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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시장거리 유씨 할머니

기자명 성재헌

튀김 노파, 거지떼 장타령서 참사람 보다

▲ 일러스트=이승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이들의 모임을 승가(僧伽)라 한다. 승가가 다른 공동체와 구별되는 큰 특징 중 하나는 ‘평등’이다. 부처님 가르침 앞에서는, 진리 앞에서는, 진실 앞에서는, 기존 사회에서 질서라는 이름으로 부여하고 또 점유하였던 권위와 지위가 인정되지 않았다. 왕과 신하도, 주인과 일꾼도, 부자와 가난뱅이도, 귀족과 노예도, 남자와 여자도, 어른과 아이도 없다. 진리의 길 앞에서 그런 차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출가자와 재가자, 스승과 제자의 구분도 상황에 따른 일시적 호칭일 뿐, 항상 스승인 자도 항상 제자인 자도 없다.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훌륭한 덕목들을 서로에게 보여주고, 서로 권장하는 ‘좋은 친구[善友]’와 ‘길동무[道伴]’가 있을 뿐이다.

송나라 때 일이다. 금릉(金陵)의 시장거리에서 유자(油餈)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유(兪)씨 할머니가 있었다. ‘유자(油餈)’가 무엇인지는 정확치 않다. 혹자는 이를 인절미라 하고, 혹자는 깻묵이라 하였다. 필자 생각엔 펄펄 끓는 기름에 찹쌀 등의 곡류를 튀겨 만든 음식이 아닐까 싶다. 해서, 튀김장수 유씨 할머니라고 해두자.

튀김장수 유씨 할머니는 허리가 굽은 영감과 둘이서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부산한 장거리 노점상으로 빠듯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낭야산(琅邪山)에서 법회가 있는 날이면 빠지는 법이 없었다. 당시 낭야산에는 백운 수단(白雲守端)의 법을 이은 영기(永起)선사가 주석하고 계셨다. 어느 날, 영기선사가 법상에 올라 설하셨다.

“임제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붉은 살덩이 위에 자리 없는 참사람[無位眞人] 하나가 있어서 그대들 모두의 얼굴로 항상 드나든다. 아직 확증을 잡지 못한 사람은 살펴보라.’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불법은 얻고 잃는 것이 아니며, 쌓고 모아서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리 없는 참사람을 당장 알아보면 그만입니다. 그렇지 않고 범부와 성인을 논하고, 득실과 성패를 논한다면 그에게 불법은 고단한 밤 잠꼬대에 불과합니다.”

대중 꽁무니에 끼여 법문을 듣던 튀김장수 유씨 할머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 높아지는 법도 없고 낮아지는 법도 없고, 부자가 되고 가난뱅이가 되는 법도 없고, 슬픔도 눈물도 없고, 늙고 죽는 일마저 없는 한 사람이 항상 여기에 있다니,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자리 없는 참사람이라니, 그게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이지?”

집에 돌아와서도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반죽을 하면서도, 찬바람 부는 어두운 거리에서 남편이 끄는 수레를 밀면서도, 뜨거운 기름의 온도에 맞춰 찹쌀을 노릇노릇 구워내면서도, 하나만 더 달라고 보채는 성가신 흥정에도 그 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왁자지껄한 소란과 함께 한 무리의 거지 떼가 장거리로 들어섰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의 넉살좋은 타령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우리나라 장타령은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로 시작하는데, 당시 중국의 장타령이었던 연화락(蓮華樂)은 이렇게 시작된다.

“편지 전하러온 유의(柳毅)도 아니신데/ 뭔 일로 이 먼 동정호까지 오셨을까~”

유의(柳毅)는 패가망신한 이들의 우상으로 그려진 전설 속 인물이다. 당나라 때, 과거에 낙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유의가 있었다. 재산도 없고, 기술도 없이 나이만 먹은 후줄근한 선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터벅터벅 고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일 뿐이었다. 그러다 상수(湘水) 가에서 울고 있던 한 여인을 만난다. 그 주제에 오지랖은 넓어 여인의 사정을 물었다. 시댁에서 버림받은 가여운 여인이 친정집에 편지 한 장만 전해 달란다. 제 앞가림은 못하면서 오지랖만 넓었던 유의는 발길을 돌려 여인의 친정이 있다는 동정호(洞庭湖)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여인이 동정호 용왕의 딸이었다. 그래서 유의는 운 좋게 용왕의 사위가 되어 호가호식하며 한평생 잘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타향을 떠도는 이들의 넉살좋은 푸념을 들으면 다들 웃음이 터지기 마련이다. 헌데 유씨 할머니는 달랐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리 없는 참사람이라니, 그게 뭘까?’ 하던 의문이 한순간 눈 녹듯 풀린 것이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유씨 할머니는 거리로 달려가 거지 떼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만들어놓은 튀김을 소반 채로 내놓았다.

“천천히 먹어라. 체할라.”

등을 다독이는 모습이 영락없는 고향집 어머니였다. 남편이 곁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지켜보다 결국 화를 냈다. “당신 미쳤소!”

그러자 할머니가 깔깔대고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화난 남편의 소매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당신은 몰라요.”

올 때 그랬듯, 한바탕 소란을 떨고 거지 떼들이 사라지자 할머니는 앞치마를 풀고 곧장 낭야산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방장스님 뵙길 청했다. 노파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영기(永起)선사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영기선사가 주장자를 세우고 눈을 부릅떴다.

“자리 없는 참사람이 대체 뭐요?”

튀김장수 유씨 할머니가 조용히 웃으며 말하였다. “자리 없는 참사람 하나가/ 머리 셋 팔 여섯인 나타(哪吒)처럼 성질을 부리네./ 한 방에 화산을 때려 부셔 두 토막을 내도/ 만년세월 흐르는 강물은 봄인 줄도 모르지요.”

주장자를 던진 영기선사가 환하게 웃으며 노파의 손을 끌었다.

“이리 앉으세요. 차나 한잔 합시다.”

이때부터 낭야산 일대 수행자들에게 노파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영기선사 역시 “자리 없는 참사람이 뭐냐?”고 묻는 이가 있으면, 한바탕 크게 웃고 튀김장수 유씨 할머니를 찾아가보라 권하였다. 유씨 할머니를 찾는 수행자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스님들이 찾아오면 유씨 할머니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대뜸 소리쳤다.

“아이고, 우리 아들 왔네.”

난데없는 하대에다 자식취급에 놀라 대부분의 스님들은 어리둥절해 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냉큼 사립문을 닫고 돌아서버렸다. 소문을 듣고 불등 순(佛燈珣)선사가 감정을 해보겠다며 나섰다.

“아이고, 우리 아들 왔네.”

늘 그랬듯 할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불등 순선사가 불쑥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몸을 돌려 기둥에다 공손히 절하였다.

“뭐 대단한 거나 있나 했네.”

순선사가 피식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할머니가 뒤따라가며 소리쳤다.

“얘야, 너 주려고 이걸 아껴놨단다.”

하지만 순선사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 뒷모습에 튀김장수 유씨 할머니가 공손히 합장하였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1269호 / 2014년 11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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