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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분별의 실체

기자명 혜국 스님

“생각 일어나기 이전, 만년이든 일겁이든 다를 바 없으니”

▲ 중국 천수(天水)의 맥적산 석굴 13호굴에 나툰 삼존불. 15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은 자비롭고 인자한 상호가 미려하기 그지없다.

“종비촉연(宗非促延)이니 일념만년(一念萬年)이요, 종취(宗趣)란 시간을 초월한 자리이니 한 생각이 만년이요.”

공간이라는 말 자체는
성립될 수 없는 말

습관처럼 타성에 젖어
공간이라고 하는 것
텅빈 허공엔 틈 없어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는
분별의 말은 우리가
속고 있다는 의미일 뿐

한 생각에 삼천대천세계
모두 존재한다는게 진리

태양광명 그 자체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아침이나 저녁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광명일뿐입니다. 태양광명 그 자체를 보지 않고 그림자인 지구의 움직임을 보는 까닭에 그 그림자가 시간이 되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근본 종취에서는 광명이나 어두움 둘 다 초월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물며 생(生)과 사(死)를 하나로 보는 것도 허망한 생각이라 했으니 그러한 투철하고도 투철한 조사안목에 고개가 숙여질 뿐입니다. 영원에는 찰나와 영겁이 같은 말이요, 무변허공(無邊虛空)에는 이곳과 저 너머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참된 수행자는 일체 모든 것이 환영(幻影)임을 알고 오히려 그 환(幻)을 관(觀)하는 법으로 수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면 그 환영을 환영인줄 아는 자가 드러나게 됩니다. 환영인줄 아는 자는 환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좀 더 나아가서 성성적적(醒醒寂寂)하게 되면 그 환영인줄 아는 그 사람도 또한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당시 그 환영이 소멸하게 되는 겁니다. 성적등지(惺寂等持) 지관등지(止觀等持)인 것이지요. 이것은 교리에서 보는 점수(漸修)의 입장이고 간화선에서는 바로 돈오무념(頓悟無念)입니다. 여기에선 환(幻)과 환(幻) 아님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환영(幻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곧 무념(無念)이요, 무심(無心)이 되는 겁니다. 생각 자체가 끊어지고 생각 이전의 세계, 즉 모양도 빛깔도 없는 텅빈 진여(眞如)의 세계를 어쩔 수 없이 무심(無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취, 즉 근본진리는 시간을 초월한 자리이니 한 생각이 만년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한 생각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생각 일어나기 이전 자리에서 보면 만년이든 일겁이든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취에서 보면 너니 나니 하는 투쟁이 있을 수가 없고 좋다, 나쁘다 분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진리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누구에게나 똑 같이 갖추어 있다고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신심을 내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일체 유정무정이 모두 그러한 완전한 진리, 누구나 모두 부처라는 본래 성불도리가 인류의 보배임을 알 수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 다음은 “무재부재(無在不在)하야 시방목전(十方目前)이로다, 공간 또한 없음이라 시방세계가 바로 눈앞이로다”라고 이어집니다.

시간만 없는 게 아니라 공간(空間)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실은 공간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말인데 우리가 타성에 젖어 그냥 공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텅빈 허공에 틈이나 사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는 분별의 말은 우리가 속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한 생각에 삼천대천 세계가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일념삼천에 대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념삼천이란 한 생각에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불, 보살 등 열 가지 세계, 즉 십계(十界)가 다 들어 있다는 천태선사의 법화사상입니다. 지옥중생에게도 인간의 성품이 있을 수 있고 인간에게도 짐승과 같은 축생의 기운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하나하나의 세계, 즉 한 세계마다 십여시(十如是)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십여시란 여시상(相), 여시성(性), 여시체(體), 여시력(力), 여시작(作), 여시인(因), 여시연(緣), 여시과(果), 여시보(報), 여시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계 안에 각각 다시 십계가 갖추어 있으니 백이요, 그 백계 속에서 각각 십여시를 갖추고 있으니 천이 되는 겁니다. 그 천계가 삼세간(三世間)인 오음세간(五蘊世間)과 중생세간(衆生世間), 국토세간(國土世間)을 다 갖추고 있으니 이 셋을 곱하면 삼천이 되니 일념삼천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삼천은 숫자의 개념이 아니고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그 예로 십여시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자 모든 사람은 사람이라는 모양이 있습니다.

즉 여시상(相)이 갖추어져 있고 그 모양을 가진 사람은 각자 자기 성질인 여시성(性), 즉 성질이 있게 마련입니다. 상(相)과 성(性)이 합쳐지면 체(體)가 생겨 여시체(體)가 되고 몸체가 있으면 그에 따른 힘이 생기기에 여시력(力)이요, 힘은 작용을 일으켜서 여시작(作)이 되고 작용은 인연을 만들고 인은 연을 만나 인연이 되고 과보가 따르니 여시과(果), 여시보(報)가 이루어집니다. 이 모두가 처음과 끝이 모두 구경의 한자리가 되기 때문에 여시본말구경등이 되어 한 세계마다 십여시를 모두 갖추게 됩니다.

결국 여시(如是)하는 ‘여’(如)라는 글자 하나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여시는 무재부재(無在不在)하야 시방목전(十方目前)인 겁니다. 시간이니 공간이니 나누어지기 이전이기에 영겁이고 일념이니 시방세계가 그냥 눈앞이 되는 겁니다. 그러한 세계가 너무나 광활하고 가없는 추상적 세계처럼 느껴지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조그마한 세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묘법의 세계가 각자 우리 마음에서 활발발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시방목전의 삶이 되기를, 간절하게 원을 세워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구절은 “비고지금(非古之今)이니 삼세일념(三世一念)이로다, 예와 지금이 아니니 삼세가 다만 일념이로다”입니다.

이 구절은 누락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을 있는 것으로 보면 옛날 옛적 과거가 있고 현재와 미래가 있지만 시간 자체가 없을 때에는 예와 지금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삼세 즉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들 한 생각이라는 겁니다. 이 구절에서 시간개념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볼까 합니다. 하루살이는 하루가 일생이요, 매미는 여름 한철이 한평생이 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 우리가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원주민들은 모든 시간을 신(神)과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 불자들이 볼 때 부처님과 같이 일어나고 함께 자고 있으니 둘이 아니라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이 이 원주민들을 개종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일요일 교회에 나오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일요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니 일하지 말고 교회에 와서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인디언들이 하는 말이 “왜 일요일만 신(神)을 모시느냐? 당신네 신은 얼마나 바쁘기에 일요일에 한번만 모시느냐?”고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원주민들 스스로 생각하는 신은 일하는 그 속에 항상 존재하고 밥을 먹을 때도 항상하기 때문에 날마다 신을 같이 모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원주민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부처란 즉 진리란 우리가 걸어 다니고 앉고 눕고 자는 이 모든 삶 속에서 항상 그 부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진리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언제 어디서나 신과 같이 있는 시간이란 말이지요. 다만 그 신에 대한 개념이 다를 뿐 진리는 항상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란 바로 내 마음입니다. 고마움의 마음입니다. 최근 페루 쿠스코 서북방에 있는 ‘우르밤바’에서 하루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선 아주 특이한 풍습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지붕 위에 흙으로 구운 조그마한 황소 두 마리를 마주보게 한 형상을 용마루에 올려놓은 것을 보았지요. 집집마다 똑같이 그런 형상이 있기에 이상하다 싶어 현지 전문가에게 물었습니다. 한집, 두집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집의 지붕에 조그마한 황소를 마주보게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이유인즉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 페루를 침략해서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든 뒤 황소도 같이 들여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 원주민들이 그 황소를 이용하여 일을 해보니 사람들보다 몇 배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소의 고기까지 인간들이 먹을 수 있게 되니 고마운 마음이 간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신은 고마움의 신이기 때문에 황소를 신으로 생각하고 지붕 위 용마루 중앙에 모셔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선교사들 입장에서는 영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찾아가서 “여보시오. 왜 십자가를 모시지 않고 황소를 모셨느냐?”고 하니 페루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 우리들의 신(神)은 고마움이요, 고마움이 극에 이르는 것을 신이라고 합니다. 당신들의 십자가가 그렇게 도움을 주고 고맙다면 십자가도 모시지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소 사이에 십자가를 같이 모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 마주보는 황소사이에는 조그마한 십자가도 세운 것이지요.

페루 사람들이 생각한 신은 고마움의 신입니다. 그 일심에는 너의 신, 나의 신이 따로 없습니다. 네 종교, 내 종교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하기에 “일체(一切) 유정무정(有情無情)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고 하신 겁니다. 신이란 즉 부처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고마움의 대상, 언제 어느 날 그 어디에서든지 나와 함께하는 내면의 청정입니다.

그러니 과거와 지금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바로 지금 한 생각인 것이지요. “그 한 생각 일으킬 줄 아는 참나, 참나는 누구인가?”, 한 생각 일으킬 줄 아는 그 자리는 내안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내 밖에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온 우주 법계가 오직 이것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신이라고 하든, 부처라고 하든, 마음이라고 하든 그건 이름일뿐 이름 붙을 수 없는 참으로 청정한 진공묘유입니다.

일체가 연기공성(緣起空性)입니다. 이러한 천하보배, 우리는 그것일 뿐입니다. 부디 진리를 깨닫는 길로 부지런히 한번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1269호 / 2014년 11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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