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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언덕 너머로

기자명 김택근

가야산 호령하던 호랑이, 스스로 낸 길 따라 영원의 세계에 들다

▲ 1993년 11월10일 성철 스님의 다비식이 열리던 날, 전국에서 20만 명 인파가 운집해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노승이 언덕을 건너가고 있었다.

해인사의 아침은 맑고 고요했다. 새소리만 퇴설당 작은 마당에 떨어졌다. 성철은 제자 원택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몸은 무척 가벼웠다. 제자는 스승의 작은 숨소리에 제 숨소리를 포갰다.

1993년 11월4일, 입적하자
전국서 조문객들 발길 이어
가을비 속 하루 2만 명 찾아

다비식 날 2000여개 만장과
500여명 스님 행렬 뒤 따라
오열하는 중생들 남겨둔 채
한 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져

아침공양을 마친 스님 몇이서 마당을 쓸고 있었다. 비질은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낙엽을 모아 태우며 연기가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오늘 ‘가야산 호랑이’가 저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몰랐다. 성철이 백련암에 올라 포효하면 가야산이 울었다. 그 일렁임과 그 울음은 어디로 스며들 것인가. 불생불멸이지만 빈 하늘은 쓸쓸했다. 비질을 멈추고 퇴설당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막 생겨난 햇살이 스님의 맑은 얼굴에서 경건하게 부서졌다.

성철의 숨소리가 가늘어지더니 이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원택이 코밑에 손을 대봤다. 퇴옹(退翁)이, 물러난 늙은이가 다시 세상 밖으로 물러났다. 태어난 지 81년, 산문에 든 지 58년 만이었다. 1993년 11월4일 아침 7시30분, 원택과 시자 셋이서 이를 지켰다.

퇴설당은 원래 선방으로 가야산 해인사를 상징하는 수행의 요람이었다. 퇴설당에서 시작된 성철의 수행은 퇴설당에서 끝났다. 집 떠나와 퇴설당에 들어 삭발을 하고 영원히 사는 길을 찾더니, 이승의 마지막도 퇴설당에서 맞았다. 묻고 또 물어 스스로 낸 길을 따라 이제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리라. 조계종 종정 퇴옹 성철, 이른 봄날에 세상에 나왔다가 늦은 가을에 떠났다.

범종이 울렸다. 열반의 종소리가 가야산 구석구석에 퍼졌다. 108번의 울림은 느려서 더 무거웠고, 무심해서 더 슬펐다. 소리가 탁하거나 둔하지 않아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법당에서, 선방에서, 강원에서, 암자에서, 산등성이에서 종소리를 들었다. 누구는 기도를 올리고, 누구는 낙엽을 굽어보고, 누구는 하늘을 보았다.

“가야산 호랑이가 떠났구나.”

바람이 퇴설당 문짝을 잡아당겼다. 가야산 산봉우리도, 백련암을 지키는 키 큰 느티나무도, 경내의 불면석(佛面石)도 큰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종소리가 희로애락의 언덕을 넘어갔다.

108번을 울던 범종이 그치자 일순 시간이 멈췄다. 가야산 해인사는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성철은 무심하게 떠났지만 남은 자들은 유심하게 떠나보내야 했다. 주검은 새털처럼 가벼웠지만 죽음은 쇠처럼 무거웠다. 마른기침으로 경내의 정적을 걷어내며 스님들이 퇴설당으로 모여들었다. 법신은 퇴설당에 모시고 분향소는 궁현당에 차렸다. 원로스님과 상좌 20여 명이 영전을 지키고 문중제자 20여 명은 궁현당에서 조문객을 맞았다.

등산객들이 열반 소식을 듣고 분향소를 찾아와 엎드렸다. 오후에는 인근 마을에서 신도와 주민들이 일주문을 넘어왔다. 그저 기특한 일로 여겼는데 다음 날부터 놀랄 일이 벌어졌다. 전국에서 조문객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일주문에서 해인사 궁현당까지의 길은 추모 인파로 뒤덮였다. 해인사가 생긴 이래, 아니 가야산이 인간을 품은 이래 최대의 인파였다. 날마다 2만 명 이상의 조문객이 찾아들었다. 해인사 일대가 사람으로 뒤덮일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조문객 스스로가 엄청난 조문 열기에 놀랐다.

성철은 청정비구의 외길을 걸었다. 평생 누더기를 걸치고 진정한 무소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봉암사 결사를 통해 조사들이 걸었던 옛길을 찾아냈다. ‘10년 장좌불와(長坐不臥)’에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은 무량불사를 위한 수행이었다. 말씀을 얻겠다고 백련암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누구나 삼천배를 시켰다. 감투와 돈 보따리는 가야산 소나무에 걸쳐두고 몸만 올라오라 했다. 성철 자신을 보지 말고 부처를 보라고 했다. 산중에 있음이 만 리 밖에 있음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떠난 뒤에야 알았다. 새삼 성철의 남긴 말이 공명을 일으켰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 몰래 남을 도웁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한사코 마다했지만 종정이란 고깔모자를 써야 했다. 그러면서도 구도 정진과 청정 계행을 멈추지 않았다. ‘산속의 종정’은 한국불교와 수행종단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11월6, 7일 이틀 동안 가을비가 내렸다. 가을 끝을 장식하고 있던 단풍잎들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빗속에도 조문객은 끊이지 않았다. 해인사는 회색과 검정색으로 물들었다. 어디서 왔는지, 여신도 한 무리가 퇴설당 문밖에 엎드려 길게 울었다. 또 더러는 큰절 해인사에서 백련암까지 성철이 오르내렸던 오솔길을 짐짓 뒷짐을 지고 걸었다.

혜춘 노스님은 경내 귀퉁이에서 비닐 거적을 깔고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성철은 특히 혜춘에게 엄했다. 공부에 진척이 없다며 수행처 천제굴을 찾아온 혜춘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주장자로 내리쳤다. 성철의 “일러보라”는 추궁에 답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스승이 떠나가고 있었다. 이제 누가 비구니 노승을 경책하며 지켜줄 것인가. 낙엽이 뒹구는 거적 옆에는 혜춘 스님의 헤진 털신이 놓여있었다. 스승도 헤진 고무신 한 켤레를 남겼고, 제자도 떨어진 신 한 켤레 남기고 뒤를 따르리라. 사람들은 차마 그 광경을 바로보지 못했다.

입관식은 산중 큰 스님들과 제자들이 지켜봤다. 평생 검소하게 살다간 성철의 삶을 헤아려 법구에 삼베 가사, 장삼을 입혔다. 해인사 목수간에서 만들어진 관은 가야산에 자생하는 붉은 소나무가 쓰였다. 처음 해인사를 찾아갈 때 성철을 지켜보던 바로 그 소나무들이었다.

11월10일, 다비식 날이 밝았다. 아침 7시55분 퇴설당 문이 열렸다. 전국 선방 대표 20여 명이 법구를 모시고 나왔다. 그날따라 퇴설당 문이 유독 비좁아 보였다. 스님, 신도들이 일제히 “석가모니불”을 정근했다. 스님 500여 명이 두 줄로 도열해 있고, 그 사이로 법구가 지나갔다. 대적광전에서 학사대, 다시 범종각을 지났다. 붉은 만장과 영정을 앞세우고 법구를 해인사 구광루 앞마당으로 모셨다. 영결식은 오전 11시에 열렸다.

말짱했던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찬비는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적셨다. 범종이 다섯 번 울렸다. 종소리가 남은 자들 가슴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오열하는 스님들, 땅을 치는 신도들.

삼귀의, 영결법요, 행장소개, 추도묵념, 육성법문 듣기, 영결사, 추도사, 조사, 조가, 헌화, 분향, 문중대표 인사, 사홍서원, 그리고 폐식.

가야산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평생 누더기만 걸쳤던 성철이 비로소 만 송이 국화로 뒤덮인 법구차에 실렸다. 다비장은 절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성철의 영정이 앞서고 2000여 개의 만장이 뒤를 따랐다. 법구차 뒤로는 사람의 행렬이 끝도 없이 뒤따랐다. 선두 행렬이 다비장에 도착했음에도 영결식장 해인사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비식을 보러 달려오던 차량들도 88고속도로 고령 나들목에서부터 밀리기 시작하여 해인사 진입로부터는 오지도 가지도 못했다. 모두 내려서 걸어야 했다. 빠른 걸음으로 서너 시간이 걸렸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성철은 생전에도 친견하기 어려웠지만 사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헤아리지는 못했지만 그날 해인사를 찾은 인파는 20만 명이 넘었다.

다비장 주변 언덕과 숲 속에도 사람들이 빼곡히 박혀있었다. 온통 사람의 산이었다. 제법 나이 든 소나무들이 연화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사람들도, 만장들도, 나무들도 연화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다비장 한가운데는 거대한 연꽃 봉우리였다.

법구를 연화대 거푸집에 밀어 넣었다. 제자들이 장작으로 거푸집 입구를 막았다. 염불이 끝나고 종단 대표 스님들과 문도 스님들이 거화봉에 불을 붙였다.

“거화(擧火)”

일제히 연화대에 불을 붙였다. 오열과 염불소리가 산자락에 가득했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세 번을 외쳤다. 부슬비는 계속 내렸다. 누구는 “석가모니불”을 염하고 누구는 “아미타불”을 송(誦)했다. 수만 명의 입에서 나온 염과 송이 잠시 빗줄기를 밀어냈다. 연화대가 화염에 뒤덮였다. 고운 꽃들을 짓이기며 불길이 치솟았다. 연화대는 지수화풍의 몸을 태우는 화택(火宅)이었다.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一輪吐紅掛碧山)’

열반송의 마지막 구절이 그대로 펼쳐져 있는 듯했다.

‘육체는 헌 누더기, 진여자성(眞如自性)은 본래 청정하여 나고 죽음이 없다.’

‘생사란 바다의 파도와 같다. 끝없는 바다에서 파도가 일었다 스러졌다 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태어났다 죽었다를 반복한다. 그렇다고 바다 자체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는 않는다. 우리의 생사 자체도 마찬가지다. 인간뿐 아니라 만물의 자체는 바다와 같이 넓고 가없어서 상주불멸, 불생불멸이다. 따라서 생과 사는 하나이지 둘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성철은 그리 일렀지만 어찌 슬프지 않을 것인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오열하는 이들의 눈물을 빗물이 씻기고 있었다.

“우리 스님을 어이 할꼬.”

연기가 피어올라 가야산 운무와 합쳐졌다. 번뇌 조각을 깨물고 있는 중생들을 두고, 그렇게 성철은 저 언덕을 넘어갔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76호 / 2015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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