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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안동일 변호사

“아미타부처님 염송이 순간순간 이어져 만일행복 완성”

▲ 안동일 변호사는 “노년은 ‘해야 할 일’을 마친 가슴 뛰는 삶의 시작이고, ‘하고 싶은 일’을 통해 행복을 만끽해야 할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27년 5개월, 무려 1만일 동안이다.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몸과 마음으로 부르기를 만일간 지속하는 염불만일결사(念佛萬日結社). 신라 경덕왕 17년(758) 발징 화상에 의해 최초의 결사가 이뤄진 이래 염불만일의 전통은 여전히 성성하게 이어지고 있다. ‘전국염불만일회’는 지금 바로 이 시대에 염불만일의 전통을 잇는 대표적인 수행결사모임이다. 1998년 8월6일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서 결사에 입재한 염불만일회는 2025년 12월21일까지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고 사경하면서 ‘아미타경’ 독경과 함께 수행의 공덕을 나눔으로 회향한다.

아버지 타계 계기로 불교공부
김재일 법사와 ‘동산’ 이끌어
염불만일 회향까지 뒷바라지
달라이라마 방한 또다른 발원

염불만일회 염불행자는 300여명에 이른다. 결사에 입재한지 6000일을 앞두고 있지만 그들의 염불소리는 여전하다. 염불행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에서 초심을 잊지 않은 채 자신과의 약속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안동일(75·관해) 변호사 역시 16년 전 건봉사에서 1만일 정진을 발원한 이후 매일 아미타부처님을 염송하고 있다. 알음알이의 한편에는 일분일초도 아미타부처님을 잊은 적이 없다. 이렇듯 염불만일회가 결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데에는 안 변호사의 역할이 크다. 고인이 된 김재일 법사의 원력을 이어 염불행자들을 다독이며 결사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회향까지 앞으로 11년. 1만일 정진불사에 함께 하는 도반들이 결사를 회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의 서원이다.

“승속을 떠나 소통하고 신뢰할 수 있다. 김재일 법사와 함께 무진장 스님을 모시고 동산반야회의 오늘을 있게 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솔선해 염불만일회를 이끌면서 회원들과 함께 정진하는 모습에서 이 시대의 참다운 불자상이라 칭하고 싶다.”(동국대 정각원장 법타 스님) “우리사회에 정의와 부처님 법이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조계종을 비롯해 중앙신도회, 동산반야회 등이 과거 어려움을 딛고 안정을 되찾는데 크게 기여했다.”(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이제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 불교계에선 이름난 불자변호사이지만 그가 부처님 제자됨을 청한 것은 50이 넘어서다. 앞서 세간에선 그를 진보를 대변하는 ‘재야변호사’라 불렀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그는 독재정권과 위정자들이 ‘불온서적’이라고 낙인찍은 책들을 탐독했다. 그리고 서울대의 대표적인 진보서클인 사회법학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4·19혁명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민족통일연맹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총칼을 앞세워 정권을 침탈한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정권의 검거선풍에 휘말리기도 했다. 변호사가 된 후에도 인권을 보호하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변론과 정의구현에 앞장섰다. 10·26사태 주범 김재규와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변론했다. 변호사로서 그의 활동은 통일과 노동, 인권에 집중되었다.

그러던 1993년 갑작스럽게 부친이 타계했다. 독실한 불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이 부처님과의 인연을 맺기는 했으나 일에 치여 불교를 가까이 하지 못했었다. 인생의 지남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좀처럼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재야변호사’라는 칭호 앞에 ‘불자’가 붙게 된 계기였다.

“불현듯 부처님의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사무치게 그리운 아버지와의 추억을 더듬다보니 어느새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아버지의 미소가 꼭 부처님 같았었어요. 마음을 추스르려 송광사로 향했고, 며칠 머물면서 스님 법문도 듣고 참선도 하니 조금 편해지더군요.”

문득 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금해졌다. 서울로 상경해 무작정 조계사를 참배했다. 조계사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운명처럼 김재일 법사를 만났다. 김 법사는 한 해 전 재가불자들도 불교를 배울 수 있도록 조계사 인근에 동산불교대학의 문을 열었다. 1993년 8월, 2년 과정의 동산 3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는 변호사로 명성을 날리던 때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그러나 불교공부는 언제나 첫 순위였다.

“변호사 일을 하면서 토요일마다 불교대학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토요일도 일하던 때라 불가피하게 수업을 빼먹게 되면 강의내용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구해 보충했지요. 부처님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그렇게 마음에 와 닿고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아버지를 여읜 허탈감을 극복하고자 시작한 불교공부인데 여기서 내가 행복해지니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그러던 중 김 법사가 염불수행을 권하더군요. 불교공부와 수행은 병행해야 한다면서…. 그때부터 새벽예불과 108배로 하루를 시작해 시간 나는 대로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사경을 했습니다.”

모든 게 김 법사로부터 배운 것이니 인연의 지중함이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실제 김 법사와 안 변호사는 형제처럼 모든 것을 논의했다. 그만큼 서로를 굳게 믿었다. 함께 한국재가불자연합을 만들고, 염불만일회를 결사했으며, 자비나눔을 실천하는 붓다클럽(현 동산로터스)을 창립했다. 2008년 김 법사가 숙환으로 타계하자 동산반야회·동산불교대학, 염불만일회 등을 이어받아 재가교육도량 동산을 이끌었다.

“투병 중이던 김 법사가 갑자기 찾아와 동산 이사장직을 부탁했습니다. 동산이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재가교육도량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법적으로 갖춰달라고 했죠. 얼마 후 김 법사는 타계했고, 그 귀한 인연과 참 불자의 모습으로 살았던 김 법사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동산반야회·동산불교대학은 시스템에 따라 운영되고 있습니다. 염불만일회는 회향하는 날까지 뒷바라지할 생각입니다.”

 
최근 안 변호사는 또 하나의 발원을 세웠다. 한국에 달라이라마를 모시는 일이 그것이다. 달라이라마와의 인연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인연은 홍콩공항 서점에서 우연히 구입한 ‘The Art of Happiness’(‘달라이라마의 행복론’으로 번역돼 출간)를 통해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을 친견했다. 행복하려면 사랑해야 하고 사람을 위하는 그 사랑의 마음이 곧 자비심이자 이타심이며 보리심이라는 메시지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후 달라이라마의 책은 빠짐없이 읽었다. 한 권, 두 권, 책이 쌓여가면서 직접 뵙고 싶다는 바람이 커졌고 결국 2010년 인도 다람살라로 향했다.

“눈을 맞추며 손을 잡아주던 달라이라마는 생각했던 그대로였습니다. 존자님의 법문은 한 없이 자비로웠고 유쾌했으며, 꼭 한국을 방문해 한국의 불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이웃의 일본은 매년 오셔서 일본불자들 위한 법석을 여십니다. 우리 정부는 올해 가톨릭 교황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달라이라마의 방한을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주권국가입니다. 최근 외신을 보면 중국마저도 달라이라마의 고향방문에 대한 입장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한 번 크게 부딪치더라도 이를 넘어서면 더 큰 진전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염불만일 결사를 회향하고 한국에서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듣는다면 더 바랄 게 있겠습니까?”

부모님은 불심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김재일 법사는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랄 수 있도록 양분을 주었다. 달라이라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곧 행복의 길이라는 진언을 그의 가슴에 새겨 주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은 탄생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모든 중생의 고통을 멸하고 편안케 하기 위함[三界皆苦 我當安之]’입니다. 팔만사천법문 모두가 고통을 여의는 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고민과 걱정 속에 행복과 즐거움이 있으므로, 행복은 따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고통 안에 무명을 걷어내면 그곳에 행복이 있다는 것, 곧 번뇌가 행복임을 일러주셨습니다. 불교를 공부한 후 알게 된 행복의 길이자 달라이라마를 통해 확신하게 된 바로 그 길입니다.”

안 변호사는 더 많은 후배들이 행복의 길에 동참하기를 서원한다. 인연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불교공부를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년은 ‘해야 할 일’을 마친 가슴 뛰는 삶의 시작이고, ‘하고 싶은 일’을 통해 행복을 만끽해야 할 시간이다. 때문에 행복하고 즐거운 노년을 위해서는 불교공부만 한 게 없고 빠르면 빠를수록 행복의 시간은 길어질 것이라고 조언한다.

티베트의 위대한 시인 샨띠데바는 ‘입보리행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의 고(苦)를 치료하는 오직 한 가지 약이며 모든 안락의 근원이다.” 일체 인연들의 마음에 연꽃을 피우기 위해 안동일 변호사가 정진하는 이유다. 안 변호사의 남은 생 직함은 행복을 파종하는 전법사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66호 / 2014년 10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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