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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이 다하고 심지가 마른 등잔

“등잔에 기름이 다하고 심지가 말랐다(油盡燈枯)” 장제스(蔣介石)의 오른팔 격이었던 대만의 논객 천부레이(陳希雷)가 장제스에게 남긴 유언이다. 공산당원임이 드러나 체포된 딸과 사위를 장제스가 풀어주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말이다. 자신의 역할이 끝났고,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음을 함축한 구절이다.

최근 개헌 논의가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탐탁지 않아 해서 주춤하고 있지만 개헌의 필요성은 오래 전에 제기되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개헌을 추진했다. 제18대 국회에서는 김형오 국회의장이 헌법개정자문위원회를 만들어 헌법개정안을 제안했고, 의원정수의 절반이 넘는 여야 의원들이 헌법연구모임을 만들어 꽤 두꺼운 보고서를 냈다. 제19대 국회에도 ‘개헌추진국회의원모임’이 활동하고 있다.

개헌 논의가 되풀이되는 건 현행헌법이 기름이 다하고 심지가 마른 등잔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의 성과로 장기집권과 독재정치를 막는데 초점을 맞춰 개정된 것이 현행헌법이다. 현행헌법으로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단임과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문제점들이 드러났으므로 개헌 논의는 불가피하다. 다만 지금이 다른 일을 제쳐두고 개헌을 추진해야 할 시기인지는 엄밀히 따져봐야 한다. 개헌의 필요성은 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로 제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헌법개정문제는 잠복해 있다가 계기만 주어지면 정치의 중심주제로 작용하는 폭발력을 갖고 있다. 개헌 논의가 시작되면 다른 현안들이 묻혀버릴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국민은 개헌에 호의적이지 않다. 개헌이 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정치인들의 이해관계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헌법은 나라의 대표적 규범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구조와 상호관계를 기본적으로 틀 짓는다. 따라서 헌법의 변경은 가능한 한 억제하며,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도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만약 개헌이 논의된다면 국민의 눈높이에서 시작해야 한다. 국민의 다수가 어떤 제도를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에 적합한 제도가 어느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부형태만 논의해서는 안 된다. 현행헌법이 안고 있는 사회, 경제, 문화, 복지, 기본권, 영토문제 등 모든 것을 다 다뤄야 한다.

기름이 다하고 심지가 마른 등잔은 또 있다. 벌써 20년이 넘은 조계종의 개혁불사다. 개혁이 이제는 필요 없거나 제 역할이 다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조계종 개혁불사가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당시 독재정권과 결탁한 권승의 무리가 종권을 장악하고 종헌종법을 무시하면서 온갖 횡포를 저질렀다. 참다못해 스님과 불자들이 들고 일어나 경찰과 폭력배까지 동원해 종권을 지키려던 부패한 권승의 무리를 몰아냈다. 종단운영의 새로운 기풍이 생겼다.

종단개혁이 쉽지는 않았다. 1998년에도 유혈사태가 있었고 1999년에도 종단분규가 빚어졌다. 정권의 예속에서 벗어났다지만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일은 아직도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개혁불사 이후 조계종은 많이 바뀌었다. 총무원 체제가 3원 체제(총무원 교육원 포교원)로 바뀌었다. 총무원장이 멋대로 종단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됐다. 사회 속에서의 불교 역할에 대한 고민도 많아졌다. 광우병 촛불집회 때나 철도노조 파업 때 집행부를 보호해주는 등 약자를 보듬어 안는 것도 눈에 띄는 변화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다. 개혁불사 20년으로도 풀지 못한 밀린 숙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종회 구성 과정에서 나타났듯이 비구니 스님들은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 재가불자도 종단운영에서 배제되어 있다. 개혁과정에서 빚어졌던 갈등들, 예를 들면 당시 총무원장 등 멸빈된 스님들과의 화해 문제도 풀지 못한 숙제이다. 마른 심지를 바꾸고 기름을 채워 넣어야 개혁불사의 등잔이 한국불교의 미래를 훤하게 비춰주지 않을까.

손혁재 nurisonh@gmail.com

[1271호 / 2014년 11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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