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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유심인과(唯心因果)

기자명 혜국 스님

“인과와 하나된 사람이 깨달은 사람, 항상 자신의 삶 책임져”

▲ 중국 낙양 용문석굴 맞은편에 위치한 향산사. 중국 당나라 시대 3대 시인인 백거이가 이곳에서 불교에 귀의해 향산거사로 칭하며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요급상응(要急相應)하면 유언불이(唯言不二)로다, 재빨리 상응코자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재빨리 상응한다”는 말은 몰록 “바로 본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바로 본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내 스스로 내 자신을 버려두고 번뇌 망상이라는 도둑을 따라 다니느라 그 얼마나 많은 세월, 생사윤회를 하였습니까? 생사윤회의 길을 선택하는 길도 나요,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는 대자유의 길을 선택하는 것도 바로 나입니다. 그러한 나를 운전하는 이가 어느 쪽으로 운전하고 있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 말은 오늘 이 시간 나는 어떤 생각이 나를 이끌고 다니고 있느냐, 아니면 연기공성(緣起空性)으로서의 참나를 깨달아 내가 내 생각을 끌고 다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니 둘이 아닐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오직 한 생각 차이이니 재빨리 상응하고자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체를 만든다는
유심인과를 깨달은 이는
늘 지혜로운 삶 실천해

마음에 강한 생각 낸다면
게으름과 모자람, 부정함
얼마든지 고쳐나갈 수 있어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며
주인이라는 믿음 보다
중요한 가치 존재하지 않아

여담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손오공하고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 셋이 배를 타고 가다가 태풍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겨우 무인도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설후시지송백조(雪後始知松栢操)하고 사난방견장부심(事難方見丈夫心)”이라고 일이 어려워지면 업(業)이 발현하게 됩니다. 무인도에 도착하자마자 손오공은 섬을 빠져나가려고 온 섬을 헤매고 돌아다니고 저팔계는 계속 먹을 것만 찾아다니며 먹을 궁리만 하고 사오정은 피곤하다며 계속 잠만 자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 업(業)대로 행동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손오공이 용케도 요술램프를 하나 발견했는데 거기서 노인 한분이 나오더니 각자에게 소원 한가지씩만 들어줄 수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빨리 소원을 말하라 했겠지요. 손오공은 얼른 집에 보내달라고 해서‘펑’하는 소리와 함께 집에 가게 되었고 저팔계는 먹을 것이 풍족한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참 자고 있던 사오정이었습니다. 노인이 사오정을 깨워 “너의 소원이 뭐냐? 빨리 말하지 않으면 나는 그냥 돌아가야 한다”고 말을 하니 사오정 하는 말이 “어! 손오공하고 저팔계 이놈들이 다 어디 갔지? 이놈들 빨리 불러줘”라고 했답니다. 어눌한 사오정의 이 한마디 소원 때문에 손오공과 저팔계는 어렵게 이룬 소원을 잃게 되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다시 무인도로 오게 됐다는 뜻이지요. 어눌한 사오정 같은 인연을 만나면 이거야 말로 죽을 쑤는 격입니다.

그러나 허명자조(虛明自照)만 되면 다시 불러드릴 수가 없습니다. 헐떡거리는 마음이 손오공을 움직이고 먹고 싶은 마음이 저팔계를 움직이는 것이지요. 그런 마음이 없으면 그 누구도 움직일 수가 없으니 빨리 상응하고자 하거든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 할뿐이라는 겁니다. 잘 생각해보면 업(業)이 나를 움직일 수 있지 허명자조(虛明自照)한 그러한 세계에서는 결코 나를 움직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불이개동(不二皆同)하야 무불포용(無不包容)하니,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삶과 죽음, 나와 남 지금까지 누누이 둘이 아니라고 얘기했습니다. 금(金)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든, 반지를 만들었든 이름만 다를 뿐 모두가 금(金)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목걸이나 반지라는 이름을 붙여 달리 부릅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그 목걸이나 반지의 본질은 금(金)이라는 것을 믿고 알듯이 진리의 세계도 깨닫고 보면 모두가 한마음이니 포용하지 않을 게 없다는 겁니다. 유마경에 보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서 많은 질문들이 오갑니다.

결국 보살들이 유마거사에게 불이법(不二法)에 대해서 물으니 유마는 오직 한마디 말없이 묵언만 하였으니 이때 문수보살이 찬탄하여 가로되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갔다”고 이르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실로 미세망상까지도 설 자리가 없는 우레 소리 같다하여 그 말없는 침묵을 일묵여뢰(一默如雷)라고 합니다. 본래 공(空)한 자리에 어찌 조사범부가 따로 있으며 깊고 넓은 바닷물에서 강 이름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내가 어떤 길을 가느냐, 그것일 뿐 아닙니까?

내가 아무렇게나 살아서 번뇌 망상 따라가면 인생 내리막길이요, 내리막길은 여러 갈래 길이요, 올라가는 길은 오직 상봉 하나일 뿐 둘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선가(禪家)에서는 내려가는 놈도 그놈이요, 올라가는 놈도 그놈이라 내려간 바도 없고 올라간 바도 없으니 둘이 아닌 겁니다. 둘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포용하지 않음이 없을 수밖에 없겠지요. 허공이 포용하지 않는 게 없듯이 단 한번뿐인 기회, 오직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에만 존재하는 인생,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고 생각하시나요?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 말은 남의 모함이나 내 앞에 이겨내기 힘든 역경이나 그런 것들 모두 다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똥물이든 빗물이든 그냥 조건 없이 받아들이면 바다가 되는 것처럼요. 과연 이 세상에 태어나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나의 인생점수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80·90점 넘으면 자동 극락이요, 30·40점 안되면 바로 지옥입니다. 50·60점 짜리가 바로 인간에 태어나는 건데 45점짜리, 바로 이게 문제가 됩니다. 지옥으로 보내려니 점수가 조금 남고 인간으로 태어나려니 점수가 조금 모자라니까요.

결국 염라대왕이 결론을 내립니다. 그 점수 가지고는 정해진 세집 밖에는 태어날 곳이 없다고요. 첫째 집을 살펴보니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되는 집이요, 둘째는 거지집이요, 마지막 셋째 집은 부모도 훌륭하고 부잣집인데 본인이 평생 가지가지 병(病) 속에 사는 그러한 집인 겁니다. 자기 점수가 그것뿐이라 다른 집에는 태어날 점수가 안 되니 할 수 없이 셋째 집에 태어나게 됩니다. 당연히 그 사람은 평생 병(病)에 시달리며 살게 됐지요. 그 누가 억지로 병(病)을 갖다 맡기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시방지자(十方智者)가 개입차종(皆入此宗)이라,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宗趣)로 들어옴이라.”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이란 도(道)와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이는 연기공성(緣起空性)을 깨달은 이들이며 그 길을 걷는 이들은 인과(因果)와 하나가 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과(因果)란 내가 내 삶을 책임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약인욕요지(若人慾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일체가 마음이 만든다는 유심인과(唯心因果)를 깨달은 이들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즉 자신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걸 믿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요.

인과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인과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동시인과(同時因果)입니다. 내가 만원을 주고 물건을 사면 바로 만원짜리 물건을 돌려받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나는 인과 관계입니다. 그래서 동시인과라고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일어나는 인과는 모양이 있는 상법(相法)에서만 일어나는 인과입니다. 이시인과(異時因果)나 그리고 강약인과(强弱因果), 유심인과(唯心因果)에서 보면 동시인과는 한계가 있는 인과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오늘 사과나무를 심었는데도 그날 사과 열매가 열리는 게 아니라 지(地),수(水),화(火),풍(風) 네 가지 인연에 의해서 싹이 트고  나무로 자라 꽃이 피고 사과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과는 5~6년 있다가 열립니다. 이시인과지요. 물론 시간과 공간이 없는 유심인과의 세계에서 보면 바로 씨앗을 심을 때 사과는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죠. 인과동시(因果同時)라고 합니다. 그 다음 강약인과라고 하는 것은 인과라고 하는 것이 물리적인 법칙이 아니고 마음의 법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에 한 생각, 강한 생각을 내면 내 게으름도 내 모자람도 얼마든지 고쳐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강인한 마음이 아니라 되면 되고 말면 말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는 평생을 고쳐도 자기 단점하나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한 자기 성질을 고치고 못 고치고는 내 마음을 얼마나 강하게 쓰느냐 약하게 쓰느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10년 동안 나무를 했는데 매일 한 짐씩 나무를 해서 쌓아놓으면 십년 걸려서 쌓은 나무가 강한 불길이 오면 한순간에 타서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강약인과의 이치입니다. 중생으로 살아가는 모든 죄업이라는 것도 본래 내가 부처임을 확연히 믿고 정견(正見)을 세우고 강인한 실천행을 하면 죄업이 본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한순간에 천년, 만년의 죄업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강약인과의 이치입니다.

마지막으로 유심인과인데 유심인과는 오직 유(唯)자 마음 심(心)자 모든 것은 마음이다, 처음이니 나중이니 지금 일어나지 않고 다음에 일어난다느니, 강하다느니 약하다느니 등 전체가 마음이 하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고로 일어나는 자리도 마음이요, 멸하는 자리도 마음이요, 강하다고 하는 자리도 마음이요, 약하다는 자리도 마음이니 일체 마음일 뿐입니다. 바로 유심인과(唯心因果)입니다. 일체가 마음의 그림자였으니 결국 이 마음을 깨닫는 길이 ‘신심명’ 가르침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로 들어오는 겁니다. 반드시 노력하고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뜨고 임운등등(任運騰騰) 등등임운(騰騰任運) 태평가를 부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266호 / 2014년 10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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