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6. 종단개혁을 보는 다른 시선-원두 스님

“민주화 앞세운 종단개혁, 승단의 세속화만 불러”

▲ 원두 스님은 “이제 승자와 패자의 관점에서 벗어나 불행했던 종단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1994년 멸빈자들을 사면해야 한다”며 “이는 서암 스님의 마지막 당부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1994년 종단개혁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제도개혁을 통해 종단을 혁신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종단개혁으로 승단의 세속화를 불러왔다는 비판도 있다. 전 원로회의 사무처장 원두 스님은 1994년 개혁회의가 추진한 종단개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개혁의 방법과 이념이 비불교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스님은 개혁회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결과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치유되지 않은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로부터 20년. 스님은 여전히 “오늘날 한국불교는 승단의 세속화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며 “이는 승가 전통법을 도외시하고 지나치게 세간의 법을 차용한 것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12월8일 서울 시내 한 찻집에서 스님을 만나 1994년 종단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종단개혁이 일어난 지 20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지냈나?
“지난 20년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나. 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다. 하나는 출가 이후의 삶을 정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1994년 사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개혁회의는 자신들의 관점에서 종단개혁을 기록했지만 왜곡된 부분이 많다. 후대에  종단개혁에 대한 바른 평가를 위해서라도 객관적인 자료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 개혁회의로부터 멸빈의 징계를 당했다. 당시 스님은 총무원 집행부도, 개인비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왜 징계를 받았다고 생각하나.
“난 개인욕심 때문에 원칙을 저버린 일이 없었다. 종단의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보다 어떤 것이 사실(원칙)이냐를 중요하게 여겼다. 원칙에 어긋난다면 개인 인연이나 문중의 이해관계를 떠나 잘못을 지적했다. 그렇다보니 알게 모르게 적이 많았다. 1994년 종단개혁 때도 그들(개혁세력)의 개혁방식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들 방식으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나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의현 총무원장을 비호했던 것은 아닌가.
“나는 범종추가 결성되기 전부터 의현 총무원장을 비판했던 사람이다. 중앙종회에서 의현 총무원장의 잘못을 지적했다가 총무원장실에서 불교신문 기자에게 폭행까지 당했다. 그런 사람을 비호할 이유가 있겠나. 다만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명분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힘이 있다고 총무원장을 강제로 끌어내리면 불행한 역사는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왜 물러나야 한다고 봤나.
“의현 총무원장의 개인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더 심각한 것은 도덕적 지탄을 받는 스님들을 집행부로 구성해 전면에 내세웠다. 종단이 곪아가기 시작했다. 1993년 11월 종단개혁위원회에서 개혁안을 제출했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 종단개혁위원회가 발표한 개혁안은 어떤 것이었나.
“1994년 개혁회의가 내세운 개혁안과는 달랐다. 개혁회의가 내세운 방식은 세속적 민주화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개혁안은 부처님 교법에 따른 것이었다. 승가 갈마법을 시행하고 율장에 의해 종단이 운영되는 것을 기본 토대로 삼았다. 종단 비상시에는 스님 350명과 재가자 150명이 포함된 ‘종단대표자 회의’를 구성해 화합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 당시 원로들은 어떤 반응이었나.
“원로 스님들도 의현 총무원장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 1993년 5월 원로들은 제주 천왕사에 모여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서명날인을 진행했다. 의현 총무원장이 장기집권을 통해 종단을 좌지우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종단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원로들의 입장이었다. 그해 10월 원로들은 영광 불갑사에서 다시 모여 의현 총무원장을 성토했다. 이것이 1994년 종단사태의 전주곡이었을 것이다.”

▶ 범종추 구종법회 이후 폭력사태가 발생하면서 종단혼란이 극심했다. 이 무렵 스님은 의현총무원장을 만나 사퇴서를 받았다고 들었다. 사퇴서는 어떻게 받았나.
“3월29~30일 폭력사태와 중앙종회의 3선 가결로 여론이 악화됐다. 4월1일 원로의원 혜암, 도견, 원담, 응담, 도천 스님이 대책마련을 위해 문경 봉암사로 모였다. 이날 저녁 무렵 의현 총무원장도 봉암사로 내려왔다. 봉암사 다리 위에서 의현 총무원장과 단 둘이 만났다. 그는 도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이미 원로들도 3선 반대와 사퇴를 요구하고 있음을 전했다. 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총무원장에서 물러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의현 총무원장은 그 자리에서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퇴 발표는 4월3일 오전 11시 서울 대각사에서 서암·혜암 스님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하기로 했다. 그는 약속대로 4월2일 측근을 통해 자신의 직인이 찍힌 사퇴서를 보내왔다.”

▶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 이후 어떻게 풀어갈 계획이었나.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와 동시에 서암 스님이 원로회의를 소집해 종단 상황을 수습할 계획이었다. 승가는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사회다. 일단 원로가 중심이 돼 종단을 안정시킨 뒤 ‘종단대표자회의’를 구성해 비상사태를 해결해 나가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종단의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개혁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 왜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를 발표하지 않았나.
“4월3일 오전 대각사 인근에서 범종추 소속 학인들에게 납치됐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의현 총무원장도, 서암 스님도 자취를 감췄다. 모든 계획이 일그러졌다. 그 일만 성사됐다면 종단이 폭력사태로 얼룩져 세간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까지 아쉬움이 남는다.”

▶ 납치한 사람들이 범종추 소속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납치한 3명 가운데 정야 스님이 있었다. 당시 정야 스님은 중앙승가대 부회장으로 범종추에 가입된 상태였다. 그는 훗날 사실을 인정하는 확인서를 써주기도 했다.”

▶ 범종추가 스님을 납치할 이유가 있었나.
“의현 총무원장이 사퇴하면 원로회의가 종단을 수습하도록 했다. 이후 개혁안대로 종도대표자회의를 구성해 종단의 비상사태를 해결할 계획이었다. 범종추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범종추가 의도하는 대로 종단을 운영할 수 있었겠나.”

▶ 4월5일 원로회의가 소집됐다. 그 때라도 공개할 수 있지 않았나.
“이날 회의는 종정과 원로의장을 겸직했던 서암 스님이 소집한 정식회의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를 발표하면 종단의 혼란만 가중될 것으로 판단했다. 의장 스님이 소집한 적법한 회의에서 발표하려고 했다.”

▶ 서암 스님이 승려대회 금지교시를 발표하도록 스님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말도 나왔다.
“서암 스님은 내가 말한다고 무조건 따를 분이 아니다. 서암 스님은 종단 혼란사태가 발생하자 3월30일부터 4월13일까지 읍소문과 3번의 교시를 발표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나와 상의를 하고 발표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그분의 판단에 따라 교시를 내렸다.”

▶ 서암 스님이 왜 승려대회 금지교시를 발표했다고 보나.
“서암 스님 역시 범종추의 개혁방식이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종단 분규사를 살펴보면 승려대회는 필연코 폭력이 유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종단의 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종단의 분열과 법통의 단절을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상황에서 이를 외면하고 있을 수 있었겠나.”

▶ 혜암 스님은 4월15일 중앙종회에 참석해 “서암 스님은 종단이 심각한 상황인데도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이 되지 않아 불신임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혜암 스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혜암 스님은 3월23일 원담, 응담, 도천 스님과 함께 수안보에서 서암 스님을 만나 종단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함께 논의했다. 심지어 중앙종회가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강행하면 인준을 거부하기로 결의까지 했다. 4월1일에도 혜암 스님은 서암 스님이 주석하는 봉암사에서 원로들과 만나 종단 수습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서암 스님은 봉암사 조실채에 계셨고, 혜암 스님과 원로들은 아랫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승려대회금지교시’가 발표된 4월9일에도 혜암 스님은 서암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날 총무원에서 열린 원로중진회의는 혜암 스님의 요청으로 소집된 회의였다. 서암 스님도 흔쾌히 참석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런데 하루 전날 밤 혜암 스님은 돌연 회의취소 통보를 하고 불참했다. 혜암 스님이 서암 스님을 만나려고 했다면 이때도 만날 수 있었다.”

▶ 스님은 5월23일 ‘개혁회의법 제정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곧 개혁회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왜 그랬나.
“4월15일 중앙종회가 해산하면서 종헌을 개정해 개혁회의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종헌을 개정하면 일단 공포를 해야 효력을 갖는다. 그런데 중앙종회는 공포되지 않은 종헌을 바탕으로 개혁회의법까지 제정했다. 이렇게 되면 법적 시비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적법성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종단 내부에서는 이를 확인해 줄 기관이 없었다. 사회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 결국 그 일로 징계에 회부됐다. 징계에 앞서 호법부의 등원요청을 거부했고, 초심호계원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직접 소명할 필요는 없었나.
“범종추는 나를 납치 감금한 전력이 있었다. 4월15일에도 중앙종회에 참석했다가 조계사 밖에서 학인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했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들은 이미 나를 징계하겠다는 뜻이 확고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가서 뭐라 말한들 저들이 들어줬겠나.”

▶ 징계절차가 진행되는 도중 스님은 소송을 취하했다. 이 사실을 개혁회의 측에 알렸으면 징계의 수위가 낮아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난 개혁회의법의 적법성을 확인 받기 위해 소송을 한 것이지 개혁회의와 종권다툼을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장기화되면 종권다툼으로 비화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소송을 취하했다. 재심호계원에 있었던 스님 가운데 몇 분이 이 소식을 듣고, 소송 취하서를 보내면 징계를 낮춰줄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징계를 피하려고 소송을 취하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 의현 총무원장을 도왔던 많은 스님들이 개혁회의에 동조하면서 징계에서 벗어났다. 스님도 개혁회의와 타협할 수는 없었나.
“난 이제껏 살아오면서 개인 욕심을 가져본 일이 없다. 큰 사찰의 주지를 맡아본 적도 별로 없다. 개인 욕심이 있었다면 그들과 타협했을지는 몰라도 난 그렇게 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개혁회의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비록 개혁회의를 조계종의 대표기구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분열한 또 다른 승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서암 스님에게 치욕을 안기고 나를 납치하는 등 개혁과정에서 나타난 비승가적 행위에 대해 개혁세력들이 진심으로 참회했다면 저들을 도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종단개혁을 어떻게 평가하나.
“종단개혁은 당시 종단 현실에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종단개혁은 일반 사회의 방식과는 달라야 한다. 개혁회의는 민주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민주화는 승단의 전통질서와 맞지 않다. 부처님은 이미 2500년 전 승가의 갈마법을 통해 승단을 운영하도록 했다. 갈마의 기본정신은 여법과 화합이다. 어렵더라도 이 전통을 지켜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개혁회의는 사회 민주화의 개념을 승단에 도입했다. 어떻게 됐나. 권력을 두고 끊임없는 갈등이 발생하고 승단의 위계질서가 훼손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개혁회의가 진행한 종단개혁은 승단의 세속화만 부르고 말았다.”

▶ 1994년 멸빈자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나.
“1994년 멸빈자들은 모두 사면돼야 한다. 어찌됐든 20년의 세월이 지났다. 승자와 패자의 관점에서 벗어나 불행했던 종단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서로 용서하고 화합해야 한다고 본다.”

▶ 사면복권을 원하나.
“개인적인 입장은 훗날 밝힐 것이다. 다만 나는 1994년 멸빈자들을 사면 복권시켜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서암 스님은 마지막까지 1994년 멸빈자들이 사면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으셨다. 스님을 모셨던 사람으로서 어떤 역경이 오더라도 멸빈자들의 사면복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 종단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국불교사를 바르게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의 법정을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 그것을 위해 지난 20년간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 왔다. 그날이 오면 내가 제일 먼저 증언대에 오를 것이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74호 / 2014년 12월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