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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무명관(無明觀)

번뇌의 근본 원인이자 극복해야 할 수행과제

불교는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괴로움으로 본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비로소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제자 아난다에게 “고(苦)를 보는 자 열반을 본다”라고 하신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중생들이 겪고 있는 크고 작은 괴로움들을 진리로 받아들일 때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진리도 알 수 있다.

초기불교, 무명은 제거 대상
세계 또한 더럽고 추한 존재

대승에서 무명의 본질은 공
청정한 불성의 왜곡된 작용

무명에 대한 관점에 따라서
세상을 부정·긍정 달리해석

이런 중생의 괴로움을 논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번뇌(煩惱)다. 번뇌는 중생의 해탈을 가로막고 열반을 방해하는 직접적 요인들로 모든 괴로움의 원천이 된다. 부처님은 번뇌를 화살·늪·강물·바다·불길·가시 등에 비유하고 이를 속히 끊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중생들은 팔만사천번뇌라 할 만큼 많은 번뇌를 일으키고 있으며 그 때문에 괴로움에 젖어 산다. 그렇다면 이들 수많은 번뇌의 근원은 무엇일까? 바로 무명(無明)이다. 무명은 중생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짊어지고 온 근원적 어리석음으로 모든 번뇌의 원흉이 된다. 마치 나무에 붙은 수많은 줄기와 잎이 궁극적으로 나무뿌리에 의해 생겨나는 것처럼 무명은 중생들에게 한량없는 번뇌들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수행을 완성하여 해탈을 성취하고 열반을 실현하는 것도 이 무명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가능하다. 마치 나무의 뿌리가 죽지 않으면 줄기와 잎도 죽지 않는 것처럼 마음 가운데에 무명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다면 어떠한 번뇌도 사라지지 않는다. 무명을 근본번뇌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번뇌의 근본원인이라는 무명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역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는 확연하다. 초기든 대승이든 무명이라는 주제를 핵심적으로 다루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무명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수행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명의 정의와 본질을 설하는데 있어서는 역시 이해를 달리한다.

▲ 그림=김승연 화백

초기불교는 삼법인(三法印)이나 사성제(四聖諦) 십이연기(十二緣起) 등을 알지 못하는 것을 무명의 정의로 삼는다. 무명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은 삼법인의 이치를 확인하고 괴로움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인 십이연기를 꿰뚫어 아는 것이다. 만약 수행을 해서 어떤 경지를 얻었다 해도 삼법인을 알지 못하고 십이연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직 무명에 잠겨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무명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초기불교는 무명을 실체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무명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무명은 그냥 무명일 뿐이다. ‘니까야’ 경전에서는 “무명의 원인은 번뇌에 있고 번뇌는 역시 무명에 의존한다”고 설한다. 초기불교에서는 무명을 마냥 무명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이런 입장은 자연히 중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연결되어 중생과 세계의 본래 모습을 부정적이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한다. 중생은 본래 무명의 존재이기 때문에 더럽고 어둡고 부자유하고 괴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십이연기 교설을 보면 십이연기는 무명에 의해 시작하고 마지막 노사(老死)는 다시 무명으로 연결돼 끝없는 연기의 반복을 가져오게 한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는 무명의 정의를 두 가지 측면에서 밝히고 있다. 하나는 일체제법이 공(空)한 줄 모르는 것과 마음의 본성이 불성(佛性)이며 진여(眞如)임을 알지 못하는 것에 있다. 대승의 중심사상이 공과 불성이므로 무명의 문제도 공과 불성에 두고 설명을 한다. 공을 체달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인 것이다. 이로 인해 대승의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삼법인이나 십이연기 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 공과 불성을 철저히 관통해 이를 증득하는 것을 수행의 의미로 삼는다. 대승불교의 시각에서 보자면 초기불교 수행자들이 확인한 삼법인이나 십이연기의 법칙은 공하여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무명의 문제에 있어 초기불교와 현격하게 다른 점은 대승불교가 무명의 본성에 대해 철저하게 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사실은 대승불교의 특징은 무명을 실체로 보지 않고 도리어 이를 불성과 진여의 한 작용으로 보고 있다는데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중생들에게 무명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 무명은 본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부처님 마음과 똑같은 광명의 성질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연기설에 대해서도 무명을 시작으로 하는 연기설이 아닌 부처의 마음이라 할 수 있는 진여연기설을 따른다. 무명은 본래 진실하고 청정하고 밝고 변하지 않는 진여와 불성의 성질을 띠고 있으므로 십이연기 또한 진여와 불성의 작용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마치 물이 오염되어 흐리고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지만 물의 본래 성질은 맑고 고요한 것처럼 중생의 마음이 무명에 물들어 갖가지 번뇌가 일어난다 해도 그 실상은 맑고 고요해서 부처의 마음과 같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무명을 무명으로만 여기지 않고 광명불성에서 일으키는 왜곡된 작용으로 보고 있다.

대승불교의 무명에 대한 이와 같은 입장은 이제 중생과 세계에도 영양을 미쳐 중생과 세계의 본래 모습을 부정과 혐오의 대상이 아닌 긍정과 복락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무명의 본성이 곧 진여불성임을 알고 일체가 공하다는 이치를 깨달으면 이 세상에 괴로움은 사라지며 또한 괴로움이 없는 것이 본래 중생과 세계의 실상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정토설이나 불국토설은 바로 이러한 교설 아래서 펼쳐진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무명을 실체화시키고 이를 끊고자 노력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부정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져오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명의 본질을 광명으로 보고 이를 전환시키려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긍정적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져오게 한다. 마치 기독교 구약시대에 죄가 예수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해석되어 인간들에게 자유를 준 것처럼 초기불교의 무명은 대승불교에 들어와 새로운 해석을 얻고 중생들에게 큰 희망을 갖게 하였다. 초기불교나 대승불교 모두 무명은 반드시 끊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무명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과 세계의 모습은 달라진다. 당연히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느 교리를 수승한 교리로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문제는 각자의 몫으로 맡겨둔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65호 / 2014년 10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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