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있다·없다란 생각
23. 있다·없다란 생각
  • 혜국 스님
  • 승인 2014.12.08 17: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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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은 하나, 환경오염의 원인은 인간의 정신오염”

▲ 둔황입구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혜국 스님과 한국의 불자들.

“약불여차(若不如此)인덴 불필수수(不必須守)니라, 만약 이 같지 않는다면 지켜선 안되느니라.”

만약 우주나 자연에게도
있다·없다·좋다·싫다 등
분별 망상이 있었다면
인간은 지구에서 추방됐을 것

부처님 가르침도 이와같아
마음이라는 불성이 없다면
번뇌가 나올 수가 없으며
번뇌가 없다면 불성도 없어

이 구절에서 지킬 게 있다면 “머물러 있다”는 말인데 머물 수 있다면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지키고 지키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킬 수 있거나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독립성이 있다면 이미 도(道)가 아니고 모양이 있는 상법이니까요. 가없는 허공을 나누어서 지키거나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킬게 있다면 위에서 말하는 “이와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있고 없음이 둘 아닌 법이 아니면 결코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모양이 없는 허공에는 의지함이 없이 의지하기에 의지할 수 있지만 시시각각 변해가는, 모양 있는 세계는 의지할 수도 없거니와 지킬 수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 있지만 법에는 옛과 지금이 없다고 하신 겁니다. 있고 없음이 둘이 아니요 예와 지금이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고준한 스승이 말씀하시기를 “있다, 없다의 생각이 끊어지고 색과 공도 다했으니 대낮에 도둑이 장물을 가져다 바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철두철미한 가르침을 생각하면 이런 글 쓰는 것 자체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가를 치르지 않고 받는 것이 귀한 줄을 모릅니다. ‘신심명’ 첫 구절에 나오는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하는 구절에 지금까지 일 년 동안 썼던 내용이 모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바로 깨달으면 아무런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닫거나 직접 그 자리에서 참구수행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다못해 이런 글이라도 읽는 대가를 치르던지 법문을 듣는 상법을 통해서야 겨우 마음을 내고 발심을 하게 됩니다.

“지도무난이요, 유혐간택이니”할 때 지도와 유혐간택은 둘이 아닙니다. 간택이 없으면 그냥 지극한 도라고, 스승들마다 그렇게 간절하고도 지극하게 보여주셨는데도 우리는 그 엄청난 가르침까지도 알음알이 지식으로 저장시킵니다. 그러니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장된 업식을 다시 비워야 하는 대가를요. 중생들은 대가없는 진리의 고마움을 너무 모릅니다.

기실 공기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공기 없이는 어느 생명체도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공기의 고마움을 실감하지 못하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정작 공기 자체는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나 고마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꼭 같이 마실 수 있게 합니다. 고맙다 아니다 즉, 있다 없다가 둘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의 고마움이요 대자비인 겁니다.

  이러한 대자비는 육안이라는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보는 나와 보이는 상대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대자비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대가를 치러야 받는 걸로 착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본인이 대가를 치르니 대가를 바랄 수밖에 없겠지요. 이것이 중생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세계 즉, 모양 있는 상법의 한계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고집하니까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나 귀를 통해서 상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 그에 따른 감동이나 감정이 일어나거든요. 그 감동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눈이나 귀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허공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 법문에 “사대(四大)로 된 이 몸이 법문을 듣는 게 아니요, 허공 또한 보고 듣는 게 아니다. 법문을 청하고 역력하게 법문을 들을 줄 아는 놈이 과연 누구인가”라고 하셨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땅을 짚고 일어서는 도리입니다.

다음은 “일즉일체(一卽一切)요 일체즉일(一切卽一)이니,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라고 이어집니다.

이 몸이 법문을 듣는 게 아니라면 이 몸을 떠나서 들으면 가능하겠습니까? 그 또한 아니거든요. 그래서 일체가 하나라고 하신 가르침이 대자비인 겁니다. 왜냐하면 ‘道’(도)란 편법이 통하는 세계가 아니고 그냥 존재하는 것, 그 자체이니까요. 우리가 본다고 하는 것은 보는 자와 보이는 사물에 거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거리가 전혀 없다면 본다는 말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려고 하는 생각조차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가 자신의 눈을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보지 못하듯이 거리가 없는 세계는 있다 없다 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곧 일체라고 하신 말씀이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걸어 다니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왼발과 오른발이 하나가 되어야만 걸음을 걸을 수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들 육안으로 볼 때는 왼발 다르고 오른발 다르지만 발을 움직이는 에너지 입장에서는 왼발이나 오른발이나 모두 같은 에너지가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그 에너지는 어느 누구 개인의 에너지가 아닙니다. 대지에서 나오는 음식이나 과일 또는 공기와 물이 우리 몸에 모여서 생겨나는 만큼 우주 자연과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에너지에 어찌 이쪽이다 저쪽이다 경계가 있을 수 있으며 네 것과 내 것이 있겠습니까? 분명히 우주 자연의 에너지이건만 사람들이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부터 동양에서는 그러한 에너지를 ‘기’(氣)라고 하여 모든 것을 전체로 아울러서 보려고 했고 서양에서는 따로따로 분리해서 세분화의 길을 걸어온 걸로 보입니다. 그렇게 세분화해서 분석하다보니 어느 한 부분에서는 통하는데 전체에서 보면 막히게 되는 겁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이 총체적인 어려움 속에서 힘겨워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21세기에 가장 큰 문제라고 하는 환경문제를 예로 들어 봅시다. 따로따로 분리하는 안목에서 보면 환경오염이라는 환경이 따로 존재하는 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체로 보는 입장에서는 환경과 인간은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정신오염이 없다면 환경오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정신오염이 먼저 해결되어야 환경오염 문제도 해결 될 텐데 정신오염을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그림자인 환경오염을 따로 해결하려니 더욱 어렵게 됩니다. 반면 선사 스님들은 애당초 전체와 부분을 둘로 보지 않았습니다. 양변을 모두 포용하고 양변을 초월하는 직관의 세계 즉 중도의 길을 보여주시려고 했을 뿐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소식일 뿐 한 생각 일어나면 이미 그르쳤다고, 바로 보여주셨거든요. 그러니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하나일밖에 없는 겁니다.

“단능여시(但能如是)하면 하려불필(何慮不畢)이라,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무엇을 걱정하랴.”

여기에서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이라는 이 소식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무슨 설명을 해도 설명할수록 본질과는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길이 끊어진 소식이요 마음 길이 멸한 자리이니까요. 그래서 신심명 첫 구절에서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고 하신 겁니다. 다만 몰록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만 놓으면 바로 “이와 같이”라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이나 미움은 ‘증애심’만이 아니라 모든 시비분별이나 일체의 ‘사량’을 말함입니다. 그래서 선어록에서는 “만약 참선을 하고자 한다면 말이나 모든 생각에 일체 속지 말아야 한다. 오직 화두를 참구하되 생각생각 끊어지지 않게 정진하라. 행주좌와 그 어느 때나 항상 눈앞에 역력하게 부여잡고 놓지말라. 금강과 같은 발원과 태산 같은 의지로 한 생각이 만년에 이어지도록 하라”고 경책하고 있습니다. 도란 즉, 진리란 사랑하고 미워함 그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이니 미움이니 하는 말은 나와 남을 분별하는데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낸 단어일 뿐입니다. 우주자연은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보리를 심으면 그냥 보리가 납니다. 만약 우주 자연에 사랑과 미움이 있다면 아마도 인간들은 벌써 추방당했을 겁니다. 진리에는 선과 악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가 생겨나는 것이겠지요. 진리가 그러하니 절에서 아침저녁 울리는 범종소리도 사랑하는 이나 미워하는 이나 꼭 같이 울립니다. 종소리에 차별이 없을 뿐 아니라 종과 종소리 또한 둘이 아닙니다. 종이 없으면 종소리 또한 없으니 종에 이미 종소리가 같이 있으니까요. 종은 종소리에 걸리지 않고 종소리는 종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이 없으면 종소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종소리 없는 종은 종이 아닙니다.

학문적으로 얘기하자면 마음이라는 불성이 없이 번뇌가 나올 수가 없고 번뇌가 없으면 불성의 작용 또한 없습니다. 둘이면서 둘이 아니고 둘 아니면서 또한 둘이 됩니다. 이러한 연고로 번뇌와 보리도 서로 걸리지 않습니다. 종소리가 종에서 나오듯이 번뇌도 보리에서 나옵니다. 꼭 같은 불성이건만 깨달으면 보리요 미하면 번뇌인 겁니다. 결국 깨달음으로 가는 것도 나요 미한 쪽으로 가는 것도 나입니다. 그런데 번뇌 따라 내려가는 길은 쉽게 생각됩니다. 익힌 습관을 따라가는 길이니까요. 그러나 습관 즉, 업을 고쳐나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처럼 어렵게 느껴집니다. 물론 올라가는 길, 정진이 익은 사람은 올라가는 길에 더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되겠지요. 무르익으면 무엇이든 쉽게 느껴지니까요. 그러니까 결국 깨어있으면 보리요 잠들어 있으면 번뇌입니다. 그러나 올라가는 길도 내려가는 길도 둘 다 꿈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꿈에서 깨어나면 꿈은 없는 것이니까요. 이미 꿈이 없다면 꿈속 얘기가 나오겠습니까? 그러한 까닭에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무엇을 걱정하겠느냐고 하신 겁니다. 

 

[1273호 / 2014년 12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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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 합장 2014-12-17 12:20:16
부처님 부처님 사랑합니다
만유에 두루하신 부처님은혜
우리들 두손 모아 예불드리리()

불자 2014-12-15 20:27:19
“만약 참선을 하고자 한다면 말이나 모든 생각에 일체 속지 말아야 한다.
오직 화두를 참구하되 생각생각 끊어지지 않게 정진하라.
행주좌와 그 어느 때나 항상 눈앞에 역력하게 부여잡고 놓지말라.
금강과 같은 발원과 태산 같은 의지로 한 생각이 만년에 이어지도록 하라."

항상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