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바이센테니얼 맨(Bicentennial Man)’
23. ‘바이센테니얼 맨(Bicentennial Man)’
  • 정장진
  • 승인 2014.11.24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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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는 로봇마저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기적의 원천

▲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은 로봇과 인간의 경계에 대해 작은 깨달음을 준다.

2000년에 개봉된 ‘바이센테니얼 맨’은 전형적인 SF 영화다. 장도 보고 요리와 청소도 하고 심지어 주인들과 대화도 하는 가사 로봇을 TV 사듯이 구입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그러나 15년이 흐른 2014년, 우리에게 여느 SF 영화와는 참 다른 영화로 다가온다.

2000년에 개봉했던 SF영화
가사로봇이 겪는 인간 다뤄
누구나 겪는 탄생·결혼·죽음
틈에 들어가고픈 로봇 이야기

피부·장기·혈액 이식받지만
사랑에 빠져 죽음 택한 순간
비로소 인간 사이클에 속해


우선, 주연을 맡았던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얼마 전 이 세상을 하직했기 때문이다. ‘죽은 시인의 시회’, ‘굳 윌 헌팅’ 등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죽은 것이다. 배우는 죽었지만, 영화는 남았다. 영화를 볼 때마다 죽은 배우가 살아 움직인다. 이런 이유로 ‘바이센테니얼 맨’이 여느 SF 영화와는 다른 영화라고? 로빈 윌리엄스만 죽은 것이 아니지 않는가? 사람이라면 다 죽는 것 아닌가….

배우만 죽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필름 속에, 디지털 저장 장치 속에 남아 언제든지 버튼만 누르면 감독 지시대로 제작된 그대로 수만 번이라도 재생할 수 있는 이미지와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대체 배우의 죽음이 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하며, 또 여느 SF 영화와는 다르게 봐야 하는 이유가 된단 말인가?

200년을 살았다는 뜻의 ‘바이센테니얼 맨’이 그 많은 SF 영화와는 다른 두 번째 이유는 생을 가능하게 하는 제일 조건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죽지 않으면 태어나지도 않는 것이라는 이 큰 모순을 영화는 담담하게, 나아가 조금은 코믹하게 말하고 있다. 나아가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하는 것이구나’하는, 말도 안 되는 모순어법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죽음과 사라진 그의 뒤에 남은 영화들 속 영상과 소리와 느낌이 강렬하게 대비되면서.

‘바이센테니얼 맨’, 즉 200년을 산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로보틱스(로봇공학) 기술이 적용된 가사로봇인 제품번호 NDR-114 로봇이다. 안드로이드인 셈인데 제품번호인 NDR의 발음도 한 몫을 해서 친근한 이름인 앤드류로 불린다. TV와 냉장고 없는 집이 없듯이, 거의 모든 집에 NDR이 있으며 힘들고 귀찮은 일들을 도맡아 한다. 일반 가전제품과 다른 점은 인공지능이 들어가 있어서 말도 하고 학습능력도 있다는 점인데, 특히 앤드류는 주인인 리차드 마틴의 아량 덕분에 별도로 수업을 받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스스로 공부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집 막내딸인 작은 아씨의 유리로 된 말 인형을 뜻하지 않게 부수고 만다. 핀잔을 들은 앤드류는 나무를 갖고 이 말 인형을 이전의 것보다 훨씬 멋지게 만들어 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앤드류는 단순한 로봇에서 학습을 통해 스스로 진화하는 능력을 보여주며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앤드류는 기계답게 책에 나온 설계도를 보고 도면이 지시한 사항들을 그대로 적용해 가며 시계 같은 정교한 물건도 제작하고 고장 난 축음기도 고쳐낸다. 뿐만 아니라 수학적 원리가 지배하는 음악도 아주 쉽게 배워 멋지게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고맙다고 하면 사전에 입력된 인사말인 “봉사는 저의 기쁨입니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할 뿐, 언어 능력은 떨어져서 특히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이니 얼마든지 로봇 특유의 신기한 기능을 집어넣고 ‘스타워즈’ 시리즈처럼 화려한 CG 기법을 동원해 이미지 자체로 볼만한 멋진 SF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바이센테니얼 맨’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 로봇을 활용한다. 여기에 이 영화의 매력이 있으며 나아가 철학적 메시지도 담겨있다.

주인인 마틴 리처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두 딸을 시집보내고 자신도 늙어간다. 그러나 앤드류는 늙지도 않고 과거를 회상하며 우수에 젖지도 않는다. 시간이 흘러 막내 아가씨도 늙어가고 그 막내 아가씨의 손녀가 등장해도 앤드류는 여전히 주문한 날 구입한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으니 한 가족에게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겠는가. 하지만 그 일들이라는 것이 별 일도 아닌 것들이다. 누구나 겪게 마련인 결혼, 죽음, 탄생과 관련된 일들이니 말이다. 앤드류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이 사이클, 즉 윤회의 가장 기본적인 원 밖에 존재한다. 기계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앤드류는 인간을 지배하는 이 윤회의 원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갈수록 영특해지며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가족들 사랑을 듬뿍 받는 앤드류가 원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아끼며 수십 년간 함께 산 마틴의 가족들, 특히 그 중에서도 앤드류를 거의 인간처럼 대해준 막내 아가씨와 이 아가씨를 거의 그대로 닮은 손녀가 앤드류를 원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 인간의 모든 것을 이식 받지만 결국 죽음을 택한 로봇은 비로소 인간으로 태어난다.

우여곡절 끝에 앤드류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여러 일들을 하나씩 통과하는데, 죽음은 인간이 되는 마지막 통과의례였다. 199년을 산 앤드류는 프로그램상으로는 폐기처분되지 않으면 영원히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앤드류는 작은 아씨를 그대로 닮은 손녀의 사랑을 받던 중(섹스까지 한다) 나이가 든 이 손녀와 함께 임종을 맞는다. 그 때 그의 나이 199살이었다. 인간의 피부를 이식받고 감각세포와 인공장기는 물론이고 인공혈액까지 수혈 받은 앤드류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길을 밟음으로써 인간이 된 것이다.

허무맹랑한 설정이지만, 이 이야기는 의외로 종교적이며 불자들 중에는 잠시나마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이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영원불변하는 그리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진리가 기계에 지나지 않는 로봇을 통해 설파되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운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죽음을 택한 로봇의 영혼이 궁금해진다. 동시에 앤드류와 손을 잡고 임종을 함께 한 인간의 영혼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봉사는 나의 즐거움”이라고 녹음기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던 앤드류의 영혼은? 그리고 앤드류 역을 맡았던 로빈 윌리엄스의 영혼은? 영화가 있는 것이다. 마치 영혼처럼, 몸은 다비되어 한 줌 연기로 타올라 사라졌지만, 영화가 남은 것이다. 앤드류는 영원한 것이다. 로빈은 영원하지 못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이다. 음악도 미술도 그리고 인간 세계의 모순과 복잡한 감정과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 한 송이도 그 지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예술의 그 심부 속에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죽음과 그 죽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살아가며 거대한 만다라를 만들어가는 천불상들의 어울림은 영원한 것이다. 여기서 예술은 불심을 만나다.

또 하나 로봇이 인간이 되는 설정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 다름 아니라 유명한 피그말리온 신화가 그것인데, 조각가가 연체를 조각하고 너무나 아름다워 인간으로 변신시킨 뒤 데리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그것. 영화는 이 신화에서 남녀만 바꿔 놓은 것인데, 비단 ‘바이센테니얼 맨’만이 아니라, 오드리 헵번이 나왔던 ‘마이 페어 레이디(1964)’와 그 원작인 연극을 비롯해 여러 번 사용된 적이 있다. 이런 이유로 영화 속에서 로봇을 사랑하는 여인이 조각 복원가로 등장한다. 하지만 서구 신화는 죽음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인간이 되기 전, 아니 정확히 말해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일기 전, 아직 완전한 인간이 되기 전인 앤드류는 길 잃은 개 한 마리가 집을 찾아오자 거두어 기른다. “나는 위가 없어서 먹을 게 없어. 하지만 들어와 함께 살자구나….” 많은 에피소드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이 장면은 보기와는 달리 묵직하다. 영화 속에서 한 무리의 인간들은 앤드류를 기계로만 대할 뿐, 결코 인간으로 대접하려고 하질 않는다.

우리는 로봇인 앤드류의 자리에 가난한 사람, 못 생긴 사람, 죄를 지은 사람들을 대신 대입해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까지 노예로 살아야 했던 흑인도 앤드류의 자리에 대신 놓아볼 수 있다.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직도 우리는 앤드류의 자리에 로봇이 아닌 다른 인간들마저 놓아보지 못하고 미워하고 학대하고 착취하고 있다.

앤드류의 영혼은 지상이 아닌 어디 먼 곳으로 간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길 잃은 한 마리 개를 거두어 함께 살기로 한 앤드류의 이 자연스러운 작은 사랑이 그의 영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빈 윌리엄스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수보리, 내 영화를 정확하게 보았소” 할 것이다. 그러면 수보리 기분이 좋아 환하게 웃을 것이다. 로봇을 사랑하는 작은 아씨와 그를 빼닮은 손녀가 앤드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산다, 로봇마저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사랑의 기적은 온 영혼의 무게가 실린 자비에 다름 아니다. 부처님이 다 뭔 소용인가, 자비가 없다면. 예수가 다 뭔 소용인가, 사랑이 없다면. 그러니 인간 중에도 로봇이 있으며 로봇 중에도 인간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은 로봇이 인간인 여자와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고집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자식이 태어날 수 없으니, 그 자식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문제와 탄생과 죽음의 문제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은 이 지점에서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이 한계는 곱씹어 볼만 하다. 인공수정과 냉동정자까지 의술에 이용되는 오늘날, 인간에 대한 정의가 새롭게 내려져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자비에 대한 정의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흔히 말하듯이, ‘빅 체인저’가 되었고 이제 누구도 미래를 예언하기 힘든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오히려 미래는 부정적이다. 과학이 인간을 앤드류처럼 가전제품으로 여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71호 / 2014년 11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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