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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티벳에서의 7년’

기자명 정장진

서슬 퍼런 자본주의 약탈 사슬에 갇힌 중생심을 그리다

▲ 현재까지도 티베트는 중국 통치 아래 놓여 신음하고 있다. ‘티벳에서의 7년’은 정치적·문명사적 메시지 모두를 담았다.

얼마 전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다. 가톨릭신자들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환영했고 길지 않은 방문기간 동안 보여준 행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기도 했다. 특히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정치·역사에 짓눌린 현실 담아
히말라야 풍경 속 살풍경 존재
영국·중국에 침략당한 티베트

영화관 공사 중 나온 지렁이
다른 곳에 묻어주고 기도
티베트인들 생명관 표현

중국 티베트 강제 점령은
서양 제국주의 행태와 유사

가톨릭이 한국에 들어온 지 꽤 되었다. 하지만 신도수로는 개신교가 압도적이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는 사실 서양의 개신교와 동일시할 수 없다. 16세기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을 거치며 완성된 개신교를 받아들였을 뿐, 종교개혁을 통해 스스로 가톨릭을 극복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인해 대형교회와 교회세습 문제들 같은 가톨릭이 저질렀던 지난날 폐해들이 한국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의 경우를 들 수도 있다. 즉, 서양인들은 동양의 불교나 유교를 어떻게 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아직은 한국 개신교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불교도 서양에 많이 포교 되어 철학적으로나 신도 측면에서 서양에 무시할 수 없는 세를 확보해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서양인들은 책이나 문학 작품들을 통해 불교를 접하는 기회가 많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이국적인 동양문물 접하듯이 대했던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하지만 서구인들의 불교관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영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자체의 문화적, 대중적 파급력은 그래서 불자들도 눈여겨 보아야 할 요소임에 틀림없다.

만주국 패망을 다룬 ‘마지막 황제’의 베르톨루치가 감독한 ‘리틀 부다’ 등이 대표적인 영화일 것이다. 배우 리처드 기어는 티베트 불교에 심취한 불교도이기도 하다. 불교가 일화 정도로만 소개되었지만 그래도 최근에 나온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도 굳이 들라면 서양 사람들의 불교관을 보여주는 영화에 속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근자에 들어 ‘달마야 놀자’류의 가벼운 불교 영화들이 유행을 타고 있다. 조금 다른 영화이긴 하지만 조폭이 신내림을 받았다는 스토리에 기대고 있는 명배우 박신양의 신들린 연기를 볼 수 있는 ‘박수무당’도 영화 자체로서 보다는 전통 종교의 현대적 변형이라는 관점에서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서양 감독이 제작한 불교 영화로서는 매력만점의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티벳에서의 7년’이 손꼽을 만하다. 영화의 한계와 함께 영화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문명사적 메시지 모두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를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서양 사람들이 제작한 불교 영화라고 해서 핵심을 놓쳤다거나 관광·홍보영화 정도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도 불교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 공연한 겸손이 아니다. 정말 모르겠다. 대자대비한 부처님이 계시다는데 세상이 왜 이리 시끄럽고 죄 없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이 죽어나가야 하는지…. 이 질문을 부처님에게만 할 수는 없지만, 또 질문 자체가 유치하지만, 그래도 문득문득 이 철없는 의문이 찾아오는 것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

필자는 법보신문에 연재 중인 김규보 기자의 ‘바람의 고원, 티베트를 가다’를 즐겨 읽는다. 김 기자는 거의 매번 부처님이 아니라 티베트의 광활한 자연 앞에서 감동을 받고 깨달음을 얻는 문장으로 기사를 시작하곤 한다. “얌드로쵸를 지나 설산을 배경으로 뻗어있는 협곡을 가로지른다. 높은 산과 낮은 하늘 사이에 걸쳐있는 도로가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며 끝없이 이어진다. 저 멀리 하얀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더니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진다.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주변에는 뜻밖의 적막만이 가득하다.” 유려한 명문이다. 그래서인지 티베트의 풍경이 눈앞에 선하다.

누군들 히말라야 산맥이 자리 잡고 있는 티베트를 오르며 대자연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경외감의 마지막 자락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신비하고 무섭기도 한 자연을 느끼지 않겠는가.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에서도 불교 못지않게 우선 “설산을 배경으로 뻗어있는 협곡”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주변의 적막”이 관객들을 압도해 온다. 화내고 욕심낼 일도 없다. 싸울 일도 없다. 그런데 아니지 않는가.

다시 한 번 김규보 기자의 기사를 읽어보자, 사진에 붙인 해설을 보니, “1904년, 간체의 난공불락 요새 간체종에 영국군이 들이닥치자 티베트인들은 가파른 절벽 아래로 스스로 몸을 내던졌다”고 적혀있다. 어찌 된 일인가. 티베트도 이런 뼈아픈 역사를 거친 것이다. 영화 ‘티벳에서의 7년’에서는 영국군에 이어 중공군이 쳐들어와 국가 전체를 집어삼키는 쓰라린 역사가 고스란히 나온다. 이 이야기가 그대로 영화 줄거리이기도 하다.

 
▲ 중공군은 자신들을 환영하고자 만든 만다라를 군홧발로 짓밟는다.

따라서 우리는 히말라야와 티베트 대자연이 자아내는 풍경의 장엄함에 도취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사악한 손길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풍경, 즉 살풍경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티베트 스님들이 몇 달 며칠 밤을 새며 공들여 만들어낸 만다라를 중공군 장성들이 무참히 군화로 밝고 지나간다. 상징적인 이 장면은 티베트를 유린하고 자원을 차지하려는 중공군의 실상을 가장 함축해서 보여준다. 만다라는 완성된 후 즉시 무너뜨리면서 일체 무상을 깨닫게 하는 세상에 둘도 없는 놀라운 수행이자 예술이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이 만다라를, 그것도 자신들을 환영하기 위해 준비 중인 만다라를 중공군의 군화가 짓밟고 간 것이다.

영국군 다음에 중공군이었다. 제국주의를 그토록 증오하던 공산당이건만 모두 거짓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 쓰라린 티베트의 역사는 진행 중이다. 어찌 해야 하나. 맞서서 총을 들고 싸워야 하나, 아니면, “가파른 절벽 아래로 스스로 몸을 내던져야 하나.” 이도 저도 아니라면, 장엄한 풍경 앞에서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어야 하나….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영화 속 주인공인 오스트리아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처럼 7년이 아니라 100년을 머물러 있어도 사바의 이 잔인무도한 전쟁의 역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환생과 이 신앙을 근본으로 하는 정교일체 이데올로기에 의혹을 보낸다고 해도, 티베트인들에게는 자기 땅에서 살 권리가 있을 것이다. 인디언들의 땅을 차지한 미국인들, 호주 원주민들 땅을 독차지하고 백호주의를 부르짖는 호주인들, 사실 모두 해가 지지 않는다는 그 잘난 대영제국 후손인 영국인들이었다. 이들은 작은 땅이 아니라 대륙을 한 덩어리씩 차지하고 있다. 지나간 역사라고? 아니다. 그 너른 땅을 나눠 갖자고, 원주인들에게 돌려주라고 주장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석유가 나오고 천연가스와 우라늄이 나오고 희토류가 나오니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아멘.

어처구니없는 순진한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가식적인 “아멘” 소리는 더 이상 하지 말라. 그 많은 성당과 교회를 세웠건만 티베트를 집어삼키고 인디언들을 떼로 죽이고, 이건 기독교가 아니다. 사탄교에 가깝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일본인들의 731부대, 난징 대학살 운운하면서 티베트를 점령하는 자가당착 논리는 대체 무엇인가? 하인리히 하러가 7년이 아니라 100년을 살아 100년 묵은 여우가 되어도 서구 자본주의의 서슬 퍼런 침략과 약탈 사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티벳에서의 7년’이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달라이라마가 사는 궁에 영화관을 신축하기로 한다. 공사를 하다가 지렁이들이 나오자 스님들이기도 한 티베트 인부들은 지렁이를 정성스럽게 모아 다른 곳에다 묻어준다. 물도 뿌리고 기도도 한다. 하인리히는 이 장면을 보다가 실소를 짓고 만다. 조금 우스운 장면이긴 하다. 또 지렁이를 다른 곳에 묻어주는 스님들도 그 깊은 뜻을 다 알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지렁이는 전생의 어머니”라는 티베트 스님들 말은 전후맥락이 생략된 말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지렁이 에피소드는 서구인들이 동양을 묘사할 때 늘 등장하는 전형적인 에피소드들 중 하나다.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지렁이를 밟아 죽이지 않는 그 심성은 인간도 죽이지 않는 심성임에 틀림없다. 서양인들은 티베트에서 7년이 아니라 100년을 살아도 이 생명에 대한 근원적 경외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들인 우리라고 하인리히 하러보다 나은 인간들일까?

다른 종교도 그렇겠지만, 불교 역시 영화로 제작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직설화법으로는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도 그렇고 관광홍보 영상보다 조금 나은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도 마찬가지다. 대 감독들도 거의 실패했다. 오히려 조폭 불교 영화인 ‘달마야 놀자’가 훨씬 낫다. 왜 불교는 영화화하기가 어려울까? 그래픽이나 특수효과를 도입하면 자칫 불교 영화는 SF가 되어버리고 만다. ‘티벳에서의 7년’이 칭찬받을 만한 것은 그래픽이나 눈속임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대자연 앞에 인간을 놓고 불교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그 이상으로는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했다. 주인공 하러가 어린 달라이라마를 아들처럼 사랑했고 그의 곁에서 환생의 위엄을 느꼈다고 해도, 그래서 다시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얼굴도 모르는 친아들을 만나 함께 산에 오르는 장면으로 영화가 막을 내려도 이 영화는 불교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역사와 정치에 짓눌린 불교를 보여줄 뿐이다.

역설적이지만 영화로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이 지점에서 불교가 시작될 것이다. 풍경도 끝나고, 서사도 끝나는 부분, 풍경이 인간들에게 아무런 깨달음도 주지 못하는 바로 그 부분, 역사도 서사도 종지부를 찍을 수 없는 그 부분에서 불법의 화엄이 피어날 것이다. 정치도 영화도 불교를 가지고 장사를 하려고 하면 실패한다. 티베트의 자연을 배경으로 서구인 자신의 탐욕을 반성해도 그것은 인간과 역사의 본성을 드러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불교 영화는 불가능하다. 화두를 던져볼 뿐이다. 불교 영화는 이 화두를 던지는 솜씨 여하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그래서 ‘달마야 놀자’가 차라리, 훌륭한 불교 영화인 것이다. 같은 이유로 ‘포레스트 검프’가 오히려 기독교 영화인 것이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69호 / 2014년 11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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