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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피징계자들의 항변

“1994년 멸빈자는 종단개혁 정당성 위한 희생양”

▲ 조계종이 2014년 4월10일 종단개혁 20주년을 맞아 기념법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원로의장 밀운 스님은 유시를 통해 “개혁에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이지만 불교는 자비문중이며 대화합의 교단이라는 점에서 1994년 종단개혁 당시 반대편에 서있다 멸빈된 9명의 징계자들에 대해 사면복권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2014년 4월10일은 조계종에 있어 뜻 깊은 날이었다. 1994년 4월10일 종단개혁과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사부대중이 서울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한지 꼭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종단개혁의 토대를 다진 개혁회의 출범 20주년을 맞는 기념일이기도 했다. 조계종은 성대한 기념 법회를 열었다. 법회에는 총무원장과 교육원장, 포교원장, 1994년 종단개혁에 앞장섰던 스님과 신도 등 500명이 참석했다. 

호계원법 징계절차 어기고
피징계인 참석 없이 확정
종단 상대 소송한 이유로
종단 최고형 ‘멸빈’ 징계

1994년 개혁회의의 징계
민주적·합리적 절차보다는
감정 앞세운 정치보복 짙어
불교는 자비와 화합의 종교
징계자 포용이 개혁의 완성

이날 원로의장 밀운 스님은 종단개혁과 관련한 유시(諭示)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날 미리 배포된 법회자료집에서 스님은 ‘무원근(無遠近)’이라는 단 3자만을 유시로 발표한 상태였다. 2012년 10월 원로의장에 선출된 이후 처음으로 대중에게 던지는 유시치고는 너무 간략해 많은 궁금증을 낳았다.

잠시 뒤 스님이 법석에 올랐다. 스님은 “금일 행사를 앞두고 유시를 부탁해 짧은 글을 적었지만 ‘무원근’은 따로 할 말이 없다는 뜻”이라며 “대신 오늘 이 자리에서 호소문을 발표하겠다”고 운을 띄웠다. 스님은 작심한 듯 “개혁에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모두 역적이 된다”며 “그러나 불교는 자비문중이며 대화합의 교단”이라고 밝혔다. 스님은 이어 “종단사를 간추려보면 (1983년) 신흥사 주지 문제로 살인 사건이 발생해 비상종단이 출범했고, 다시 해인사승려대회를 통해 정화됐다”며 “그 과정에서 단 한 사람도 징계를 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었다”고 전제했다. 스님은 또 “10·27법난으로 멸빈된 15명에 대해서도 성철 종정의 재가로 사면복권을 한 바 있다”며 “그러니 금일 개혁회의 출범 20주년을 자축하면서 당시 반대편에 서있다 멸빈된 9명을 전원 사면복권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고 말했다.

순간 조계사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동안 조계종에서 ‘1994년 멸빈자 사면복권’은 ‘금기어’처럼 여겨졌다. 개혁종단의 정통성 확보는 그들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사면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유독 밀운 스님은 끊임없이 그들의 사면을 촉구했다. 스님은 2007년 3월 종정 법전 스님을 설득해 멸빈자 사면을 촉구하는 유시를 발표하게 했다. 이후에도 1994년 멸빈자들의 사면복권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밀운 스님이 1994년 멸빈자들과 뚜렷한 친분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스님은 1986년 8월25일 제25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출마했다 의현 스님에게 패하면서 오랜 기간 정적으로 내몰려 모진 핍박을 받았다. 1988년 봉은사 주지였던 밀운 스님은 의현 총무원장과 대립각을 세우다 징계에 내몰리기도 했다. 이에 반발해 강남 총무원 출범을 주도하는 등 의현 총무원장의 재임 내내 대척점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원로의장의 간곡한 호소에도 종단의 반응은 냉담했다. 총무원도, 중앙종회도 원로의장의 간곡한 당부를 모두 외면했다. 종단개혁 20주년 기념법회가 끝난 지 반년이 흘렀지만 어느 누구도 1994년 징계자들에 대한 사면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1994년 징계자들의 절망감이 깊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3년 1월에도 조계종에 큰 소동이 일었다. 1994년 멸빈된 의현 스님이 “징계과정에서 절차상 하자가 있다”며 “특별재심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법규위원회에 심판을 청구했다. 심판청구서에 따르면 조계종의 징계는 호계원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 호법부의 징계청구에 따라 호계원이 피징계인이 참석한 가운데 심판부를 열어 징계여부를 확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징계는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게 의현 스님의 주장이다. 

개혁회의 총무원은 1994년 5월9일 의현 스님의 승적말소를 통보했다. 이는 1994년 4월10일 승려대회에서 의현 스님에 대해 체탈도첩을 결의했고, 4월13일 원로회의와 4월15일 중앙종회에서 재차 결의한 것에 대한 후속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달여 뒤 개혁회의 호법부장 보선 스님은 의현 스님을 다시 초심호계위원회에 징계 회부했다. 이미 체탈도첩을 결의해 승적까지 말소한 스님을 다시 징계에 회부한 것이 훗날 큰 논란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을 당시에는 미처 판단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초심호계위원회는 호법부의 징계요청을 그대로 수용해 6월8일 의현 스님이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체탈도첩을 결의했다.

의현 스님은 “체탈도첩의 징계가 확정돼 승적 말소를 통보했음에도 다시 초심호계위원회에 징계를 청구한 것은 그들 스스로도 절차상 하자가 있었음을 시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님은 이어 “초심호계위원회는 심판에 앞서 피징계인에게 출석요구서를 통보하지 않았다”며 “이 역시 징계절차를 위반한 것으로 효력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같은 의현 스님의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이 사안을 심사하려던 법규위원장 허운 스님은 “법규위원회의 관장 사항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는 이유로 중앙종회로부터 거센 퇴진 압박을 받았다. 결국 허운 스님은 스스로 위원장직을 물러났고, 의현 스님 역시 자신이 제기한 심판청구를 철회했다.

1994년 당시 원로회의 사무처장 원두 스님도 자신의 징계가 부당함을 끊임없이 주장해 왔던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스님은 의현 총무원장 재임시절 그와 대립각을 세웠다. 의현 총무원장의 권력독점 등으로 종단 안팎에서 여러 문제점이 표출되자 1993년 11월 서암 스님을 도와 ‘석존의 교법에 의한 종단재건’이라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1994년 3월23일 문경 봉암사에서 종정 서암 스님과 원로 스님들의 만남을 주선해 ‘의현 총무원장의 3선 반대결의’를 이끌어냈다. 오랜 설득 끝에 의현 총무원장으로부터 ‘4월3일 자진사퇴 하겠다’는 뜻도 받아 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4월3일 오전 서울 대각사에서 학인들에게 납치되면서 무산됐다. 원두 스님에 대한 징계는 개혁회의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됐다. 스님은 소집권자인 서암 스님을 배제하고 혜암 스님이 주도한 원로회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스님은 ‘승려대회 금지 교시’를 이유로 종정을 불신임한 원로회의 결의를 부정했고, 종정 스님이 금지한 승려대회를 통해 출범한 개혁회의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4월15일 중앙종회가 종헌을 개정한 뒤 연이어 개혁회의법을 제정한 것도 무효라고 주장했다. 개혁회의의 토대가 된 종헌개정안이 공포되기도 전에 개혁회의법이 제정된 것은 효력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스님은 4월20일 주간불교에 ‘서암 종정예하에 대한 비법화합의 불신임-그 배경과 진실은 이렇다’는 내용의 석명서(釋名書)를 발표했다. 5월23일 서울 민사지방법원에 ‘개혁회의법 제정결의 무효 확인 소송’도 제기했다.

개혁회의 측은 즉각 징계에 나섰다. 당시 호법부장 보선 스님은 5월6일 원두 스님에게 등원을 통지했다. 그러나 원두 스님은 5월12일과 30일 “범종추와 개혁회의 측으로부터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납치, 감금, 폭행을 당한 전례가 있어 신변의 안전을 위해 응할 수 없다”고 회신했다. 다만 “승단의 여법한 갈마가 진행된다면 언제라도 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원두 스님은 특별한 조사 없이 초심호계위원회에 징계회부 됐다. 원두 스님은 다시 6월3일 초심호계위원회에 징계 사유를 요청했다. 그러나 초심호계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원두 스님이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멸빈을 확정했다.

원두 스님은 “당시 원로회의 소집절차에서부터 종헌개정, 개혁회의법 제정 및 공포 절차는 종헌종법과 부처님의 율법에 위배된 것이었다”며 “조계종의 올바른 법통 승계와 여법한 종단개혁을 위해서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러나 개혁회의는 이를 해종행위로 몰았다”고 항변했다.

불국사 전 주지 종원 스님의 주된 징계 사유는 3월29일 조계사를 침입한 폭력배들의 호텔 투숙비를 대납한 혐의였다. 스님은 1991년 10월 종정 선출 문제로 의현 총무원장 측과 갈등을 빚던 강남총무원에 1억8000여만 원을 지원한 혐의도 받았다. 이로 인해 종원 스님은 6월8일 초심호계위원회로부터 제적의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종원 스님은 “신용카드를 빌려줬을 뿐 서울호텔 숙박자의 내용과 숙박요금도 알지 못했다”고 항변했다. 스님은 강모 서울호텔영업부장의 증언을 담은 사실확인서를 6월22일 재심호계위원회에 제출했다. 재심호계원은 이를 일부 인정해 종원 스님에 대해 제적에서 공권정지 1년으로 감형했다.
 

그러나 징계확정으로 종원 스님은 불국사 주지직을 상실하게 됐다. 개혁회의 측은 즉각 불국사 새 주지에 설조 스님을 임명했다. 그러자 종원 스님은 1994년 7월19일 대구지법 경주지원에 ‘주지지위보전 가처분’과 7월23일 ‘사찰진입금지 가처분’을 제기했다. 결국 이 일로 종원 스님은 다시 징계에 회부돼 멸빈형이 확정됐다.

진경 스님은 개혁회의 총무원장 탄성 스님을 상대로 총무원장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규필·보일·무성 스님 등은 의현 총무원장의 측근으로 그를 조력했다는 혐의로 멸빈을 당했다.

원두 스님은 “1994년 멸빈자들의 상당수는 종단개혁의 정당성을 위한 희생양이었다.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절차보다는 감정과 보복성이 짙었다. 개혁이라는 이름의 폭력 앞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회법이 유일했다. 그러나 개혁회의측은 이를 빌미로 우리를 더욱 옥죄었다”고 회고했다.

1994년 개혁회의는 출범과 동시에 과거 청산을 내걸었다. 물론 과거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통해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미래를 위한 토대를 다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 사실과 명확한 근거를 통해 진행돼야 한다. 불교정신과 전통에서 벗어난 개혁은 결코 훗날 역사의 동의까지 이끌어낼 수는 없다. 불교는 자비와 화합의 종교다. 여전히 진행 중인 1994년 종단개혁의 마지막 방점이 ‘포용’에 찍혀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65호 / 2014년 10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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