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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종단개혁의 주역-① 도법 스님

“소수 권력독점서 벗어나 사부대중이 운영 주체된 계기”

▲ 도법 스님은 “종단개혁은 일부 한계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요소가 훨씬 많았다”고 강조했다. 다만 “개혁의 정신과 취지를 살려 지속적으로 종단개혁을 추진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도법 스님은 1994년 조계종 개혁을 이끈 핵심 인물이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상임공동대표와  개혁회의 상임부위원장을 맡아 제도개혁을 주도했다. 스님은 “1994년 종단개혁은 전근대적 모습을 벗지 못하던 조계종이 근대화를 맞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소수의 특권층이 권력을 나눠 갖던 폐쇄적 구조에서 벗어나 사부대중이 종단 운영의 주체로 나선 것은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단개혁의 정신과 취지가 지속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종단은 변화가 요구되고 지속적으로 개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1월12일 도법 스님을 만나 1994년 종단개혁 과정과 의미, 향후 과제 등을 들었다.

종단개혁, 종단 근대화 계기
구태세력 청산·제도 개선해
폐쇄적 종단운영구조 탈피

선거도 대중공사의 한 형태
선거법 제대로 관리 못하고
후유증만 걱정해서는 안돼

승가중심 총무원장 직선제는
현대사회에서 큰 의미없어
재가자도 선거권 부여해야

▶1994년 종단개혁은 어떤 의미를 갖나.
“1994년 종단개혁 이전까지 조계종은 전근대적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소수에 의해 종단이 좌지우지됐다. 마치 봉건사회와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사부대중이 구태 세력을 청산하고 제도개혁을 이뤄냈다. 개혁주체들이 새로운 총무원장을 뽑고 중앙종회도 구성했다. 무엇보다 사부대중이 새로운 종단운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종단사에서 바닥에서부터 일어나 개혁의 시작과 끝을 마무리한 것은 유일하다.”

▶1990년 설립된 선우도량은 1994년 종단개혁을 이끈 중심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선우도량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선우도량을 만든 이유는 뭐였나.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불교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비구·대처의 갈등을 시작으로 종권을 두고 끊임없이 갈등과 반목이 계속됐다. 한국불교가 그런 혼란과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 근본 이유는 불교인들 스스로 사상적 정체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현장에 직면해서 모든 문제를 불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불교관과 실천론이 정립돼야 한다. 그것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결사운동을 통해 이를 진행하려고 했다.”

선우도량의 결사운동은 이후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종단의 대안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런 가운데 1994년 연초부터 의현 총무원장의 3선 문제와 상무대 비리의혹이 불거졌다. 종단개혁에 공감하는 여론들이 확산됐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 중앙승가대, 동국대 동문회 등 사회민주화를 견인했던 진보승가그룹과 학인단체들을 중심으로 종단개혁을 위한 범종추 결성 논의를 본격화했다. 그러나 선우도량은 범종추 가입을 꺼려했다. 이로 인해 개혁세력 내부에서조차 선우도량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범종추 결성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뭔가.
“선우도량이 종단개혁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개혁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선우도량은 교육 중심의 결사운동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려 했다. 교육을 통해 한국불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단체였다. 현실 사안에 직접적으로 뛰어드는 것은 선우도량이 추구하는 개혁방식과 다르다고 여겼다. 그래서 일정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범종추에 가입한 이유는 뭐였나.
“의현 총무원장의 3선 문제와 상무대 사건이 터지면서 종단개혁 논의가 무르익었다.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대다수 종도들은 의현 총무원장의 8년을 지긋지긋해 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살았다. 원로에서부터 본사주지, 중앙종회의원 누구도 그 앞에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지긋지긋한 8년을 살아왔는데 또 총무원장을 한다고 하면 누가 받아들일 수 있었겠나.”

▶의현 총무원장 이전까지 역대 총무원장들의 평균 임기가 1년6개월에 불과했다. 상대적으로 길게 느꼈고, 사회민주화의 관점에서 ‘3선은 독재’로 봤던 것은 아닌가.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의현 총무원장의 임기동안 수많은 문제점이 발생했음에도 누구도 비판을 하지 못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판하고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범종추 결성에 동의하면서 스님은 3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비폭력을 원칙으로 하며 개혁의 진정성을 위해 단식을 하고, 개혁 이후 종권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세간의 우려와 비판도 많았다.
“우리도 폭력을 쓰고 기물을 파손한 것은 맞다. 3월26일 구종법회 이후 범종추 지도부들은 단식을 했고, 대중들은 총무원장의 3선을 막기 위해 농성을 했다. 농성현장에 있던 책임자들이 어떻게든 총무원 청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건의했다. 외부에 노출돼 있으면 의도 하지 않게 폭력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조금 무리가 있더라도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지도부들은 고심 끝에 동의했다. 그런데 나중에 가봤더니 (청사 건물이) 너무 많이 파손이 됐었다.(웃음) 3월29일 밤 경찰에 포위됐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처음에는 항복을 하고 순순히 경찰에 연행되는 쪽을 택하려고 했다. 그러나 강제 연행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향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많아 마지막까지 저항하게 됐다.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어찌됐든 기물을 파손하고 폭력사태가 발생한 것에 대해 참회했고, 벌을 받겠다고 했다.”

▶3월26일 구종법회 때까지 범종추는 의현 총무원장의 3선 반대와 상무대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후 종권창출을 위한 행보를 했다.
“처음부터 종권창출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저지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의현 총무원장과 김영삼 정부가 너무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면서 대중들이 분노했다. 범종추 기획팀에서 이번 기회에 종단을 전면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갔다.”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는 4월10일 전국승려대회였다. 그러나 승려대회는 초법적 권한이었다. 이를 기획한 이유는 뭔가.

“그 당시 합법적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없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사부대중들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합법적인 방법으로 제도권을 설득할 수 없었다. 비상체제로 갈 수밖에 없다.”

▶근현대사에서 수차례 승려대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폭력사태가 뒤따랐다. 종정 서암 스님도 이를 우려하면서 승려대회를 금지했다. 4월10일 승려대회에서도 개혁세력들이 총무원 청사를 접수하려고 하면서 또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처음부터 총무원 청사를 폭력적으로 접수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승려대회 직후 원로의장 혜암 스님이 앞장을 섰다. 종단 어른으로서 위엄을 보이고 대중의 힘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현장은 매우 격앙돼 있었다. 통제가 안됐다.”

▶서암 스님의 승려대회 금지 교시에 대해 어떻게 보나.
“구종법회 이후 단식을 하면서 문경 봉암사를 찾은 일이 있었다. 그 때 노장님은 크게 반기면서 젊은 스님들이 종단을 개혁하겠다고 나선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격려했다. 늘 종단개혁이 원력이었는데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는데 젊은 스님이 나서줘서 고맙다고 했다. 곧 당신이 나설 것이니 며칠만 더 버티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도 했었다. 그런데 스님은 종단개혁과정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의현 총무원장 편에서 교시를 발표했다. 아쉽다.”

▶승려대회에서 서암 종정불신임을 결의했다. 꼭 필요했다고 보나.
“개혁세력들은 대부분 반대했었다. 종정 스님을 잘 모시고 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현실적으로 불신임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라고 여겼다. 그러나 원로회의에서 강력히 요구했다. 심지어 종정 불신임을 하지 않으면 승려대회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설조·탄성 스님과 함께 설득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리고 개혁회의가 출범했다. 그 과정에서 개혁의 대상이 됐던 스님들도 포함됐다. 이로 인해 개혁세력 내부에서도 비판이 많았다.
“개혁주체들 사이에서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었다. 구태세력들을 모두 일선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그렇게 하면 저항세력이 너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개혁주체들은 종단 운영의 경험이 없었다. 자체적으로 종단을 끌어가기에 한계가 있었다. 개혁과정에서 저항을 최소화하고 무리 없이 개혁회의를 끌고 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개혁회의가 종헌종법을 정비해 합리적 운영시스템을 갖추게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반면 지나치게 사회법을 종단에 도입하면서 세속화를 부추겼다는 시각도 있다.
“세속화라는 말은 종교가 ‘거룩하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과연 일반 사회와 불교를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거룩한지를 볼 필요가 있다. 인권의 존중과 남녀의 평등문제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사회는 상식이 적용되는 반면, 불교는 어떤가. 내용적으로 보면 사회가 더 거룩해지고 불교계가 더 세속적이다. 이제는 정직해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조계종의 문제가 율장대로, 청규대로 살지 않아서 그렇다고 비판한다. 율장대로 하면 거룩하고 민주적으로 하면 세속적인 것인가. 막연한 관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소수권력층이 종단을 좌지우지 하던 것을 종헌종법을 정비해 대중이 주체로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이것만으로도 불교가 그 이전보다 훨씬 거룩하고 불교다워진 것이다.”

▶최근 선거후유증으로 종단이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선거 때문에 종단이 망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보지 않는다. 선거후유증은 관리와 운영의 문제이지 제도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선거제도도 대중공사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본사주지가 중앙종회의원을 겸직하고, 총무원 부장들도 종회의원이 됐다. 총무원장 주변 인물들이 독식했다. 종단개혁으로 본사주지와 중앙종회의원을 대중이 직접 뽑게 했다. 총무원장도 중앙종회에서 소수의 인원이 뽑던 것을 300여명의 선거인단을 구성해 선출한다. 어떤 것이 더 합리적인가. 다만 20년이 지나면서 법적 보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선거법이 올바로 준용될 수 있도록 엄격하게 관리도 해야 한다. 그렇게 관리됐다면 종단의 풍토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쪽으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고, 선거제도만을 문제 삼는다.”

▶그렇다면 총무원장 직선제는 어떻게 보나. 종단개혁 때도 개혁세력들은 총무원장 직선제를 요구했었다.
“제도를 만드는 것도 시대마다 갖는 의미가 다르다. 과거에 말했다고 지금 그대로 답습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현재 한국불교의 상황을 볼 때 출가자 중심으로 종단을 운영하는데 한계가 있다. 역량도 안 된다. 단순하게 출가자 중심의 직선제는 큰 의미가 없다. 이제는 사부대중의 역량이 통합적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총무원장 선거도 사부대중이 참여해 뽑도록 해야 한다. 우선 교구종회에 재가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이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구종회가 활성화되고 지역교구도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재가자의 대표성을 부여하는 문제도 생길 수 있지 않나.

“일단 선거제도를 만들면 자연적으로 그 문제도 해결된다. 해보지도 않고 막연하게 어렵다고 생각하니 안 되는 것이다. 크게 문제될 부분이 아니다.”

▶조계종 화쟁위원장으로서 1994년 멸빈자 사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보나.
“1994년 멸빈자 문제는 종단 구성원 모두의 공업(共業)이다. 누구누구의 잘못으로 국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사부대중이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논의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될 문제라고 본다. 종헌종법의 틀 속에서 다뤄야 한다.”

▶종단개혁을 어떻게 보나.
“일부 한계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면이 훨씬 더 많다고 본다. 다만 개혁 정신과 그 취지를 살려 지속적으로 종단개혁을 추진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부분은 아쉽다.”

▶오늘날 여전히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조계종의 변화가 필요하다면 어떤 점에서의 변화가 시급하다고 보나.
“현재 우리 종단은 어떤 문제든 풀어가는 방식에 적지 않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경험과 역량 부족이 원인이다. 어떤 문제든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정직하고 소탈하게 대중이 주체적으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풀어가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문화가 조성된다면 향후 종단은 현격하게 달라질 것이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72호 / 2014년 12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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