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이중잣대
‘가족’의 이중잣대
  • 함돈균
  • 승인 2014.12.01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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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소설 ‘봄봄’은 ‘장인’ 봉필이 딸을 준다는 약조를 하고서 주인공 ‘나’를 데릴사위명목으로 머슴살이 시키는 이야기다. 3년이 지나도록 쇠경 한 푼 안 주고 결혼도 시켜주지 않는 이 얘기에는 당대의 노동착취와 계급갈등에 대한 작가의식이 날카롭게 스며있다. 지주계급을 대변하는 봉필은 자기 편의에 따라 노동문제를 가족문제로 전도시킨다. 일을 시킬 필요가 있을 때는 ‘나’를 머슴으로 취급하고, ‘나’가 계약위반이라고 항의할 때는 둘 사이를 ‘장인-사위’ 관계로 환치시키며 무마하는 것이다.

국내 최대기업인 삼성그룹과 재계 서열 10위인 한화그룹 사이에 대규모 기업인수합병(M&A)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둘 다 ‘삼성 가족’ ‘한화 가족’이라는 용어를 수시로 기업홍보에 사용했던 곳이었지만, 수천 명에 달하는 ‘가족’은 정작 제 운명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삼성맨’으로 불리는 일이 자부심이 되기도 한 해당 회사원들은 앉은 자리에서 느닷없이 다른 회사 소속원이 되었다. 일을 할 때는 가족적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지만, 정작 자기 소속이 바뀌는 중차대한 일에서는 ‘가족’의 소통 과정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이러한 ‘갑을 관계’ 속 편의적인 이중 잣대는 지금 한국사회의 구조적 갈등, 나아가 인문적 삶의 단계를 한 차원 높이는 데에 심각한 장애 요인으로서 도처에 퍼져 있다. 예컨대 대학을 보자. 요즘 많은 대학의 운영방식을 보면, 대체로 학교 최고 운영진에게 교수와 학생은 관료적 결정의 일방 통보 대상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특히 학생들은 자기가 속한 학과 통폐합 같은 자기존립과 관련한 중요 의사 결정에서도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사실상 지금 대학생들은 대학의 경영진에게 등록금 수입의 창구로서 ‘소비자’ 이상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하지만 역으로 학생들이 ‘소비자’로서 학교라는 ‘기업’에 정당한 교육적 서비스를 요구할 때에는 어떤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등록금으로 호갱이 된 대학생 ‘소비자’에게 교육환경 개선을 또 다시 미루면서 학교 운영의 어려움을 정서적으로 호소한다. 이에 대해 학생들의 항의가 시위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 다시 합리적 이윤 계산의 논리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취하는 학교도 있으며, 이럴 때에 아이러니하게도 학교 당국은 학생이 스승에게 대들었다는 식의 ‘유사 가족적’ 괘씸죄의 감정 논리로 학생들을 징계하기도 한다.

올해 내내 국민은 국가 운영자들의 행태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절망하지 않았나. 대통령은 해외순방 때마다 한복을 입고서 ‘국모’가 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냈지만, 세월호 사건처럼 깊은 정서적 위로가 국민에게 필요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심각한 장기불황에 접어든 우리 사회에서 정책결정자들이 한편으로는 정책적 합리성을 제기하면서 기업을 위한 규제해소에는 발 벗고 나서면서도, 사실상 고통의 일방적 분담에 대한 경제적 약자들의 항의에는 합리적으로 응답하지 않고 정서적 차원에서 인내를 ‘강요’하는 사례는 또 어떤가.

불가에서는 왜 ‘출가(出家)’란 말을 사용하는가. 거기에는 ‘가(家)-가족’이라는 정서적 공동체에서 온갖 욕망의 자기 정당화가 이루어지기에 그것과 절연하여 진리 도정에 참여하여 용맹정진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나 사회에는 정서적 위무나 격려 같은 건강한 정서적 공동체성이 적절하게 결부되어 있기도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합리적 관계냐 정서적 관계냐는 식의 이분법이라기보다는 원칙의 자기편의적 적용과 아전인수를 피하고, 공동공간의 삶을 짐승 수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참된 인문적 노력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도모하는 일이다.

함돈균 husaing@naver.com

[1272호 / 2014년 12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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