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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어로 말 바꿔치기

기자명 함돈균

최근에 한 잡지사에 보냈던 원고의 교정지를 받았다. 글 중에 독일 국적의 서양철학자 이름을 인용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이 수정되어 있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이름을 ‘해나 아렌트’로 수정했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 사람이므로 당연히 독일식으로 읽었던 이름을 왜 영어식 발음표기로 바꾸었을까. 이런 식의 표기 원칙이라면 유명한 축구클럽 바로셀로나의 스페인 축구선수 ‘다비드 비야(David Villa)’도 ‘데이비드 빌라’라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에디터 개인의 판단에 따른 수정이었는지, 아니면 출판사 내부의 발음표기 원칙을 따른 것인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다. 어떤 경우이건 독일인의 이름을 독일식으로 읽은 것을 영어식 발음표기로 바꾸는 일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나 이 수정 과정에서 판단은 ‘자연스럽게’ 거의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수정 원칙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영어’다. 알파벳의 기원이 미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계어’로서 영어는 미국이라는 국가를 중심으로 사유되고 있고, 나아가 ‘글로벌’의 중심 자체가 미국으로 설정되어 있는 사고의 자동화 방식을 엿보게 하는 일화다.

외국어에 대한 발음표기 원칙은 국립국어원에서 표준발음을 정해 공시한다. 대체로 그것을 공식적으로 따르며 출판사의 에디터들도 그 원칙을 따른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한 유명 출판사 중에는 국립국어원의 표기원칙에 명백히 반대하여 출판사 자체의 외국어 발음표기 기준을 고수하는 곳이 있다. 예를 들어 국립국어원은 ‘파리(pari)’ ‘이탈리아(Italy)’로 공시하지만 그 출판사는 ‘빠리’ ‘이딸리아’라고 표기한다. 국립국어원과 표기 문제에 대립각을 세우는 이 출판사의 이유는 실제 발음이 후자라는 것도 있지만, 생각해 볼만한 더 중요한 문제 제기는 ‘빠리’ ‘이딸리아’를 ‘파리’ ‘이탈리아’로 읽는 국립국어원의 외국어 발음표기 원칙에 미국 영어 중심주의가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 식) 영어에는 된소리 발음이 없기 때문에 국립국어원도 그것을 무반성적으로 적용하여 현지어의 실상이 아니라 미국식으로 표기한다는 얘기다.

외국어 발음표기를 둘러싼 이러한 논란은 언어 원칙에 관한 식자들 간의 이견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 무의식 차원에까지 침투해 있는 미국 중심주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그러다가 보니 실제 한국의 고유명사를 외국식 기호로 아예 대체해 버리는 괴상한 일이 유행처럼 되어 버렸다. ‘남산타워’는 그래서 ‘N서울타워’가 되어 버린 것이다. N이라는 곳은 대체 어디에 있는 곳인가. 한류 열풍에도 불구하고 남산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들른 곳은 ‘N’이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기묘한 추상 공간이 되고 만다. 놀라운 것은 이런 일들이 정부의 적극적이고 공식적인 시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정부가 운영 주체로 있는 휴전선 부근의 한 기념관에 들렀다. 대통령과 장관의 방문 사진들과 더불어 북한 관련 정책에 대해 간명하게 소개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정책 언어가 콩글리쉬 영어명으로 되어 있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세계’라는 말보다 ‘글로벌’이라는 말이 더 선호된다. 그런데 그 ‘글로벌’조차도 실제 내용을 보면 세계의 다양한 나라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집중되어 있음을 쉽게 확인하게 된다. 문화정책부터 경제정책, 국방정책, 교육정책, 정치제도의 롤 모델은 미국이다. 그러나 실은 그 미국조차도 관념적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하나가 아니라 엄청난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선진국들은 ‘글로벌’을 다양한 시각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글로벌화 하기 위해 참된 주체성의 전략을 펼친다. 괴테와 칸트는 당시의 글로벌 언어였던 라틴어로 글을 쓰는 대신 당시까지만 해도 서구의 변방어였던 ‘독일어’로 정교하게 사유하고 창의적으로 말함으로써 독일어를 세계어로 변화시켰다.

한글날을 다시 휴일로 부활시키고, 세종대왕 동상을 세우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함돈균 husaing@naver.com

[1268호 / 2014년 11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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