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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화분에서 찾은 화엄만다라

기자명 함돈균

평소 알고 지내는 건축가선생님의 대학원 종강 수업에 초대되었다. 건축에 관해 문외한인 내가 초대에 응한 것은 그 수업의 특이성 때문이었다. 이 수업의 한 학기 테마는 ‘문화생태지도 그리기’였다. 한 학기 동안 그 학교가 속한 동네 구석구석을 수강생들이 답사하며 일반 행정지도가 파악하지 못하는 생활의 구체상을 발견하여 지도로 만들어 발표하는 수업이었다.

어떤 학생은 그 동네의 특징으로 화분에 주목했다. 발표를 보니 양상이 다양했다. 화분의 종류도 옆으로 길쭉한 화분, 깊숙하게 움푹 패인 화분, 스티로폼으로 만든 화분 등 다양했으며, 화분을 놓는 방식도 제각각이었다. 문 앞에 화분이 놓이기도 하고, 옥상에 놓이기도 하며, 길을 따라 골목에 놓이기도 했다. 어떤 학생의 발표는 빨래에 주목했다. 다세대와 다가구 중심 주택이 많고 가파른 산동네 지형으로 된 이 동네는 아파트처럼 실내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 수가 없어서 바깥에서 빨래를 볼 수 있는 풍경이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어떤 집은 길거리 한편에 빨래를 내걸기도 하고, 옥상에 내건 집도 있으며, 좁은 길목 한 가운데 공중에 빨래를 내걸기도 했다. 한 사진에 다섯 집의 빨래가 보이는 풍경도 있었다.

어떤 발표는 좁은 골목이 꼬불꼬불 이어지는 이 서민 동네에서 지형을 따라 절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주차 양상을 살폈으며, 어떤 발표는 마을버스의 길을 따라 마을버스를 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한 수강생은 그 동네에 있는 많은 카페들을 일일이 다니면서 카페가 끝나는 시간을 파악하고, 카페가 문을 닫은 후 밤거리 풍경을 사진으로 찍었다. 어떤 학생은 그 동네 건물들이 어떤 색깔들로 이루어졌는지 일일이 확인하여 동네의 ‘빛깔 지도’를 만들었다.

이 수업의 풍경은 내게 놀라울 정도의 신선함과 감동을 주었는데, 이는 우리 시대가 지닌 문제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과 통찰이 없다면 기획되기 어려운 종류의 수업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하게만 생각해 보아도 이 수업은 세계적인 IT강국으로 최첨단 정보사회라고 자부하는 한국, 나아가 현대의 역설적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컨대 스마트폰 지도검색 어플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공간에 대한 정보를 쉽게 소유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보지 않은 지구 저편 뉴욕 도심의 실시간 풍경도 간단히 확인할 수 있고 네비게이션으로 어디든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시대가 지금이다. 하지만 자기가 발 딛고 있는 동네의 구체적인 인간살이에 관해서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지리적 정보는 접근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지만, 공동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만들어가는 생활의 구체적 양상과 연관관계, 삶의 맥락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정도는 현저히 낮아지고 있다.

‘인문학’이 사회 트렌드가 되었지만, 우리 시대의 삶이 점점 더 팍팍해지고 사람들은 더 공격적으로 변해가며, 사회 모든 부문에 걸쳐 도덕적 불감증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는 여기저기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이를 인문학적 시선에서 본다면, 아마 자기가 발 딛고 있는 삶의 구체적 세부에 무지하며, 공동공간 속 타인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여 자기 시대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얄팍해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얼마간 이유가 있지 않을까. 용을 그리기보다 호랑이를 그리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흔히 ‘상상’이 어려울 것 같지만 ‘사실’을 파악하고 묘사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다. ‘사실’의 파악이란 작고 구체적인 지점에서 출발하는 일이다. 인문학이 ‘인간-삶’의 사실을 살피는 성찰적 학문이라고 한다면,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작은 것을 눈 여겨 보고 귀하게 여기는 학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교의 ‘화엄’에는 꽃잎 한 떨기에서 우주를 본다는 사상이 들어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신비한 종교적 비유로 들리기보다는 인문학적인 메타포로 들린다. 예컨대 건축학과 수업을 진행한 선생님은 ‘화분’과 ‘빨래’가 놓인 방식만 살펴보아도 그 동네 사람살이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그리고 과거의 시간에 닿아 있고, 현재의 서울과 한국의 모습을 반영하며, 나아가 현대적 삶의 한 양상이 포개져 있다는 점에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이 동네가 ‘우주’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새해에는 우리 눈에 이러한 인문적 시선이 깃들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husaing@naver.com

[1276호 / 2015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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