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옥천사 주지 백졸 스님 [끝]
부산 옥천사 주지 백졸 스님 [끝]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4.12.0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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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수행? 빈틈 없고 올바르고자 힘쓸 뿐”

▲ 백졸 스님은 “기도, 주력, 염불, 참선, 위빠사나 등 그 어떤 수행이든 그에 따른 가피는 분명 있다”며 “하지만 궁극의 가피는 깨달음이요, 니르바나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부산 옥천사에 이르니 ‘장산(萇山) 옥천사(玉泉寺)’라는 편액과 함께 일주문 양 기둥에 걸린 주련이 눈에 들어온다. ‘산색문수안 수성관음이(山色文殊眼 水聲觀音耳)’. 직역하면 ‘산빛은 문수보살의 눈이요, 물소리는 관음보살의 귀로다’일 터. 팔만사천대장경에 담긴 금과옥조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음에도 백졸 스님은 왜 이 경구를 새겼을까? 일주문 사이에 걸린 현수막이 초겨울 바람에 나부낀다. ‘마음은 본래 고요한 것’. 대웅전에 들어서니 수미단이 이색적이다. 상단엔 ‘육조단경’, 중단엔 ‘신심명’, 하단엔 ‘보현행원품’ 일구가 새겨져 있다. 이 또한 뜻이 있으리라!

성철 스님에게 ‘삼서근’ 받아
정진 중 인홍스님 은사로 출가
‘10년 이연 없었다’ 원오 선언
선정 잇지 못하는 자신을 채찍

대오 못한 상실감에 좌절 직면
근기 살핀 후 능엄주력 재정진
능엄선원 짓고 ‘10만독’ 결사

죽음이란 또 다른 여행의 시작
거래적 가피 전제한 기도 안 돼
물결 사그라지면 호수 명징하듯
‘자정’ 노력 속 자성보면 ‘소식’


▲ 백졸 스님이 30년 정성을 들여 불사한 옥천사 전경.

옥천사는 백졸 스님의 30여년 불사로 빚어진 부산 유수의 산사이자 능엄주 수행도량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2008년 결사한 ‘하루 30독, 10년 10만독’ 서원행자만도 130여명에 이른다. 옥천사 신도만이 아니다. 다음, 네이버 카페 등에서 활동 중인 네티즌도 옥천선원 정기 수행프로그램에 참여해 능엄주 철야 108독, 3000배, 참선정진을 한다.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을 대상으로 능엄주 암송대회를 열어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

▲ ‘하루 30독, 10년 10만독’ 능엄결사는 2008년 시작했다.

능엄선(楞嚴禪)의 새 지평을 열고 있는 백졸 스님. 그러나 처음부터 능엄주력에 매진했던 건 아니다. 인홍 스님의 상좌 백졸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선사다.

10대 후반의 일이다. “큰스님 만나러 간다”는 어머니와 이모를 따라 나섰다. “스님 뵈면 절 올려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 하나 가슴에 담고 방으로 들어섰다. 성철 스님과의 첫 조우! 대중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성철 스님께 여쭈었다.

“왜 스님을 택하셨어요?”

“별 가시나 다 봤다!”

‘가시나’ 소리에 살짝 마음이 상했지만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성철 스님은 “등가원리를 아느냐?” 묻고는 그 유명한 방정식 E=mc2에 대해 설파했다. 소녀의 뇌리에 한 생각이 스쳐갔다. ‘원자 힘이 그리 크다면 사람도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을 게 분명하다. 그 길을 찾아보자!’

파계사 성전암에 머물던 성철 스님을 찾아가 3000배를 올리고 ‘삼서근’ 화두를 받았다. 화두를 받고 보니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의사도, 시인도, 무용가도, 교육자도 호구지책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집에는 ‘공부하러 간다’ 해 놓고 해인사 아래 청량사로 들어가 대중과 함께 정진했다. 끝장을 볼 참이었다. 3개월이 지났지만 뭔가 부족했다. 집에서 찾아올지 모르니 아예 태백산 홍제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다니던 부산사범대학을 졸업했지만 교단에 설 생각을 접은 지 이미 오래였다. 성전암서 만난 인연으로 청량사, 홍제암 등에서 함께 정진했던 도반과 성철 스님을 찾아가 출가의지를 밝혔다. 성철 스님은 쪽지 두 개를 내 보이며 하나씩 집어가라 했다. 의사가 꿈이었던 행자가 먼저 쪽지 하나를 가져가 폈다. 백졸(百拙)! 도반 행자도 쪽지를 폈다. 불필(不必)이었다.

차 향기가 방안에 퍼져갈 무렵 ‘화두’를 내려놓고 ‘능엄주력’으로 방향을 튼 연유를 여쭈어 보았다. 그리 쉽게 화두를 놓을 백졸 스님이 아니지 않은가! 그 누구보다 정진에 관한한 철저했다. 잠을 잘 때도 문지방에 머리를 두었던 백졸 스님이다. 누군가 일어나 방문을 열면 자연스럽게 깰 수 있기 때문이다. 혹, 졸음이 올라치면 한 겨울 새벽에도 밖으로 나가 눈밭을 걸었다. 차디찬 바람 한 점마저도 나태한 자신을 일깨우는 경책으로 삼으려 했던 스님이다.

백졸 스님은 “나 자신을 기만할 수 없었다”고 한다. 화두든지 벌써 30년. 자문했다. ‘번뇌망상을 다 여의었는가?’ ‘내 공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결론은 아니었다.

“성철 스님의 상당법문을 그 자리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데 막상 메모하려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스님 말씀 한 마디에 딱 계합해야 하는데 아니었어요.”

성철 스님을 찾아갔다. “다시 한 번 화두를 일러 주십시오!” 30년 공부를 했어도 아직 모자라다는 걸 자인한 셈이다. 화두는 그대로 ‘삼서근’이었다. 성철 스님의 장좌불와를 지켜봤던 백졸 스님. ‘삼서근’ 화두를 다시 받은 후엔 가능한 눕지도 않으려 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하게 살아날 수 있도록 무던히도 애썼다. 정진의 깊이가 더해 가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명쾌하지 않았다.

입승을 보던 즈음 선방에 ‘선관책진(禪關策進)’이 있어 열어보았다. ‘산승이 대중에 있으나 일시도 이연(異緣)이 없었더니 10년만에야 비로소 철저히 깨쳤다’ 오조 법연의 제자이면서 간화선 주창자 대혜종고의 스승이었던 ‘벽암록’의 편저자 원오극근의 선언이다. 여기서 ‘이연’이란 ‘번뇌망상’ 또는 백졸 스님이 누누이 강조하는 ‘착각’에 준하는 개념이다.

“10년 동안 이연이 없었단 말씀을 보는 순간 그 자리서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난, 하루도 아니, 10시간도 어려운데….”

‘원오 스님을 꼭 만나고 싶었다’는 백졸 스님은 그 즈음 선방에서 법공양판 ‘원오심요(圓悟心要)’를 손에 넣는다. 하지만 열어 보지 않았다. 혹여, ‘삼서근’이 달아날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걸망에 넣었다. 선방에 갈 때나, 만행길에 나설 때나 원오심요는 늘 백졸 스님의 걸망 한 자리를 차지했다.

백졸 스님은 이후 스스로에게 더 철저했다. 화두가 들렸다가도 졸거나, 먹는 것에 탐착해 놓치면 ‘나를 기만한 것’이라 스스로 으름장 놓았다. 10분 화두를 들고, 40분 망상을 피우다 다시 10분 화두를 들었다 해서 1시간 정진했다 볼 수 없다는 게 지금까지 변함없는 스님의 지론이다.

어느덧 그렇게 3년이 또 지나갔다. 확철대오는 신기루와도 같았다. 다시 성철 스님을 찾았다.

“이 한 길만 가그라. 좋은 게 있다!”

다시 정진해 갔다. 그리고 또 다시 3년이 흘렀다. 확철대오는 차치하고라도 행주좌와 어묵동정도 녹록치 않았다고 한다. 화두가 간단없이 이어져야 하는데 조금만 피곤해도 끊어지곤 했다. 성철 스님을 세 번째 찾아갔을 땐 정말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화두를 다시 한 번 일러 주십시오!”

“화두 중에서도 능엄주 화두가 제일 크데이!”

성철 스님이 백졸 스님에게 권한 건 ‘능엄주’였다. 하지만 백졸 스님은 당장 능엄주력을 들지 못했다. 출가 전부터 화두를 들었던 것을 감안하면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삼서근’을 들었으니 쉽게 놓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3년여쯤 지났을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작 나는 착각하지 않은 상태(선정)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능엄주력에 매진할 수 있는가. 결과는 참혹했다.

“그 때 알았습니다. 제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인지.”

한 번에 두 가지 일은 안하는 성미였으니 화두는 당연히 내려놓고 능엄주력에 매진했다. 선기 하나만은 올곧이 갖추고 있었으니 능엄주력을 밀어부치는 힘은 대단했을 터. 분명코 능엄선을 통해 나름대로 체득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 씨앗을 이곳 옥천사 능엄선원에 심어 놓고 대중과 함께 꽃피우고 싶은 것이리라. 백졸 특유의 능엄선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여쭈어 보았다. 궁극적으로 이 도량에서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를 말이다.

“영원한 행복, 영원한 자유가 실재한다는 걸 알고 믿었으면 합니다.”

스님은 말없이 성철 스님 법어집 ‘영원한 자유’를 건넸다. 작은 책자지만 불생불멸의 세계와 중도원리, 그리고 참선을 통해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 담겨 있다. 불생불멸의 세계가 실재한다 해도 죽음은 우리에게 공포가 아닌가.

“자식이 집을 떠났는데 어디 가 있는 줄 모른다면 걱정하겠지요. 하지만 한국 지리산에 가 있든, 미국 워싱턴에 가 있든, 어디 있는 줄 알면 한 숨 놓이지요? 나는 물론이고 내 부모, 내 형제, 내 친구가 사후에 어디에 가 있는 줄 알면 그리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죽음은 또 다른 여행의 시작입니다.”

백졸 스님은 이내 ‘육조단경’의 일구라 할 수 있는 ‘견자성자정(見自性自淨)’을 써 보였다.

“혜능 스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자신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함을!’ 능엄선이든, 화두선이든 모두 삼매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입니다. 호숫가에 일렁이는 물결을 잠재우면 잠시 일었던 흙탕물도 제 스스로 가라앉고, 잠시 후 깊은 호수 속 아름다움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수행도 이와 같습니다. 자성만족일체공덕(自性滿足一切功德)이라 했습니다. 자성은 무량무변한 일체의 공덕을 원만구비하였다는 뜻인데, 자성을 철견하면 누구든 부처의 경지, 여래지위에 오를 수 있다 했습니다.”

방편은 물을 수 있지만 궁극의 낙처는 결국 스스로 깨달아야 찾을 수 있다는 뜻의 다름 아니다. 서산대사도 “우습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하지 않았던가. 백졸 스님은 가피의 의미를 잘 새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전했다.

“기도, 주력, 염불, 참선, 위빠사나 등 그 어떤 수행이든 그에 따른 가피는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의 가피는 깨달음이요, 니르바나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시적 현상의 이상 체험이나 신통력조차도 마장이라 한 연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한 이상 현상에 매몰되면 착각도인이 되거나 사이비로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자식 대학 합격기도 올렸으니 반드시 합격해야만 한다는 식의 거래적 가피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철 스님이 번역한 ‘원오심요’(1993년,  선림고경총서30, 장경각)가 세상에 나왔을 때 스님이 느꼈을 환희심이란 형언할 수 없었을 것만 같다.

“부처님께서 나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돈은 무엇이고 오는 무엇인지 명쾌하게 전하고 있으니,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나침반입니다. ‘오음과 십팔계 속에 갇히지 말고 새가 새장을 벗어난 듯 자유자재해야 한다’는 원오 스님의 한 마디에 저는 지금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혹 마음에 담아두고 가끔씩 꺼내보는 경구가 있는지 여쭈어 보니 “난, 아직도 공부가 안 끝나 정진 중이니 이 경구가 좋다”며 즉석에서 써 보인다.

‘팔면으로 영롱한 구슬처럼 빈틈없이 올바르고자 힘쓸 뿐’

백졸 스님뿐 아니라 불자라면 누구나 새겨야 할 일언이다. 원오극근 선사가 ‘법왕(法王)의 충장로(沖長老)에게 드리는 글’의 한 대목을 보자.

‘옛 스님들은 8면으로 영롱한 구슬처럼 빈틈없고 올바르고자 힘썼을 뿐입니다. 안으로는 자기 행실이 얼음장이나 옥처럼 청결하고, 밖으로는 방편을 원만하게 통달해 뭇 유정들을 보살펴서 마치 방죽의 못물처럼 서로 잘 돌이켜 베풀도록 하였습니다.’

불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부탁하자 ‘요고등금(耀古騰今)’을 전했다. 옛적에도 빛나고 지금도 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옥천사 떠나는 길목에서 다시 한 번 일주문 주련을 새겨 보았다. 문수관음의 눈과 귀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요고등금’에 계합할 듯싶다. 겨울바람이 다시 한 번 일주문 두 기둥 사이로 불어오며 ‘마음은 본래 고요한 것’이라는 현수막을 흔들고 지나간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1273호 / 2014년 12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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