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관찰자기
44. 관찰자기
  • 인경 스님
  • 승인 2014.12.0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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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관찰 능력은 타인과의 소통 기회 제공

관찰자기는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에서 경험하는 마음현상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지금 화가 나 있어’ 이것은 개념적 자기를 나타낸다. 화가 난 상태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라고 대답한다면, 이 경우는 화란 감정의 상태에 빠져있지 않고 그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경우는 화란 감정에서 벗어난 다른 상태의 ‘나’가 있다.

상황 관리·통제에 정신 팔려
내면 관찰 약점 보이기도 해
경험내용 자각하기 위해선
시선 내면 돌리는 연습 필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 관찰하는 행위와 함께 관찰하는 자기가 존재하는가? 하는 철학적인 논의이다. 특히 초기불교에서는 오직 관찰하는 행위만이 존재하고 관찰하는 별도의 자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관찰자기’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을 수가 있다. 여기서 대상을 관찰하는 것만 존재하지, 관찰하는 자기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고요함을 의미하는 선정상태이기에 일상적인 경험에서 벗어난 초월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 대화를 할 때는 관찰하는 자기가 존재한다고 우리는 말한다.  여기서 ‘자기’란 개념은 무엇이고, 자기를 관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여기서 자기란 타인을 염두에 둔 사회적인 개념이지, 절대적인 고정된 어떤 실체, 철학적 의미를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분을 관찰하는 것도 소통의 방식을 말한다.

사실 인간은 자신을 관찰하는 능력을 성장하면서 배운다. 우리는 자신을 관찰하면서 평가하고 새로운 전략을 세운다.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감정에 반응을 한다. 자신과 세계에 대해 이렇게 관찰하는 능력은 서로에게 소통의 기회를 제공하고, 대응하는 전략을 세우게 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현상을 온전히 알아차리거나 관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는 어떤 목표나 의도에 휩쓸려가고 무엇보다도 상황을 관리하고 통제하는데 정신이 팔려있기에,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데 약점을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경험내용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내면으로 되돌려서 스스로를 관찰하는 직관, 반조(返照)의 연습이 필요하다.

이런 부분 역시 어릴 때부터 성장하면서 우리는 배운다. 여기에 좋은 사례가 있다. 어린 아이가 무서운 꿈을 꾸었다. 어둠 속에서 어떤 나무가 점점 커지더니 지붕을 뚫고 나가면서 마침내 집을 무너뜨렸다. 너무나 놀라서 잠에서 깨어난 어린 아이는 울면서 엄마를 찾는다. 그런데 엄마는 울지 말라고 야단친다. 이런 경우에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가 없고, 그곳에 접촉하는 기회를 놓쳤다. 어른이 된 지금도 이 내면의 어린 아이는 자신이 가치 없음을 느끼면서 우울해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안아주면서, ‘너 지금 무서워서 울고 있구나’라고 아이의 감정을 그대로 읽어준다면, 어떨까? 그러면 아이는 안전한 공간과 함께 자신의 감정에 접촉하게 되고, 이런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일상에서 대화할 때 자기란 의미는 명상할 때처럼, 어떤 대상을 알아차리고, 그곳에 머물러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명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찰이 있는 곳에는 대상이 있고, 대상이 있는 곳에는 자기가 있다. 그런 까닭에 경험적으로 보면, 관찰자기란 정확하게 관찰하는 자기가 있다는 말이다. 이때의 자기는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회적인 소통에서 느껴지는 자기를 말한다. 화가 있으면 그곳에는 화를 낸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대한 화를 낸 자기가 있다. 그런데 그런 화를 관찰한다고 하면, 어떨까? 화가 사라져버리면, 이곳에도 자기가 있을까?

명상은 자신의 경험내용에 대해서 존재하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머물러, 지켜보기’라는 3단계로 이루어진다. 알아차림은 대상을 의식의 표층에로 이끄는 작업이고, 머물기는 인식된 감정, 생각, 갈망에 접촉하여 충분하게 느껴보는 과정이고, 지켜보기는 그 변화의 전 과정을 판단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혼란되고 흐릿한 경험내용을 명료하게 자각할 수 있게 되고 경험내용으로부터 분리되어서 그 본질을 통찰하는 해탈을 경험하게 된다.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272호 / 2014년 12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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