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보조지눌이 원묘요세에게
18. 보조지눌이 원묘요세에게
  • 이재형 기자
  • 승인 2014.11.2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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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가지런히 하여 감로장 쏟지 말아야 할지니”

천태학 일가 이룬 젊은 요세
지눌로부터 은근한 참여 권유

불교 세속화 우려 깊이 공감
결사 참여해 돕겠다고 다짐
2년간 팔공산 등에서 함께 결사

정토사상·교화 대상 두고는 이견
요세는 만덕산서 백련결사 개창
양측 제자들 후대까지 계속 교류


“파도가 어지러우면 달이 드러나기 어렵고, 방(室)이 깊어야 등불 더욱 빛나리. 권하노니 그대여 마음그릇을 가지런히 하오, 감로장(甘露獎)을 기울여 쏟지 말아야 하느니.”

1198년 봄, 개경 고봉사(高峯寺) 법회에 참석한 원묘요세(圓妙了世, 1163~1245)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불법이 강설되는 자리였건만 온통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지혜와 복덕을 갖춰 중생을 구제해야겠다는 열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들 그저 명리와 이익을 얻기 위해 법회에 온 것 같았다. 요세는 그들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불법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그의 말은 물 흐르듯 거침이 없었고,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정도로 치밀했다. 36살 요세의 이름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1170년 무신들의 쿠데타 이후 고려사회는 극심한 혼돈으로 치달았다. 중앙에 대한 지방의 대항과 상층사회에 대한 하층민의 봉기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요세는 불교계에도 평지풍파가 일고 있음을 잘 알았다. 거대 교단 소속의 승려들은 무신정권에 맞서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그들은 죽비 대신 칼을 움켜쥐고 무신집권자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1174년에는 홍화사(弘化寺) 승려 2000여명이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고 쳐들어갔다가 도리어 100여명이 살해됐다. 그럼에도 불교계와 무신정권과의 살육전은 그치지 않았다. 훗날 요세가 강진 만덕산에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개창한 다음해인 1217년에도 개경 사찰의 승려들이 최충헌의 경제적 침해에 대항해 그를 죽이려 쳐들어갔다가 가병(家兵)들에게 800여명이 참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찰에서 더 이상 자비와 평화로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성스러워야 할 도량에 온갖 무기가 넘쳐나고 승려들은 군사훈련에 매달렸다. 사찰은 싸움을 위한 전초기지로 전락해갔다. 설상가상으로 불교계 내부의 알력과 다툼도 심했다. 선종과 교종은 마치 원수 대하듯 서로를 노골적으로 비방했다. 불교계를 향한 개탄의 목소리도 높아져갔다.

개경 고봉사를 떠나온 요세는 10여명의 도반들과 명찰을 찾아다니며 부처님께 참회의 절을 올렸다. 아무리 세상이 혼탁하더라도 출가자의 지향점은 불법의 요체를 깨달아 실천하는데 있었다. 그해 가을 요세가 영동산(靈洞山) 장연사(長淵寺)에 머무를 때였다. 주변에서 요세에게 천태문헌을 강의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갓 출가한 젊은 승려들이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출가자 본연의 길을 걷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요세는 신번현(新繁縣, 경남 의령) 출신이었다. 1163년 10월, 토착 세력가였던 서씨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2살에 천태종 사찰로 출가해 줄곧 천태의 교관(敎觀)을 닦아왔다. 23살 때 승과에 합격한 요세는 더욱 부지런히 정진했고 36살에는 이미 불경에 대한 안목이 원숙해져 있었다.

요세가 5살 많은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은 장연사에서 법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지눌은 게송으로 요세에게 선수행 할 것을 은근히 권유하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선을 닦아야 내면의 불성을 드러낼 수 있으니 정혜결사(定慧結社)에 참여해 함께 정진하자는 요청이었다.

요세는 지눌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불교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지눌은 유명했다. 8년(1190) 전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마음이 어두워 중생된 자 마음을 깨달아 부처를 이루라”는 구절로 유명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쓴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무릇 부처님과 조사님네의 말씀을 보고 듣고 외고 익히는 사람은 불법 만나기 어려움을 깨달아, 지혜로써 가만히 이치를 비추어보아 그 말씀대로 수행하면 그것은 스스로 부처의 마음을 닦고 부처의 도를 이루어 부처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정혜결사문’에는 어떠한 권위주의나 고정된 틀을 싫어하는 지눌의 성품이 선명히 드러났다. 경전과 조사의 어록을 종횡무진 인용하고 있는 해박함, 뜨거운 구도자의 열정과 날카로운 시대의식, 기필코 뜻을 이루겠다는 굳은 개혁의지가 유감없이 나타나 있었다. 지눌은 불교수행의 핵심이 지혜와 선정을 두루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에 있다고 천명했다.

요세는 지눌의 말이 아니더라도 교와 선이 새의 두 날개처럼 늘 함께 해야 한다고 여겨왔다. 천태종을 일으킨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도 맹목적인 수행만을 일삼는 선사를 암증선사(暗證禪師)라고 비판했고, 문자와 어구에만 집착하는 교학자를 문자법사(文字法師)라고 꾸짖었다. 천태종 승려로서 교와 관을 함께 추구했던 요세는 지눌의 주장이 백번 천번 옳다고 보았다. 불교계 행태에 대한 지눌의 신랄한 비판도 요세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우리네 일과를 돌이켜보면 어떤가? 불법을 핑계 삼아 우리들을 장식하고, 이익의 길로 치달리며, 풍진의 세상에 빠져 들어가 도는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했다 하나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아아 삼계를 떠나려 하면서도 속세를 벗어나려는 수행이 없다. 위로는 도를 넓히는데 어긋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중간으로는 4가지 은혜를 저버렸으니 진실로 부끄럽구나.”

요세가 지눌의 견해를 모두 수긍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지눌은 여느 사람들의 비판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우리’부터 바뀌겠다는 가장 근원적이며 능동적인 방법으로 결사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고승인 보조국사 지눌과 원묘국사 요세가 만나 결사를 함께 했던 팔공산 거조사.

요세는 곧바로 행장을 꾸려 그가 있다는 팔공산 거조사(居祖寺)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그곳에서 지눌과 요세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결사를 이끈 두 주역이 얼굴을 마주한 것이다. 도량에는 선문(禪門)이나 교종(敎宗)의 승려는 물론 유교나 도교 사람들도 있었다. 탐욕이 꿈틀거리는 세상을 벗어나 그들은 함께 경전을 읽고 선정을 닦았으며, 울력을 하고 예불도 드리고 있었다. 지눌은 요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좋은 도반들을 찾고 있던 지눌에게 요세의 동참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

요세는 결사에 동참한 지 오래지 않아 지눌이 대단한 인물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소를 치는 사람’이란 뜻을 지닌 목우자(牧牛子)라 불렀다. 고삐 풀린 거친 소를 길들이듯 지눌은 요동치는 내면을 다잡으려 쉼 없이 정진했다.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계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선수행자였으며, 탁월한 결사의 지도자였다.

지눌은 1158년 동주(洞州, 황해도 서흥)의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지식인으로 국자감에서 일하고 있었다. 지눌이 어릴 때부터 병이 잦자 아버지는 병이 나으면 아이를 출가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마침내 병이 쾌유되자 부친은 8살의 지눌을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으로 출가시켰다. 17살에 비구계를 받은 지눌은 문중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았다.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고 오직 진리만을 따르고자 했다. 지눌은 전국의 유서 깊은 사찰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에서 승려들이 정치싸움에 휘말려 출가자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는 일들을 숱하게 보았다. 지눌은 모순에 찬 불교계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출가정신으로 돌아가 수행에 매진하자는 혁신운동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결사(結社)였다.

결사는 같은 사상과 뜻을 지닌 대중이 모여서 주변의 병폐에 물들지 않고 자신들의 이상을 역사 속에 관철하려는 신앙운동이다. 동진시대 여산혜원의 백련결사를 첫 시작으로 각 지역에서 일어난 많은 결사들은 불교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지눌은 문란한 교단과 승풍을 혁신하고 불법을 중흥시키기 위해서는 이제 결사운동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지눌이 자신의 뜻을 처음 밝힌 것은 1182년 1월 개경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에서였다. 그는 뜻 맞는 길벗들 10여명에게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속에 살며 선정과 지혜를 닦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처럼 법이 쇠퇴한 시대에는 염불수행으로 정토의 업을 닦는 것이 낫다는 반론도 있었다. 지눌은 “시대는 비록 변천하지만 심성은 변하지 않는다”며 차근차근 설득해 나갔다. 정토신행의 폐단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염불과 간경, 온갖 착한 행실을 닦는 것은 모두 사문의 지녀야할 떳떳한 법이니 어찌 해롭겠는가? 허나 그 근본을 깊이 찾지 않고 형상에 집착해 밖으로 찾으면 지혜 있는 사람의 비웃음을 살 것이다. 말법이나 정법시대의 다름을 말하지 말고 다만 각자 분수에 따라 수행하여 바른 법의 인연을 맺을 뿐이요, 비겁하거나 나약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지눌은 극락정토가 사바세계에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야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빛을 밝히는 순간 우리의 마음이 바로 부처님 세계라는 유심정토를 역설했다. 지눌은 또 ‘정토를 구하지 않고 이 예토에 머물러 있으면 온갖 고난을 만나 타락할까 두렵다’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비원(悲願)이 많은 사람은 이 세계에서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저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해 자비와 지혜를 더욱 늘리어 큰 보리(菩提)를 구한다. 그리하여 태어나 (지금 살아가는) 세상에서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기로 원을 삼는다. 그는 따로 정토를 구하지 않더라도 어려움을 만나 타락할 걱정이 없다.”

그들은 지눌의 안목과 열정에 감동하고 결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정혜결사는 오랜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 정혜결사를 이끈 보조국사 지눌.
지눌은 그해 승과(僧科)에 합격했지만 홀로 입산수도의 길에 올랐다. 8살 때 첫 출가가 아버지에 이끌려 했던 것이라면, 25살의 재출가는 세속에 물든 승가에 대한 단호한 거부였다. 지눌은 개경을 뒤로 하고 남쪽으로 향했다. 창평(昌平, 전남 담양) 청원사(淸源寺)에 머물던 그는 우연히 혜능의 ‘육조단경’을 읽게 됐다. 그때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니 육근이 비록 견문각지(見聞覺知)하더라도 만상(萬像)에 물들지 않아 진여의 성품은 항상 자유롭다’는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여자성이 보고 듣는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만나고 확인된다는 깨달음이었다.

지눌은 본격적으로 경전을 살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선이 정말 불교가 맞는다면 선의 진리도 반드시 경전 속에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1185년 28살의 지눌은 많은 경전과 논서들을 갖추고 있는 하가산(下柯山, 경북 예천) 보문사(普門寺)로 향했다. 그곳에서 지눌은 방대한 경전과 논서들을 하나하나 훑어나갔다. 그렇게 책 속에 묻혀 지낸지 3년째 되던 해였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의 한 구절이 번갯불처럼 다가왔다.

‘한 티끌 가운데 대천경권(大千經卷)이 포함돼 있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지만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지눌은 부처님의 말씀인 교(敎)에도 마음이 곧 부처라는 ‘심즉불(心卽佛)’의 진리가 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지눌은 너무나 감격스러워 경전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것은 그에게 단순한 문자적 확인이 아니었다. 오랜 번민과 고투 끝에 얻은 값진 깨달음의 체험이었다. 얼마 후 지눌이 다시 당나라 이통현(635~730) 장자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을 읽을 때 ‘범부가 십신(十信)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자신이 범부라는 것만 인정하고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동지(不動智)의 부처님을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에서 또 다시 무릎을 쳤다.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이 교(敎)요, 조사가 마음에 전한 것은 선(禪)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은 필연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각기 제가 익힌 데에만 안주해, 망령되이 논쟁함으로써 헛되이 세월을 보내겠는가?”

화엄은 지눌에게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이 서로 위배되지 않는 근원적인 사실을 터득시켜 주었다.

지눌이 오랜 도반 득재(得才)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옛날 약속했던 정혜결사를 실행하자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1188년, 31살의 지눌은 팔공산 거조사로 향했다. 지눌은 그곳에서 결사의 깃발을 올렸고, 옛 도반들에게 장문의 초청장을 보냈다. ‘정혜결사문’이 바로 그것으로 고려불교계를 향한 젊은 선지식의 사자후이자 숭고한 불교의 이상을 담은 불후의 선언문이었다.

3~4명의 도반들이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옴에 따라 곧바로 결사가 시작됐다. 2년 뒤에는 다시 ‘정혜결사문’을 반포해 뜻 있는 사람들의 동참을 촉구했다. 그렇게 거조사에서는 사치와 명리에 찌든 고려불교계를 일신할 법등이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몇 년 뒤 정혜결사는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거조사 규모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들이 모여들었다. 지눌은 새로운 도량을 물색했고 송광산 길상사로 눈길을 돌리게 됐다. 1197년 그곳의 확장공사가 진행되면서 결사는 당분간 개별적으로 진행됐다. 다음해 지눌은 거조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에 다시 은거했다.

요세가 정혜결사에 합류한 것도 지눌이 거조사를 떠나기 전이었다. 결사의 취지에 깊이 공감했던 그는 누구보다 부지런히 선을 닦아나갔다. 밤에는 등불을 켜지 않았으며 잠잘 때에도 깔자리조차 없었다.

요세는 지눌과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대부분 의기투합했지만 간혹 의견이 어긋날 때가 있었다. 정토가 주제가 될 때면 더욱 그랬다. 요세의 입장에서는 지눌이 내세운 정혜는 특출난 근기를 소유한 사람에게나 가능할 것 같았다. 아무리 돈오점수라지만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선과 교는 요원한 수행이었다. 그러면 무시억겁(無始億劫)의 생사윤회에서 허덕이는 나약한 중생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의 내부에서는 무력한 범부도 실천이 가능한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커져갔다. 동시에 교와 관은 물론 염불사상까지 품고 있는 천태사상이 더욱 크게 와 닿았다.

그 무렵 지눌에게는 또 한 번의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생사를 걸고 참선수행을 하며 틈틈이 선어록을 읽던 지눌은 송나라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 어록과 마주했다. 그 때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으며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고 일상사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으며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는 구절에서 지눌은 활연히 깨달았다. 오랜 세월 ‘가슴에 걸려 있던’ 그 무엇이 말끔히 씻겨나갔음을 알았다. 어쩌면 원수처럼 그를 괴롭히던 알음알이(知解)의 병이 떨어져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와 개념을 매개로 하지 않은 불법의 세계. 이제 그는 더 이상 선을 연마하는 납자가 아니라 선을 증득한 선사였다. 지눌에게 선은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 자체로 전환된 것이다.

2년 뒤인 1200년 지눌과 요세는 상무주암을 떠나 도량정비가 끝난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로 향했다. 그러나 요세에게도 기이한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원 귀정사(歸正寺) 주지 현각(玄恪)의 꿈에 어떤 이가 나타나 “내일이면 삼생(三生)에 ‘법화경’을 지녔던 스님이 오실 것이니 깨끗이 도량을 청소하고 맞아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현각은 꿈에서 시킨 대로 뜨락을 쓸고 음식을 장만해 기다렸다. 그리고 어스름 해가 질 즈음 요세가 도착했다. 그는 요세에게 꿈 얘기를 들려준 뒤 천태 문헌 한 권을 강의해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다. 천태종 17대 조사로 염불결사를 이끌었던 사명지례(四明知禮, 960~1028)의 ‘묘종초(妙宗鈔)’였다. 천태지의를 친견하는 꿈을 여러 차례 꿨던 요세도 선뜻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요세는 수선사로 가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1208년 영암 월출산 약사난야(藥師蘭若)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수행관을 조계선에서 천태교관으로 완전히 전환했다. 지눌이 기존 교단의 권위와 관습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요세는 지눌의 이론과 수행체계에 의지하지 않는 독자적인 길을 선택한 것이다.

요세는 선정을 닦는 틈틈이 ‘법화경’ 1독, 준제진언 1천 번, 나무아미타불 1만 번을 소리 내 외웠다. 동시에 그는 맹렬하게 참회했다. ‘참(懺)은 이미 지은 악을 털어놓는 것이고, 회(悔)는 지난 일을 고쳐 미래를 닦는다’는 천태지의의 말처럼 요세는 참회하지 않으면 무량겁 동안 지은 죄업으로 인해 수행이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날마다 53불(佛)을 12번이나 돌며 부처님 한분 한분께 절을 올렸다.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요세는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세속 성을 붙여 ‘서참회(徐懺悔)’로 부르기 시작했다. 요세는 근기가 낮은 범부들과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겠다는 발원을 잊지 않았다.

그 무렵 10여년 간 조계산 수선사에서 결사대중들을 이끌던 지눌의 생애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정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눌은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후학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모습은 마치 자식을 대하는 자상한 어머니 같았으며, 남의 칭찬이나 비방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지눌은 그동안 촌각을 아껴가며 ‘계초심학인문’ ‘수심결’ ‘화엄론절요’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등 숱한 책들을 집필했다. 정혜결사와 간화선의 이론적 체계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신념과 열정을 과로에 지친 육체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210년 3월27일, 53살의 지눌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다가 법상(法床)에 앉아 열반에 들었다. 호랑이 눈처럼 날카로운 통찰력과 소걸음처럼 성실함을 갖췄던[牛行虎視] 위대한 인물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지눌이 떠나고 몇 해 뒤, 요세가 50살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탐진현(耽津縣, 전남 강진)의 유력자인 최표, 최홍, 이인천 등이 요세를 찾아와 만덕산에사 법을 펼쳐줄 것을 간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요세는 만덕산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마침내 백련결사를 개창했다. 1216년 요세가 54살 되던 해였다. 그는 백련결사문에서 궁극적 목표가 정토왕생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부처님 당시 무리들도 구원(久遠)한 수명에 대해 말씀을 듣지 못했거늘 우리들은 이 마지막 500세에 태어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근본 경지의 수명을 듣고서 수승한 인연을 맺게 됐으니 그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요세는 송나라 때 천태종 승려인 사명지례가 조직한 염불결사의 ‘청규’를 모범으로 삼아 백련결사를 이끌어나갔다.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열어 백련결사가 천태종의 법화참법과 정토구생(淨土求生)임도 명확히 했다. 그는 결사 구성원들에게 술과 육식을 철저히 금하도록 했고, 염불, 경전신앙, 참회의식을 수행법으로 제시했다. 왕족과 귀족은 물론 관료, 일반 백성들까지 속속 동참했다. 요세는 대중들은 위해 천태 3대 전적인 ‘법화문구(法華文句)’ ‘법화현의(法華玄義)’ ‘마하지관(摩訶止觀)’의 핵심을 모은 ‘삼대부절요(三大部節要)’를 저술해 배포했다. 또 ‘법화경’ 내용을 적은 부채를 유포시켜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전의 가르침을 새기도록 했다. 요세 자신은 세 벌의 승복과 발우 하나를 지니는 청빈의 삶을 살았으며, 자신에게 들어오는 모든 보시금과 물품은 빈궁한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보련도량에는 결사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요세에게서 득도한 제자가 38명, 개창한 가람이 5개소, 직접 보현도량에서 결사에 참여한 이가 300여명이었으며, 멀리 인연을 맺은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중에는 과거에 급제하는 등 촉망받는 유학자로 훗날 백련결사를 이끌었던 2세 천인(天因, 1205~1248)과 진사출신의 4세 천책(天頙, 1206~?)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요세를 중심으로 자신의 역량에 맞는 수행방법을 찾아 정토왕생을 향해 나아갔다. 백련사 보현도량은 몽고와의 전란 속에서 피난민들의 안주처가 됐으며, 전쟁에서 죽어간 이들의 왕생을 기원하는 기도도량의 역할을 담당했다.

1245년 7월, 83살의 요세는 자신이 떠날 때가 멀지 않음을 알았다. 그는 매일 앉으나 누우나 원효의 ‘미타징성가(彌陀證性歌)’를 부르다가 7월7일 새벽 서쪽을 향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았다. 그런 뒤 “이 생각이 흔들림이 없으면 바로 이 자리에서 도가 드러나느니 나는 가지 않아도 가는 것이며, 저들은 오지 않아도 오는 것이니, 서로 감응(感應)으로 되는 것이고 실상은 마음 밖의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입적했다.

고려후기 간화선과 천태사상을 통해 민족의 자주적 의지력을 일깨우고 교단을 정화하려 했던 지눌과 요세. 그들이 세상을 떠난 뒤 그 각별한 인연은 제자들로 이어졌다. 요세를 계승한 천인이 지눌을 계승한 혜심(慧諶, 1178~1234)에게서 공부했으며, 혜심 역시 만덕산에 설법을 하는 등 수선사와 백련사의 교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됐다.

보조국사 지눌이 원묘국사 요세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 최자(崔滋)의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명병서(萬德山白連社圓妙國師碑銘)’는 ‘동문선(東文選)’(권117)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 자료 : ‘지눌의 선사상’(길희성, 소나무), ‘보조국사의 생애와 사상’(보조국사 열반 800주년 기념사업회, 불일출판사), ‘동아시아 염불결사의 연구’(김성순, 비움과 소통), ‘정혜결사의 취지와 창립과정’(최병헌, 보조사상 5·6합집), ‘원묘요세의 백련결사와 그 사상적 동기’(고익진, 불교학보 15집), ‘원묘국사 요세의 정혜결사 참여와 결별’(변동명, 역사학보 제156집), ‘고려후기 원묘요세의 백련결사’(채상식, 정토학연구 제3집), ‘원묘 요세의 이동경로에 따른 사상 추이 고찰’(최동순, 정토학연구 제16집)

[1270호 / 2014년 11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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