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3. 소요산 자재암

기자명 김택근

화마에도 지워지지 않던 원효 흔적, 소요산을 꽃피우다

▲ 자재암 마당에 노란 국화 화분이 모여 있다. 절 앞 청량폭포 청량한 물소리가 법당 부처님을 맑게 씻긴다. 원효대사의 이야기 곳곳에 서린 자재암에 가을이 들어왔다.

동두천 소요산은 ‘경기의 소금강’이라 불린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화려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곱다. 소요산에는 온통 원효대사의 전설이 서려 있다. 가을 입구인 시월 첫날, 그 이야기의 진원지 자재암(주지 혜만 스님)을 찾아갔다. 가을은 산에서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줄지어 서있는 나무들을 따라 요석공원을 지나다보니 요석공주별궁지가 나왔다. 일주문을 지나 한참을 걷다보면 왼편에 원효굴과 원효폭포가 있다. 다시 108계단을 올라 해탈문을 넘으면 원효대가 나타난다. 원효대사가 치열하게 수행했던 공간이란다. 원효대를 지나 치솟은 암벽 사이에 난 숲길을 오르면 세심교(洗心橋)에 이른다. 마음을 씻으려면 가쁜 숨부터 진정시켜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재암이다.

원효대사, 요석공주와 인연 맺고
소요산 들어와 초막서 용맹정진
관음보살 친견 후 자재무애 증득
암자 세우고 ‘자재암’이라 이름

고려·조선 거치며 수차례 전소
20세기 초 제암 스님이 중창
한국전쟁 동안 다시 불탔으나
1961년 진정스님 대웅전 복원
그 후 차례로 전각들 세워져

절 마당에는 노란 국화 화분이 모여 있다. 신도와 등산객들이 올린 꽃공양이 고와보였다. 화분마다 이름과 사연이 적혀있다. 꽃들이 그 이름을 부르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아 정겹다. 절 앞 청량폭포에서 쏟아지는 흰 물줄기가 여유롭다. 문득 귀를 여니 물소리 또한 맑다. 폭포 물줄기가 끊이지 않는다하니 법당 부처님은 저 물소리로 무엇을 씻기실까. 청량폭포의 물은 깊이 떨어진다. 계곡 또한 깊어 맑은 물이 흐른다. 바로 옥류천이다. 원효 스님이 정진했다는 석굴은 이제 부처님을 모신 나한전이다. 나한전 옆에는 약수가 나오는 원효샘이다. 그러고 보니 자재암에는 온통 원효대사 이야기가 스며있다. 그렇다면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자재암 창건설화부터 찾아봐야 한다.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내려오지만 큰 줄거리는 같다.

▲ 자재암 기암절벽 아래 동굴에는 16나한상을 봉안한 나한전이 자리 잡았다.

원효 스님이 요석공주와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설총을 낳았다. 환속을 했으니 다시 부처님 앞에 앉으려면 더 지독한 수행을 해야 했다. 소요산으로 들어와 초막을 짓고 용맹정진하고 있었다. 어느 폭풍우 치는 깊은 밤 선정에 들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스님, 문 좀 열어주세요.”

문을 여니 어둠 속에서 여인이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스님, 죄송합니다. 하룻밤만 재워주십시오.”

원효는 여인의 애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방안에 들어온 여인의 자태는 매혹적이었다. 비에 젖어 속살까지 들여다보였다. 여인이 속삭였다.

“스님, 추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 몸을 녹여주십시오.”

원효는 여인을 눕히고 언 몸을 주물러 녹여 주었다. 여인의 몸이 이내 따뜻해졌다. 기운을 차린 여인이 이번에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순간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간밤 폭우로 불어난 옥류천에 뛰어들었다. 폭포소리는 우렁찼고 계곡물은 차가웠다. 원효는 세찬 물속에서 간밤의 일들을 씻어냈다. 벌써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여인이 어느새 옷을 벗고 물에 들어왔다. 햇살이 여인의 몸에서 부서졌다. 눈이 부셨다. 끝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스님, 저는 유혹한 적 없습니다. 스님이 저를 색안(色眼)으로 볼뿐이지요.”

순간 원효는 온 몸에 벼락을 맞은 듯했다.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 귓전을 때렸다. 원효가 문득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비로소 폭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사물도 제대로 보였다.

‘맞다, 바로 그것이었다.’

원효는 물을 박차고 일어나 발가벗은 몸으로 여인 앞에 섰다. 그리고 거침없이 설했다.  “마음이 생겨 가지가지 법이 생겨나는 것이니(心生則種種法生) 마음을 멸하면 또 가지가지 법이 없어진다(心滅則種種法滅). 나 원효는 자재무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참된 수행의 힘이 있노라.”

원효의 말에 여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같은 웃음이지만 예전 웃음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색기는 간 데 없고 오로지 맑을 뿐이었다. 아니 같은 웃음이지만 원효의 눈에 다르게 보인 것이었다. 여인은 어느새 금빛 후광이 서린 보살로 변해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 이내 사라졌다. 원효는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임을 알았다. 원효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자재무애(自在無碍) 경지를 증득했기에 그곳에 암자를 세우고 자재암(自在庵)이라고 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이 사라진 봉우리를 관음봉이라 불렀다.

원효는 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고 스스로 실계(失戒)를 한 후 자신을 소성(小性)거사, 복성(卜性)거사라 칭했다. 그리고 화엄경의 진리를 담은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널리 퍼뜨렸는데 이는 자재암의 창건설화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 원효대사는 원효대에서 자살을 시도하려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요석공주는 홀연 떠나버린 원효를 찾아 아들 설총을 데리고 소요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공주는 별궁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산위에 올라 원효가 정진하고 있는 원효대를 향하여 절을 올렸는데, 그 때 절을 올렸던 곳이 공주봉이란다. 또 소요산 정상은 의상봉인데 이는 훗날 사람들이 원효와 함께 수행했던 의상대사를 모셔온 셈이었다.

원효대사가 머물자 소요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자연 식수가 부족했다. 온통 바위산이라서 수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원효가 선정에 들어 물줄기를 찾아내 바위틈을 꿰뚫고 물이 나오게 했다. 사람들은 이 우물을 ‘원효정(元曉井)’이라 불렀고 지금 나한전 옆에 있는 원효샘이다. 만병통치의 약수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원효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지만 스님들이 수행에 게으름을 피우면 금세 물줄기가 가늘어졌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는 ‘이곳은 예전에 물이 없어서 승려들이 깃들지 못했는데 원효가 살고부터 단물 방울이 바위굴에서 솟아 났다네’라는 시를 지어 원효를 기렸다. 고려시대에도 원효와 관련된 이야기가 소요산 일대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만하면 왜 소요산이 원효의 산이고, 왜 자재암이 원효의 절인지 알 수 있다. 자재암은 창건 후 깊은 산 속에 묻혀있었다. 문자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후세 사람들이 자재암의 생주이멸을 먹을 찍어 기록했으니, 고려시대부터 그 이름이 나온다.

고려 광종 25년(974) 각규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고 절 이름을 소요사로 바꾸었다. 의종 7년(1153)에는 화재로 소실된 절을 대웅전과 요사만 겨우 복구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의 원당으로 밭 150결(結)을 받았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의 난 이후 불교에 의지해 남은 생을 겨우 붙들고 있었는데 그 신산의 세월을 소요산에 풀어놓은 적이 있었다. 아들 방원을 불효자로 낙인찍은 ‘함흥 살이’를 끝내고 돌아오던 중 소요산에 들어 천보산 회암사로 옮겨가기 전까지 머물렀다. 소요산에는 이성계의 별궁터가 남아있다. 별궁을 나와 소요사에서 머리를 조아린 이성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죄업을 씻었을까.

왕실의 비호를 받던 소요사는 어느 날 폐허가 되어 버렸다. 이성계도, 아들 방원도 사라져 가고 자재암에는 이끼만 내려앉았다. 그리고 조선이 멸하기 직전인 고종 9년(1872) 원공과 제암 스님이 중창하고 영원사라 절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35년 만인 1907년 다시 화재로 만월보전만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버렸다. 다시 1909년 성파, 제암 스님이 중창하고 절 이름을 다시 자재암으로 고쳤다. 이런 내용은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 ‘소요산영원사중건기(逍遙山靈源寺重建記)’ ‘자재암재차중건기(自在庵再次重建記)’ 등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자재암은 한국전쟁 때 다시 불에 타버렸다. 폐허의 절터를 1961년 진정 스님이 대웅전을 세움으로써 다시 일으켰다. 그 후 차례로 전각들이 세워져 오늘의 사격을 갖추었다.

이렇듯 절은 몇 번이나 불에 타버렸으나 원효의 이야기만은 살아남았다. 깊은 산 속 폭포 옆에 서 있는 절을 화마가 삼켜버린 것은 아마도 절을 지키는 이들의 믿음이 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자재암에는 나라의 보물 한 점이 남아있다. 바로 보물 제1211호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란 책이다. 당나라 현장 스님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에 송나라의 중희가 자신이 지은 ‘현정기’를 붙여 다시 편찬한 것이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도서관본과 동일하지만 보전상태가 훨씬 양호하다. 서지학적으로도 귀중한 자료이다.

▲ 주지 혜만 스님은 자재암을 시원하게, 깨끗하게, 예쁘게 가꾸고 있다.

소요산과 자재암은 서로를 닮았다. 주지 혜만 스님은 절을 시원하게, 깨끗하게, 예쁘게 가꿨다. 온통 바위가 둘러싸고 절벽이 가로막고 있어 자재암은 한 치도 더 뻗어나갈 수 없다. 그래도 그 안에는 여백이 있다. 전각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지만 전혀 좁게 느껴지지 않는다. 삼성각 앞 두 그루 노송은 바위에 뿌리를 박고 자재암을 하늘로 들어 올리고 있다. 자재암은 정갈하기에 작은 공간도 커보였다. 어찌보면 108계단 밖의 원효굴도, 공주봉과 의상봉도 모두 자재암 속으로 들어와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소요산 전체를 자재암 경내라 할 수 있다.

▲ 원효대사가 수행했다고 알려진 원효굴 안 부처님이 참배객을 반긴다.

자재암은 사방에서 기(氣)가 떨어진다고 한다. 혜만 스님은 해질녘에 기도를 올리면 그 기운이 온몸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혜만 스님은 만일 새로 몸을 받으면 남쪽에서 태어나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는 고행의 남방 승려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후 또 다시 태어나면 북방에서 최고의 계율승이 되고 싶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열심히 테니스를 익혀 승려 신분으로 딱 10년 동안 세계랭킹 1위를 차지하고 싶다. 그런 다음에도 몸을 받으면 결혼을 한번 해보고 싶단다.

자재암도 몇 번의 몸을 받아왔다. 그렇다면 수백 년 후 자재암은 어떤 모습일까. 그때도 원효대사는 자재암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혜만 스님이 어느 여인과 함께 해탈문을 넘어 올지도 모른다. 자재암을 나오려는데 절벽 위에서 단풍이 소리친다. 당신 마음이 어디있냐고. 다시 귀를 여니 폭포소리였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64호 / 2014년 10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