그 인연법 자체는 영원합니다. 이치가 이러하기에 연기법(緣起法)을 보는 자는 바로 부처를 본다고 하신 겁니다. 그리하여 나는 물론이요, 온갖 우주만유가 연기공성(緣起空性)임을 깨달은 자리가 바로 비고 밝은 자리입니다. 번뇌 망상이 몰록 소멸하고 보면 특별한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자리가 지혜 광명이라 스스로 비추는 겁니다. 따라서 본래 비고 밝은 자리요, 밝으면 스스로 비추나니 따로 마음 쓸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몰록 한바탕 쉬고 볼일입니다. 중생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죄(罪), 그 죄라는 두려움이 본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본래 성불(成佛) 도리(道理)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어둡고 캄캄한 밤이라도 태양광명이 환한 광명을 그대로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두움은 어두움이 아니고 나를 감싸고 있는 밝음의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분명하면 허명자조(虛明自照)라는 이 말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비사량처(非思量處)라 식정난측(識情難測)이로다,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로는 측량키가 어렵도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감정이 일어나야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감정으로는 순수 공(空)의 세계, 그러한 세계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식이 끊어진 자리는 허명자조(虛明自照)인데 어찌 의식이나 망정으로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문제를 갖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만약 죽음이 300년, 500년 동안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죽을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음을 엄청나게 기다릴 겁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생각 헤아리기에 따라서 달라지듯이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세계 또한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니 삶과 죽음을 따로 보는 세계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으나 삶이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는 허명자조의 세계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의문에 대하여 이런 질문이 있었나 봅니다.

“부처님이시여, 색(色)수(受)상(相)행(行)식(識) 즉, 이 몸이 모두 공(空)하다면 누가 도(道)를 닦습니까?”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수행자들이여, 배고픈 이가 밥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없어져도 밥을 먹은 이는 배가 부르는 이치와 같고 햇빛이 시간에 의해서 아침이 점심이 되고 점심이 저녁이 되어 순간순간 사라지지만 나무와 풀과 온갖 꽃을 길러 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씨앗을 심을 때는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법(法)의 이치에 따라 싹이 나고 열매 맺는 이치와 같이 공(空)인 가운데 도(道) 닦는 것도 이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며 의식과 망정으로 측량키 어려운 세계가 어디 멀리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바로 생각을 일으키는 그 자리요, 의식이나 망정을 낼 줄 아는 허명자조의 자리, 바로 그 자리입니다. 다만 생각을 일으키는 근본뿌리를 바로 보고 몰록 무념(無念)이 되면 내가 내 생각을 움직이는 주인이 되는 것이요, 생각 일어난 다음 감정을 따라가면 생각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의식과 망정 또한 이와 같습니다. 인간 한평생 살아가면서 생각이라는 감정, 그 감정의 노예 노릇하느라고 보내버린 시간을 계산해보면 우리는 깜짝 놀랄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의 주인 노릇한 시간은 얼마 안 되고 감정이라는 업(業)의 종노릇한다고 낭비한 인생을 생각하면 비사량처(非思量處)요 식정난측(識情難測)이라는 말이 실감 날것입니다. 결국 내가 내 생각의 주인이 되었느냐, 생각의 노예로서 살고 있느냐 그 차이입니다.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닌 바로 그 놈이 말을 하고 말을 듣는데 역력한 것입니다. 역력한 본래의 내가 잠시도 나를 떠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역력한 자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연기공성이요, 형단 없는 그 자리입니다. 그러나 저러나 역력히 보고 듣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의식과 망정으로 측량키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의식이 일어났거나 생각이 일어났다면 이미 역력이 아니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역력함이란 고요하고 맑아서 더 이상 더러움이 없다는 말이요, 고요 그 자체를 말하는 거니까요.

“진여법계(眞如法界)엔 무타무자(無他無自)라, 깨친 진여법계는 나도 없고 남도 없음이라.”

드넓은 허공, 가없는 허공에는 너의 허공, 내 허공이 따로 없습니다. 새들도, 노루도, 다람쥐도, 나무도, 꽃들도 모두 허공에 의지해서 사는 만큼 같은 고향, 같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와 남이 없는 자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대나무 소쿠리를 하나씩 들고 바다로 가 봅시다. 소쿠리를 바다에 담그면 동그란 소쿠리는 동그란 모양의 바닷물이 들어오지요. 네모난 모양은 네모난 물이 들어옵니다. 동그랗고 네모난 게 너다, 나다 하는 건데 동그란 모양은 동그란 것이 맞다하고 네모난 모양은 네모가 맞다하고 고집하는데 이것이 바로 너다, 나다 하며 고집부리는 생각과 같은 겁니다. 각자 자기 그릇에서 볼 때는 동그랗다고 하고 네모라고 하지만 바닷물에서는 모양이 본래 없으니 나도 없고 남도 없음이라고 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바닷물 입장에서는 그냥 바닷물이거든요. 모양 있는 바다도 그렇거늘 하물며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는 진여법계에 어찌 나와 남이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모양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모두가 알음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말은 진여법계란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야말로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진리 그 당처라는 의미입니다. 모양이 없다하면 벌써 빗나간 겁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이름에도 속지 않는 자리를 화두참선(話頭參禪) 간화선(看話禪) 할 때 화두(話頭)라고 합니다. 화두일념(話頭一念)이면 그대로 허공성(虛空性)입니다. 허공성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얘기는 그 하나라는 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무타무자(無他無自)가 되어 원융무애(圓融無碍)인 겁니다. 그러한 대자유가 바로 진여법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천하보배가 사람마다, 누구에게나 완전하게 갖춰져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요, 실로 살맛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대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49년간 부처님은 길에서 사셨고 그 법(法)을 깨달은 스승들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겁니다. 이러한 법의 등불이 3000년을 두고 꺼지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희유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적적본고향(寂寂本故鄕)이요 성성시아가(惺惺是我家)라, 현전고불로(現前古佛路)인댄 불매시하물(不昧是何物)이냐”, “고요하고 고요한 이 마음 본래 나의 고향이요, 항상 깨어있는 삶이 바로 내 집이라. 과거 옛적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등불.”

이 어떠한 물건인가? 각자가 자기의 등불, 영원히 꺼지지 않는 자기의 등불을 한번 돌아봅시다. 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등불을 찾아 인생을 바친 수행자가 스승을 찾아가 여쭙습니다.

“무엇이 최고 진실의 경지입니까?”

스승이 답하기를 “만약 그것이 경지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최고의 진실이 존재할 수가 없다”고 이르십니다. 이 답이야말로 바로 그 등불입니다. 수행자가 다시 묻기를 “밤낮없이 하루 종일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라고 여쭈니 스승은 “걸음, 걸음 진실을 밟으라”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분명 합니까. 이러한 답이 바로 등불을 꺼지지 않게 하는 길입니다. 등불만 분명하게 밝히면 진여법계(眞如法界)라, 무타(無他)요 무자(無自)입니다.

[1264호 / 2014년 10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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