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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달마야 놀자’ [끝]

기자명 정장진

종교·사회적 상징성 띤 폭력…인간 심성 속에 늘 존재

글을 연재한 지 1년이 지나, 이제 붓을 놓을 때가 되었다. 2014년은 글을 쓰는 필자 입장에서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귀한 시간이었고, 무엇보다 불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시간이었다. 글을 실어주신 ‘법보신문’ 관계자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달마야 놀자’서 등장한 조폭은
수많은 영화에서 다뤘던 이야기
소재로 활용된 주먹 세계 폭력
사회·정치 문맥 간과돼 아쉬워

영화처럼 컬러풀한 인생에서
외려 무채색이 더 빛나 보여

“일반 영화를 불자의 관점에서 읽어 달라….” 거의 매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말하자면 필자는 24편의 영화를 다루며 ‘달마야 놀자’식의 글 밖에는 쓸 수가 없었다. 못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는 감사를 드려야 하겠지만, 어디 숨을 곳이라도 없나 고개를 들 수가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혹여 불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눈에 거슬리는 어휘나 무모한 불교 해석은 없었는지,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할 말은 조금 있다. 영화가 대중예술이고 산업이며 이제 겨우 태어난 지 100여년 정도 되었다. 불교로 말하기 어려운 영화를 보면서 다시 영화와 불교를 함께 이야기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을 변명 삼을 수 있다. 영화가 장르 자체의 미천한 역사와 한계로 인해 심오한 불교의 세계를 다루기가 정말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 스님과 조직폭력배의 의기투합 설정이 사회적 의미로는 확대되지 못했다.

속편 ‘달마야 서울 가자’로 이어졌던 ‘달마야 놀자’는 좋은 영화도 나쁜 영화도 아니다. 영화이기에 불교를 저런 식으로 다루어도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지만, 같은 이유로 영화와 불교의 서로 어울리기 힘든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다. 거장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과 방송시간만 되면 거리를 텅 비게 만들었던 드라마 ‘모래시계’ 그리고 영화 ‘친구’로 이어지며 스크린을 조직폭력배로 가득 채운 한국의 지난 30년 현대 영화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달마야 놀자’는 지금 당장보다 추측하건대 문화사적 자료로서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질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짚어볼 수 있다.

우선 ‘달마야 놀자’는 불교와 조직폭력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주제를 섞어 놓은 썩 잘 만든 영화다. 무엇보다 서구에서 예수를 우스꽝스럽게 등장시킨 ‘올마이티’ 연작들인 ‘브루스 올마이티’와 노아의 방주를 코믹하게 패러디한 ‘에반 올마이티’류의 코미디 영화로 떨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높이 살 영화다. 게다가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라는 멋진 화두도 던졌다. 법당을 소제하다 불상을 넘어뜨려도 “그깟 부처님 상이 뭐 그리 중요해, 이놈들아!”라고 일갈하시던 스님 말씀도 역시 명언이었다.

두 번째로 특수 효과에 거의 의존하지 않은 종교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할리우드식 현란한 특수 효과에 힘입은 그리스 로마 신화나 기독교를 다룬 영화들 혹은 붕붕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국 영화들은 한국에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영화들이다. 한국 영화는 조폭과 불교를 연결시키면서 한국식 형식과 맥을 발견해 낸 것이다. ‘달마야 놀자’를 시작으로 언젠가는 이 형식과 맥이 다시 응용되고 한층 심화될 수 있을 것이다. 조폭이라는 주제는 지난 30년간 제작된 거의 모든 한국영화에 빼놓지 않고 등장했다. 배우 황정민의 신들린 듯한 연기가 돋보인 ‘신세계’가 정면으로 조폭을 다룬 영화라면 수보리가 잠깐 언급하기도 했던 ‘파파로티’나 ‘7번 방의 선물’에 이르기까지 조폭은 많은 영화에 감초처럼 끼어들었다.

하지만 폭력은 주먹과 어깨들의 전유물이 아닐 것이다. 폭력은 조폭을 통해 표현될 수 있지만 얼마든지 종교적, 사회적 상징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변호인’에서 다루고자 했던 것도, 지금도 그리고 언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정치적 폭력에 다름 아니다. 영화에서 조폭이라는 주제가 거머쥘 수 있는 상징성의 깊이에 따라 한국 영화에서 조폭은 얼마든지 종교적, 사회적 드라마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달마야 놀자’는 아직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이 많지만, 영화로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달마야 놀자’가 비판 받아야 한다면, 주먹 세계를 통해 확보해야 하는 폭력 그 자체의 상징성이 영화 속에서 조금이라도 심화되는 노력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사회적, 정치적 문맥이 거의 완전히 간과되었고, 기껏해야 조폭들 간에 두목 자리를 놓고 배신을 하다가 결판을 낸다는 것 이외에 조폭이 등장해야 할 이유를 달리 찾을 수가 없었다. 서로 다투던 스님들과 조폭들이 의기투합한다는 설정도 그 자체로는 흥미롭지만 사회적 의미로 확대되지 못했다. 따라서 산 속의 절이라는 공간은 조폭과의 극명한 대비 효과 이외에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폭력은 사실 마음속에 있고 사회 속에 있으며 역사 속에 있다.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인간 심성 속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과 사회의 구조나 정치적 경제적 메커니즘이 만들어내는 폭력 모두 주먹과 어깨들을 통해 비유되고 상징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부’를 잘 만든 영화로 상찬해 마지않는 이유도 이 마피아의 세계를 다룬 전형적인 조폭 영화가 인간 심성과 사회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폭력의 기미와 음습한 충동들의 연결고리를 손에 잡힐 듯이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폭력들이 군더더기 없이 묘사됨으로써 거의 아름다움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리고 있지 않았나. 형제도 신도 모두 부정되는 이 폭력의 미학은 역으로 폭력의 무서운 광기를 더 없이 잘 드러내는 하나의 철학이자 기법이었다. 그래서 특수효과 같은 것이 거의 필요 없었던 것이다. ‘친구’와 ‘신세계’가 이 경지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한국 영화들일 것이다.

어줍지 않게 불교를 다른 주제들과 버무려 놓아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다. 단순히 대비효과를 위해서 동원된 사찰과 스님들 세계는 장식이나 관광자료 이상의 의미를 얻지 못한다. 영화 ‘달마야 놀자’에서 감독에게 몇 번 좋은 기회가 있었다. 이유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이 기회를 감독은 흘려보냈다. 그 중 하나가 뛰어난 배우 박신양(특히 눈빛)이 분한 주인공이 마을로 내려가 구멍가게에서 공중전화를 거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조폭 부두목인 주인공은 전화를 걸다가 우연히 가게 유리창에 붙은 경찰의 현상수배범 사진을 본다. 영화의 앞과 뒤, 스토리 전개의 인과관계를 이어주는 장치에 그치다 보니 이 멋진 장면을 거의 활용하지 못했다.

▲ 쉰들러 리스트’는 단 10초 등장하는 붉은 색을 위해 3시간9분50초를 버렸다.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1994)’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 영화가 흑백 영화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3시간10분짜리 긴 흑백 영화에서 단 한 번 붉은 색 겉옷을 걸친 소녀가 등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10초의 컬러를 위해 나머지 시간을 흑백으로 처리한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예를 들어보자. 스페인 내전 당시 민간 마을을 폭격한 무자비한 독일공습을 고발하는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년作)’ 역시 흑백의 무채색만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이 두 편의 작품들은 왜 흑백으로 제작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굳이 답을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이미지들이다. 영화는 한 폭의 회화인 것이며, 마찬가지로 한 폭의 회화도 얼마든지 영화가 될 수 있다. 색을 앗아가 버린 폭력, 조직 폭력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종말론적 폭력 앞에서 모든 색은 무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달마야 놀자’에서 현상수배 사진은 이 가능성들을 제공할 수 있는  멋진 기회였다.

영화를 만들려고만 하지 말고 회화처럼 그리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때 ‘레옹’에서처럼 아글레오네마가 필 것이고, 노란 풍선처럼 ‘7번 방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며, 또 ‘포레스트 검프’에서처럼 인생과 세계 전체의 돌고 도는 업보가 푸른 하늘에 새의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를 것이다. 호랑이를 타고 난파를 당해야 한다. 언제든지 감독을 잡아먹을 수 있는, 따라서 정신 차리지 않았다가는 관객들도 잡아먹을 수 있는 호랑이를 영화라는 배에 태워야 하는 것이다. 영화는 올마이티, 즉 전지전능의 장르가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신의 세계는 영화에 담을 수가 없다. 영화는 고작 그 낌새 정도만 풍길 수 있다. 그러나 이 한계는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의 한계이기도 하다. 우리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신파극의 주인공들처럼 살며, 모든 것이 컬러풀한 세계에 사는가. 하지만 불교는 그리고 잘 만든 영화와 명작 회화는 무채색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단 10초의 붉은 색을 위해 3시간9분50초를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서양 예술가들이 동양의 선 사상에 눈 떴을 때 받아들이기 시작한 회화가 추상회화다. 거의 대중적인 예술가가 되어버린 사람만 들어도, 몬드리안, 칸딘스키, 잭슨 폴록 등이 모두 신지학(神智學)에 골몰한 사람들이라면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평생 검은색 그림만 그린 술라주와 선에 경도된 로드코…. 불교든 기독교든 ‘브루스 올마이티’나 ‘에반 올마이티’식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신성모독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신성모독인데, 따로 신성모독 운운할 필요도 없다. 일상의 논리로는 접근 불가능한, 호랑이와 함께 난파를 당한지도 모르고 있다가 호랑이 이빨이 허벅지에 박혀야 겨우 보이는 그 세계를 말하기에 영화는 참으로 부족하다.

영화에는 추상회화란 없다. 그래서 상징과 우의가 요구되며 때론 흑백으로 때론 조폭을 섞기도 하고 또 때론 바보를 등장시키거나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역설을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 영화도 같은 방식으로 봐야 한다. 삼존불 따로 보고, ‘동막골’에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포탄을 대신 맞으며 껄껄거리며 웃고 있는 세 군인을 따로 봐서는 영화는 그 한계만을 드러낼 뿐이다. 영화는 또 음악처럼 연주해야 한다. 좋은 악기와 마음 깊은 연주자를 만나면 같은 악보라도 얼마나 큰 차이를 보여주는가. 경전도 마찬가지 아닌가. 영화를 연주하자.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귀에 들린다. 영화를 조금 더 강하게 연주하면, 로봇 속에 숨어있던 키팅 선생의 음성도 들린다. 영화를 남기고 떠난 로빈 윌리엄스도 만난다. 스크린에 어른거리는 환영 속에서.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75호 / 2014년 12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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