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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자

망년회의 시절이다. 가는 해를 잊어버리자는 연락들이 도처에서 날아와 캘린더에 화살처럼 박힌다. 시간의 가장 신비한 점은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지 결코 그 반대로 흐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의 화살(Arrow of Time)’이다. 과학자들은 시간이 약 140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 때 공간이 함께 생겨나 우리의 우주가 탄생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통일체인 시공간(spacetime)의 다른 속성임을 밝혔다. 시간의 화살은 우주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볼츠만이 정의한 엔트로피(entropy)가 점차 증가하는 방향으로 우주가 변화했다고 한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우주가 불균질한 상태에서 더욱 균질한 상태로, 차별 있는 상태에서 더욱 무차별의 상태로 진화했다는 말이다.

한 친구가 나에게 금강경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낸다 (應無所住 而生其心)’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두 사람이 대판 싸운 적이 있었는데 후에 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했을 때 다툰 일에 얽매이지 않고 도와주는 것과 같다고 대답했다. 즉 지나간 일을 잊어버리고 살라는 말이다.

과거는 이미 사라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붙잡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이 찰나의 극히 짧은 순간 이전은 이미 과거가 되고 만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그 또한 붙잡을 수 없다. 현재는 사라져버린 과거와 다가오지 않은 미래와의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의 틈에 무엇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것이 금강경의 ‘과거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붙잡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의 소식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지난 일들을 철저히 잊어버린다면 마음이 의지할 근거가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모든 일에서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낼 수 있다. 이것이 잊어버림의 무한한 공덕이다. 잊어버릴 때 우리는 아무것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낼 수 있고 금강경에서 설한 무량한 공덕을 실천할 수 있다. 연말에 갖는 망년회의 깊은 뜻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리적 환경인 우주는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즉 차별이 있는 상태에서 차별이 없는 상태로 진화한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어떠한가?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 망상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남과 다른 내가 실재한다는 아상(我相) 때문에 남과 나를 차별하기 때문이다. 아상이 모든 분별하는 마음 즉 번뇌 망상의 뿌리이다. 중생이 차별하는 마음인 아상을 떨치지 않는 한 진리의 길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금강경은 끊임없이 아상을 버리라고 강조한다.

만약 우리가 지나간 모든 일을 잊어버릴 때 나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할까? 아무것도 아닌 무(無) 또는 공(空)이 될 것이다. 아상은 뿌리 채 뽑혀나가고 만물에 아무런 차별 없는 지복의 시공간만이 빛날 것이다. 신심명에서 ‘아무 것도 머물지 않으니 기억할 바 없도다. 허허로이 스스로 밝으니 애써 마음 쓸 바 없도다.(一切不留 無可記憶 虛明自照 不勞心力)’라 했다.

‘잊어버리기’에 금강경의 메시지가 온전히 담겨있다. 남과 나를 차별하는 아상을 버릴 때 정신세계의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영적인 진화가 일어난다. 올 세모의 건배사는 ‘잊어버리자!’로 하자. ‘시간의 화살’을 따라 모든 사연들을 잊어버리고 새해에 금강경의 무량한 공덕을 이 땅에 구현하자.

이기화 서울대 명예교수 kleepl@naver.com

[1274호 / 2014년 12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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