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대혜종고가 장시랑 자소에게
16. 대혜종고가 장시랑 자소에게
  • 이재형 기자
  • 승인 2014.10.13 15: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취모검 한번 휘둘러 만 겹 의심을 모조리 깨뜨리다”

남송 최고의 학자 장시랑
경산에서 대혜와 첫 만남
‘격물’ 법문 듣고 큰 감동

비판적 견해로 유배 생활
서신 교환하며 수행 지속
유배 풀려난 후 계속 교유
 
“돌과 돌이 부딪쳐서 나는 불빛이나 번갯불과 같은 그 한 가지 일[一着子]만을 애착하고, 그 외에는 조그마한 것이라도 다른 도리를 용납하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만약 (혜충국사의) 법성이 너그럽지 않았다면, 번뇌가 단절되지 않았다면, 불법으로 사리분별의 견해가 없어지지 않았다면, 윤회하는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감히 그처럼 천하 각지에 머물며 진흙탕에 들어가고 물속에 들어가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었겠습니까."

1149년 남안군(南岸軍, 강서 대유령하)에서 유배생활 8년째를 맞는 자소(子韶) 장구성(張九成, 1092~1159). 자소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다 읽고 난 뒤 “역시 대혜 선사답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스스로 무구거사(無垢居士)라고 부르길 좋아했던 그는 대혜가 평소 자주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고요하고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은 결국 시끄럽고 번잡한 환경에서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함입니다. 시끄럽고 혼잡한 일상 속에서도 화두공부가 된다면 그 힘은 고요하고 좋은 환경에서 공부한 것보다 천만 배나 뛰어납니다.”

자소는 천하의 누구라도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 뜻을 꺾거나 그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음을 알았다. 그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인 문제로 대혜 역시 멀리 형주(衡州)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1141년 유배지로 떠난 대혜가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조사들 어록에서 공안(公案)을 선별하는 일이었다. 조사들의 기연(機緣)문답을 정리함으로써 후학들이 문 없는 문을 열어젖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대혜는 운문이니 임제니 조동이니 위앙이니 법안이니 하는 종파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다만 바른 견해로써 사람들을 깨달음에 들게 할 수 있다면 모두 수록했다. 그렇게 대혜는 661칙을 엄격히 선별했고 여기에 자신의 의견을 붙였다. 그리고 6년 뒤인 1147년 그의 제자들이 이를 편찬해 자소에게 보내온 것이다.

▲ 간화선으로 새로운 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대혜종고 선사.
세상 사람들은 대혜를 ‘장구성 무리의 하나[張九成黨]’라고 말했다. 남송 천도 후 첫 번째 열린 과거시험에서 장원으로 선발된 것이 자소이며, 그 다음 열린 과거에서는 자소의 제자가 다시 장원으로 선발됐기 때문이다. 천하의 영재들이 다 모인다는 과거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낸 그는 예부시랑과 형부시랑을 지내며 조정의 핵심인물로 등장했다. 금(金)나라와 대치하는 격변의 시대를 맞아 자소는 더 이상 송이 물러서면 안 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를 중심으로 장준, 한세충, 악비, 유자우 등이 뜻을 모았다. 이들 주전파(主戰波)는 노회한 재상 진회(秦檜, 1090~1155) 일파와 팽팽히 맞섰다. 그 결과 자소는 실각되고 귀양을 가야했지만 그는 민족적 영웅이자 남송 유학의 선두주자로 칭송됐다. 그렇기에 대혜도 자소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이 세인들의 말이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자소는 그것이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임을 잘 알았다. 오히려 자소는 대혜가 없었다면 오늘날 자신이 없었을 거라 확신했다.

자소가 대혜를 처음 만난 것은 1140년 경산사(徑山寺)에서였다. 여러 벗들과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였다.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대혜가 한 마디 툭 던졌다.
“거사께서는 격물(格物)만 알았지 물격(物格)은 알지 못하시는구려.”
자소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선사께서 깨우쳐 줄 수 있겠습니까?”

대혜가 말했다.
“소설에 실린 얘기를 듣지 못하셨는지요? 당나라 때 안록산과 함께 반란을 도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그는 민(閩) 땅의 태수였는데 초상이 그곳에 걸려 있었습니다. 현종 황제가 그 땅으로 피신했다가 반란 얘기를 듣고 화가 나서 신하에게 그림 속 인물의 목을 치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섬서에 있었는데 갑자기 목이 떨어졌습니다.”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자소는 그 말의 의미를 단박에 깨달았다. 대혜가 말하는 격물은 선의 길도, 유학의 길도 아니었으며 어설픈 절충은 더욱 아니었다. 조사선에 충실하면서 유학의 핵심이 담겨 있었다. 감격에 겨운 자소는 벽에다 일필휘지로 게송을 써내려갔다.

‘자소는 사물에 다가간다 하고(子韶格物) / 묘희(대혜)는 사물이 다가온다 하네(妙喜物格) / 한 꾸러미로 알려 한다면(欲識一貫) / 두 개의 오백이 바로 그것일세(箇兩五百).’

이후 자소는 경산을 자주 찾았다. 그는 대혜에 대해 알면 알수록 놀라웠다. 대혜는 임제에 버금가는 날카로운 안목을 지닌 선사였다. 게다가 ‘화엄경’ ‘능엄경’ ‘열반경’ 등 온갖 불경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제자백가 서적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대혜는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다. 13살에 향교에 들어가 유가 경전을 공부했지만 불교가 훨씬 수승하다고 판단한 그는 16살 때 출가해 다음해 구족계를 받았다. 대혜는 여러 종파의 선수행을 차례차례 익혀나갔다. 그렇지만 대혜는 그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임제종 황룡파 담당문준(湛堂文準, 1042~1115) 회상에 좌복을 펼쳤다. 담당은 뛰어난 선사였다.

담당은 대혜가 말하거나 행동할 때는 선이 있지만 잠이 들면 사라짐을 알았다. 오매일여(寤寐一如)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7살의 대혜가 오매일여를 성취하기 전에 담당의 입적이 먼저 찾아왔다. 마지막 순간 대혜가 물었다.

“화상께서 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면 저는 누구를 의지해서 일대사를 마칠 수 있겠습니까?”
담당이 대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극근이라는 이가 있네. 그를 만난다면 반드시 이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네.”

원오극근(圓悟克勤, 1063~1135)은 오조법연의 법을 이은 임제종 양기파 적손이었다. 담당은 비록 원오가 자신과 다른 법맥이었지만 젊은 대혜에게는 꼭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10여년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담당이 천화(遷化)한 뒤에 대혜는 스승의 어록을 편찬하면서 황룡파 선사들을 의지해 선수행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다 대혜는 건강(健康, 南京)지역에 머물던 원오가 인근의 천녕사(天寧寺)에 주석하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는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방부를 들였다. 1125년 4월, 그가 37살 되던 해였다.

대혜는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에 싸늘한 바람이 부는구나’라는 원오의 상당법어에서 앞뒤 생각이 끊어지는 맑고 텅 빈 자리에 들었다. 원오는 대혜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는 대혜를 시자실에 머물도록 했다. 원오는 대혜에게 시자업무 대신 누군가와 문답을 나눌 때 그것을 지켜보도록 했다. 하지만 대혜가 물을 때면 원오는 “있다는 말[有句]과 없다는 말[無句]이 마치 등나무에 기댄 것과 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대혜가 뭐라고 말하면 곧바로 “그게 아니야”라고 잘라 말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대혜의 심중에는 이제 ‘있다는 말’과 ‘없다는 말’만 꽉 들어찼다.

대혜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질문을 던진 원오 자신은 그 관문을 어떻게 투과했는지를 묻기로 한 것이다. 대혜는 원오가 스승 오조법연에게 그런 질문을 했었는지, 했다면 당시 법연은 뭐라 대답했는지 물었다. 원오는 오조법연이 “그것을 묘사하려고 해도 묘사할 수 없고 그림 그리려고 해도 그릴 수 없다고 말했다”고 얘기했다. 또 “나무가 쓰러지고 등나무가 말라버릴 때는 어떠합니까?”라는 질문에 다시 “서로 따른다(相隨來也)고 대답했었다”고 들려주었다.

순간 대혜는 활연히 깨달았다. “저도 알아냈습니다.” 대혜는 정말 원오의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다. 원오는 대혜가 덩굴나무처럼 자신을 꽁꽁 감싸고 있던 ‘있다’와 ‘없다’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완전히 떨쳐냈음을 알았다. 원오는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 부촉했다. 대혜가 임제의 정통선을 계승했음을 인가한 것이다.

▲ 간화선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대혜선사가 머무르며 법을 펼쳤던 항주 경산사.

대혜의 명성이 천하에 두루 퍼진 것도 그 무렵부터다. 얼마 뒤 원오가 천녕사를 떠나자 대혜는 조그만 암자에 머물렀다. 그러자 선객들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다. 대혜는 그들을 만나면서 수행자들이 조사들의 문답내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분석하는 데 치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진정한 자유정신을 얻고자 하는 선의 진면목은 갈수록 퇴색하고 있었다. 또 사대부들은 자기성찰이 아닌 과시를 목적으로 문장학에 매진하거나 혹은 시끄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선을 추종했다. 대혜의 눈에는 그들이 자신의 존재가치와 공부 목적을 망각해버린 것으로 보였다. 자발성과 주인의식이 결여되는 순간 학문은 생명력을 잃게 되며, 선의 정신과는 상반될 수밖에 없었다.

대혜가 복건성 민 지역에서 스승 원오의 ‘벽암록(碧巖錄)’ 목판을 모아 불태웠던 것도 수행자들이 문자에만 빠져 선의 정수를 등지고 있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건 스승 원오의 뜻이 아니었다. 대혜는 묵조선과 문자선, 공안선을 매섭게 질타했다. 또 사대부들의 언어종속 현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언어와 문자를 주체적으로 활용할 것을 제기했다.

대혜는 자신이 처한 사회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주전파와 뜻을 같이했던 그는 외세의 침략에 백성이 풀처럼 스러지고 있음에도 그저 묵묵히 앉아 좌선에만 몰두하는 묵조선은 선의 정신을 잃었다고 보았다. 대혜가 사대부들의 참선지도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진 것도 일상에서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삶은 물론 모순된 현실을 바꾸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1141년 5월 대혜는 도첩을 박탈당한 채 유배됐다. 그것은 ‘장구성의 일당’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혜의 평소 신념이 드러났던 것에 불과했다. 자소가 부친의 졸곡제(卒哭祭)를 지내기 위해 경산을 찾아 설법을 청했을 때 대혜는 “신비궁(神臂弓) 한번 쏘면 일천 겹 자물쇠도 한꺼번에 열어젖히고, 취모검 한번 휘둘러 만 겹 의심 모조리 깨뜨린다”고 말했다.

신비궁은 금나라와 싸우기 위해 개발한 신무기였다. 대혜의 말에는 금나라에 대항해야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대혜의 말이 알려지면서 주화파가 장악한 조정은 자신들의 정적인 주전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혜를 형주로 귀양 보냈다.

그렇게 대혜와 자소의 유배생활은 시작됐다. 8년 뒤 대혜의 ‘정법안장’을 받은 자소는 꼼꼼히 읽어나갔다. 그곳에는 대혜의 날카로운 안목이 행간마다 번득였다. 자소는 대혜가 조사들의 기연문답을 통해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자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수행자를 몰아붙이려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언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특히 임제의 가풍과는 전혀 관련 없는 문답들이 적지 않음을 알았다. 더욱이 혜충(慧忠, ?~775)국사는 선을 구구하게 풀어내는 의리선(義理禪)을 펼침으로써 제방의 젊은 수행자들을 병들게 한 이가 아니었는가. 자소는 붓을 들었다. 그리고 임제 가풍에서 벗어난 의리선자들을 ‘정법안장’에서 삭제해야 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곧 파사현정(破邪顯正)이며 ‘정법’을 바로세울 수 있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 ‘곧장 드러내고 한 칼에 양단한다(單傳直指)’는 대혜의 선풍이 물러진 것은 아닌지, 행여 종파를 가리지 않듯 금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도 수용하려는 것은 아닌지 알아봐야겠다는 속내도 있었다.

자소는 얼마 뒤 대혜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정법안장’은 선의 전적이지만 다양한 근기를 생각해 친절하게 설한 것도 있고, 돌과 돌이 부딪쳐서 나는 불빛이나 번갯불과도 같은 격외(格外)의 도리를 담고 있다고 했다. 중생의 다양한 근기에 맞추려면 마치 진흙이나 물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혜충국사와 같은 친절한 노파선(老婆禪)을 허물로 봐서야 되겠냐는 따가운 질책이었다. 그러면서 대혜는 단지 한순간에 번쩍하는 것만 좋아하지 말고 보다 널리 볼 것을 적극 권하고 있었다.

자소는 대혜의 그릇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의 언어는 선에 국한되지 않고 수많은 불경과 역사, 문학을 넘나들었다. 그러면서도 대혜의 언어는 철저히 본래성불을 일깨우고 있었으며, 사량분별이 끊어진 자리로 이끌었다.

1156년, 대혜가 마침내 16년 간의 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였다. ‘송사(宋史)’에 ‘자소는 경산의 승려 (대혜)종고와 선리(禪理)에 대한 담론을 잘했다’는 기록처럼 16년 만에 만난 그들은 귀양살이 얘기는 한 마디도 않고 오로지 선법(禪法)만을 논했다. 그는 훗날 대혜로부터 “장애가 없는 경계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소) 장구성뿐”이라고 인정받았다. 경산을 자주 찾아 법을 묻고 공양을 올렸던 그는 1159년 6월4일 세상과의 인연을 마쳤다. 남송 초기 최고의 경학자(經學者)였던 자소는 훗날 주희(朱熹, 1130~1200)로부터 “인물됨이 위대하다”는 찬탄을 받으면서도 “일생동안 선을 공부했다. 그의 학문은 근본부터 말단까지 스승 대혜로부터 받았다”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대혜도 수행자들은 물론 140여명의 사대부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마지막까지 삿된 견해를 깨고 정견을 열어주려 노력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간화선으로 조사가 보인 말과 행동을 화두로 삼아 우직하게 참구하는 수행법이었다. 하나의 집중된 의심덩어리를 타파해 대자유에 이르는 방법을 대혜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체계화했던 것이다.

대혜는 황제의 명으로 아육왕사를 거쳐 다시 경산사에 주석할 수 있었다. 대혜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다. 황제 효종까지도 그를 우러르고 찬탄했다. 지식인들은 대혜의 언어에 환호했고, 심지어 젊은 시절 주희조차 ‘대혜어록’만 갖고 과거시험을 보러갈 정도로 한때 간화선에 깊이 매료됐다. 대혜가 경산사에 법을 펴자 2000여명의 대중이 모여 정진했으며, 그의 법을 이은 수행자가 83명이나 됐다. 대혜에 의해 새로운 선의 황금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방장실에 앉아있는 것이 철근 120근을 지고 나무다리를 지나는 것과 같다’던 그는 사량분별을 단숨에 잘라내는 경절(徑截)의 길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일생을 치열함과 성실함으로 일관했던 선의 종장 대혜는 1163년 10월, 75살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시자가 임종게를 청하자 대혜가 일렀다.

‘태어남도 다만 이러하고(生也只恁摩) / 죽음도 다만 이러하네(死也只恁摩) / 게송을 남기거나 남기지 않는 것(有偈與無偈) / 무엇이 그리 대단한가(是甚摩熱大).’

대혜가 자소 장구성에게 보낸 편지는 ‘서장(書狀)’으로 불리는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에 실려 있다. ‘서장’은 중국선종의 역사를 새롭게 썼을 뿐 아니라 고려 보조국사 지눌이 이 책을 읽고 깨닫는 등 한국 간화선의 지침서로 인식돼 왔다. 또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불교전문교육기관인 강원(講院)의 필수과목이기도 하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 자료 : 일휴 역 ‘대혜보각선사서’(정우서적), 무비 역 ‘이것이 간화선이다’(민족사), 변희욱 ‘대혜 간화선 연구’(서울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황금연 ‘대혜종고선사의 서장 연구’(동국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인경 스님 ‘대혜 간화선 특질’(보조사상 13집), 종호 스님 ‘간화선 형성의 사회적 배경’(보조사상 13집), 김영미, ‘주희의 장구성 비판에 나타난 유불의 경계’(중국학논총 11집), 조남호 ‘주희의 대혜·장구성 비판’(철학사상 27호), 변희욱 ‘송대의 간화와 격물’(불교평론 38)

 [1265호 / 2014년 10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