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조계종 제28대 집행부 출범
31. 조계종 제28대 집행부 출범
  • 권오영 기자
  • 승인 2014.11.03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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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대중 원력으로 이룩한 개혁종단 첫 집행부

▲ 1994년 11월21일 제28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월주 스님이 당선됐다. 스님은 당선 이후 개혁회의가 마련한 개혁입법을 토대로 종단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월주 스님이 1998년 다시 총무원장에 도전하면서 분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조계종은 씻을 수 없는 이미지 손상을 입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1994년 10월 조계종에 선거 바람이 불었다. 10월10일 개혁회의가 총무원장 선거법과 중앙종회의원 선거법을 제·개정하면서 종단 안팎에서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때까지 조계종에서 종단 대표자를 직접 선출방식으로 뽑은 전례는 없었다. 총무원장은 중앙종회에서 종회의원들의 투표로 결정됐다. 중앙종회의원도 간접선출 방식으로 뽑혔다. 각 교구를 대표하는 지역대표는 본말사 주지회의에서 선출됐고, 간선직은 간선의원선출위원회에서 사실상 지명했다. 종단 대표자를 뽑는 논의구조에서 일반 종도들의 의사는 철저히 배제됐다.

개혁회의 선거법 개정으로
종회의원·총무원장 선출해
조계종 직접민주주의 실현

첫 선거 월주·월탄스님 출마
월주 스님 22표 차이로 당선
교육·포교·사회활동에 앞장
98년 종단분규로 개혁 손상


그러나 개혁회의가 총무원장과 중앙종회의원 선거법을 제·개정하면서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개혁회의는 총무원장을 중앙종회의원 81명과 전국 24개 교구종회에서 각각 10명을 선출해 총 321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뽑도록 했다. 이 역시 간접 선거방식이긴 했지만 전국 교구본사에서 240명의 선거인단을 뽑아 총무원장 선거에 참여하도록 한 것은 조계종사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중앙종회의원은 총 81명으로 구성하되, 직능대표 20명과 비구니 10명을 제외하고 각 교구에서 재적승들의 투표에 의해 51명을 선출하도록 했다. 비구니 종회의원 10명은 비구니계의 추천을 받아 직능대표선출위원회에서 선출한다고 명시했다.
 
당시 개혁회의 기획조정실장 현응 스님은 “중앙종회의원 10석은 전체 종회의원 수의 12%에 해당된다. 그 당시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3%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10%를 넘어선 것도 최근의 일이다. 10석을 비구니 스님들에게 배정한 것은 파격적인 조치였다. 선출절차도 비구니계에 맡김으로써 자율성을 보장했다”고 회고했다.
 
개혁회의는 교구별로 직접 선출하는 종회의원의 수를 재적승의 비율에 따라 차등 적용했다. 다만 특정교구의 편중현상을 막기 위해 교구 재적승 1000명을 기준으로 일괄적으로 2명의 종회의원을 배정하되, 1000명이 넘을 경우 1석을 추가하고 1500명이 넘을 경우 2석을 더 주기로 했다. 이에 따라 당시 재적승이 1200여명에 달했던 해인사는 3명을, 1600여명이 넘었던 직할교구는 4명의 종회의원을 배정했다. 그러나 각 교구별로 재적승 수의 편차가 큰 상황에서 1000명을 기준으로 일괄적으로 종회의원 2명을 배정한 것은 2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개혁회의는 중앙종회의원 피선거권도 승랍 15년, 연령 35세 이상이면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누구나 출마할 수 있도록 확대했다. 그러나 선거권은 구족계를 수지한 비구와 사미계를 받고 7년이 경과한 자에게만 부여하기로 해 비구니 스님들의 참여를 제한했다. 비구니 스님들은 10명의 종회의원을 자체적으로 선출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비구니 스님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비구 스님들에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보장하면서 비구니 스님들에게는 종회의원을 직접 선출할 기회조차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비구니회 스님들은 10월19일 성명을 내고 개혁회의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비구니 스님들은 “의현 총무원장의 3임 저지를 위한 구종 단결에는 문중간 차별도, 비구·비구니의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며 “오직 종단개혁과 정법실현의 이념만 있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비구니 스님들은 이어 “개혁회의는 비구니의 중앙종회의원 선거권을 박탈하고 비구 스님들에게만 직선권을 부여함으로써 형평성 없는 절름발이 직선제를 만들었다”며 “비구니들은 개혁회의가 승단을 대립과 갈등의 구조로 몰아가는 것에 분노한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선거법 재개정 △비구니 종회의원 직선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비구니 개혁회의 의원 9명이 10월25일 “비구니 종회의원 10명은 30인 비구니 추천위원회에서 선출하도록 한다”고 결의하면서 젊은 비구니 학인 스님들의 요구를 외면했다. 젊은 비구니 학인 스님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선거법 개정을 위해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결국 조계종 개혁회의는 11대 종회의원 선거가 마무리된 직후인 11월9일 제12차 회의를 열어 중앙종회의원선거법을 개정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비구니 종회의원에 출마하고자 하는 후보자는 중앙선관위에 후보등록을 하도록 했다. 각 교구는 비구 종회의원과 별도로 비구니 선거절차를 진행하도록 했다. 각 교구의 기표지를 모아 다득표 순으로 비구니 종회의원 10명을 선출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비구니 스님들에게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됐다. 비록 11대 종회에서는 어렵게 됐지만 4년 뒤 12대 중앙종회의원 선거에서는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12대 중앙종회의원 선거를 목전에 둔 1998년 9월8일 중앙종회는 돌연 이 조항을 삭제했다. 대신 “비구니 중앙종회의원은 전국비구니 대표단체(전국비구니회 운영위원회)의 추천과 직능대표선출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중앙선관위에서 결정한다”고 선거법을 개정했다.
 
11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한 본각 스님은 “당시 비구 스님들은 비구니 스님들까지 중앙종회의원 선거를 치르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다. 이미 10석을 배정했으니 자체적으로 뽑으라는 입장이었다. 기득권을 누리려는 비구니 운영위원회 스님들도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젊은 비구니 스님들이 반발했지만 어른 스님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1994년 10월15일 중앙선관위는 중앙 및 교구종회의원 선거와 총무원장 선거일정을 공고했다. 이에 따라 11월7일 직선직 중앙 및 교구종회의원 선거를 진행하고, 11월8일 비구니와 직능대표종회의원을 선출키로 했다. 11월21일에는 총무원장 선거를 진행해 개혁종단 첫 집행부를 구성하도록 했다.

선거일정 공고와 함께 조계종은 선거전에 돌입했다. 10월27일 중앙종회의원 후보등록을 마감한 결과 총 51명을 뽑는 직선직 종회의원에 96명이 등록해 1.88:1의 경쟁률을 보였다. 2명의 후보만 출마해 선거를 치르지 않는 교구본사는 은해사와 쌍계사, 고운사뿐이었다. 나머지 21개 교구는 3명 이상의 후보가 출마해 경선이 불가피했다. 4명을 뽑는 직할교구에 7명의 후보가 등록했고, 2명을 뽑는 범어사에도 7명이 출마했다. 용주사도 6명이 등록했고, 불국사·해인사·선운사·봉선사는 5명이 출마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11월7~8일 양일간의 선거를 통해 78명의 종회의원이 선출됐다. 문중간 갈등으로 투표를 진행하지 못한 해인사 교구는 종회의원을 선출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직할교구는 현근·종림·수완·광복 스님, 용주사는 정대·세영 스님, 신흥사는 무산·청화 스님, 월정사는 원행·부동 스님, 법주사는 각현·무상 스님, 마곡사는 덕상·장곡 스님, 수덕사는 지운·인행 스님, 직지사는 법등·정우 스님, 동화사는 선봉·성덕 스님, 은해사는 현소·향공 스님, 불국사는 성타·진현 스님, 쌍계사는 지하·영담 스님, 범어사는 영환·석호 스님, 통도사는 영배·정우 스님, 고운사는 근일·설송 스님, 금산사는 혜광·원행 스님, 백양사는 성오·지운 스님, 화엄사는 종원·진만 스님, 송광사는 지원·영조 스님, 대흥사는 보선·혜관 스님, 관음사는 종하·진아 스님, 선운사는 대원·동명 스님, 봉선사는 일면·화범 스님이 각각 선출됐다.

직능대표도 성우·법혜·명진·현봉·종광·수진·정인·법성·진관·지만·태응·송산·여연·효림·설정·정휴·장윤·성문·현진·지홍 스님이 뽑혔다. 논란이 됐던 비구니 종회의원은 일법·수현·재운·육문·법용·지훈·진성·본각·해주·흥륜 스님으로 확정됐다.

이 가운데 62명이 초선으로 전체 78명 가운데 79.5%를 차지해 종단의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중앙종회는 11월16일 제11대 개원 종회를 열어 설정 스님을 첫 종회의장으로 선출했다. 부의장 선출도 진행해 수석부의장에 일면 스님을, 차석부의장에 청화 스님을 각각 뽑았다. 11대 중앙종회구성이 마무리되면서 11월21일 총무원장 선거에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이무렵 총무원장 후보로 월주 스님과 월탄 스님이 이미 출사표를 던진 상태였다. 두 스님은 모두 1950년대 조계종 정화운동을 주도했던 금오 스님의 상좌였다. 1994년 3월30일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거부하며 종회에 불참한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월주 스님은 개혁회의출범을 주도한 세력들의 지지를 받았고, 월탄 스님은 동국대 석림동문회를 주축으로 한 그룹들의 지원을 받았다. 월주 스님은 1994년 종단개혁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적임자임을 내세웠고, 월탄 스님은 승가화합을 통한 종단안정과 정화불사의 정신을 계승해 불교중흥을 이끌겠다고 호소했다. 사형사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양 후보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경쟁이 심해질수록 상대를 겨냥한 흑색 비방이 난무했다. 종단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는 자체적으로 공명선거감시단을 출범시켰으며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석림동문회 공명선거감시단 등은 성명을 발표해 공명선거를 촉구했다.
 
11월21일 제28대 총무원장 선거는 월주 스님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이날 월주 스님은 316명의 선거인단이 참석한 가운데 168표를 획득해 146표를 얻는데 그친 월탄 스님을 제치고 28대 총무원장에 등극했다. 무효표는 2표. 이로써 월주 스님은 일반 종도들의 의사가 반영된 선거를 통해 당선된 첫 총무원장으로 기록됐다.
 
월주 스님은 11월23일 원로회의의 인준을 거쳐 25일 개혁회의 총무원장 탄성 스님과 인수인계식을 갖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월주 스님은 재임기간 개혁회의가 마련한 개혁입법을 토대로 종단개혁에 착수했다. 교육원·포교원을 별원으로 설립해 승려교육과 포교의 체계화를 다졌다. 직영사찰과 특별분담 사찰을 지정해 종단 재정확대에도 앞장섰다.
 
1980~90년대 시민사회활동에 앞장섰던 월주 스님은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제28대 총무원 집행부의 핵심과제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종단 예산 20억 원을 별도로 조성해 노동과 인권, 복지, 환경, 통일 사업을 지원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나눔의 집’을 설립했고,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해 종단의 대사회활동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월주 스님이 1998년 11월 제29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재임의사를 밝히면서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왔다. 1994년 종단개혁으로 조계종은 총무원장의 연임규정을 1회로 한정했다. 월주 스님은 1980년 총무원장에 취임했지만 신군부가 자행한 10·27법난으로 강제로 퇴임당한 전력이 있었다.

월주 스님 지지 세력은 1994년 개정된 종헌을 소급해서 적용할 수 없다며 3선 강행을 시도했다. 그러나 반대 측은 최초 종헌시행 이후 전 기간을 봐야 한다며 월주 스님의 연임도전은 3선 금지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황은 1994년 의현 총무원장이 3선 강행을 시도했을 때와 비슷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논란은 결국 분규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스님들간의 폭력사태가 발생했고, 언론을 통해 여과 없이 세간에 노출됐다. 조계종은 또 한 번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어쩌면 승단의 화합과 포용을 외면하며 추진했던 1994년 종단개혁의 후유증이 표면화된 것일 수도 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68호 / 2014년 11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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