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원 몽산이 고려 이승휴에게
21. 원 몽산이 고려 이승휴에게
  • 이재형 기자
  • 승인 2015.01.0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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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는 천지의 온갖 의심을 다 깨뜨릴 것이외다”

충렬왕 정책 비판한 이승휴
파면 당한 후 두타산 은거
10년간 방대한 불경 탐독
‘제왕운기’ ‘내전록’도 집필

화두참구에 관심 가진 뒤
원 휴휴암 몽산에게 편지
몽산 “대장부 지기 갖췄다”
‘그는 누구인가’ 참구 권유

“정신이 깨끗하고 맑아 영명하고 날카로운 자는 회광(回光)이 한 번 비춤에 곧 밝게 깨칠 수 있소. 동안거사 사간(司諫) 이승휴께서는 대장부의 지기(志氣)를 갖춘 분이오.·… ‘석가와 미륵도 그의 종(奴)인데 그는 누구인가’를 화두 삼아 공부하시오. 크게 의심하면 반드시 크게 깨칠 것이나 의심이 없으면 끝내 깨치지 못할 것이오. 행여 의심이 무뎌질 때는 ‘생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지금의 목숨은 어디에 있으며, 생사가 닥칠 때에는 어떻게 해야 벗어나며, 죽어 어디로 가는가’를 떠올리시오. 이 4가지에 의심을 거듭하며 ‘그는 누구인가’를 화두로 삼아야하오.…그러면 천지의 의심이 다 깨지고 온갖 법이 원만하게 통해 밝아질 것이외다.”

1297년 8월7일, 서찰을 받아든 74살의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 1224~1300)는 깜짝 놀랐다. 이제는 원의 영토가 돼버린 강남지역 평강부(平江府)의 휴휴암(休休庵)에서 몽산덕이(夢山德異, 1231~1308?)가 직접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동안은 감격했다. 그는 이역만리에서 선지식이 보내온 글을 가슴에 새기듯 읽고 또 읽었다.

17년 전, 동안이 파직을 당해 삼척 두타산으로 돌아올 때만도 분노와 비애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제 더 이상 나라의 안위와 조정의 잘잘못을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수차례 다짐했다. 그러면서 마음을 붙인 것이 불경이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내전(內典, 佛經)에 천착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녹록치 않았다. 바쁜 업무에 밀려 한가함을 얻을 수 없었던 탓이다.

동안은 두타산 자락의 오래된 절터에 여생을 보낼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칩거에 들어갔다. 때마침 인근 삼화사(三和寺)에는 불경이 1천 상자나 있었다. 그는 삼화사에서 책을 빌려와 하나하나 독파해나갔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공부했다. 불경은 기묘하고 뛰어났으며 근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심오했다. 때로는 환희로웠으며, 때로는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측량하듯 아득하기만 했다.

동안은 밤낮으로 불경과 마주하며 10년 세월을 보냈다. 그는 불교를 신봉하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받드는 것이라 확신했다. 틈틈이 짬을 내 그는 단군 이래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체계화한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불교 전파 및 경전 번역의 역사를 수록한 불교역사서인 ‘내전록(內典錄)’도 펴낼 수 있었다.

그는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일가친척들이 모일 때면 자신이 지은 계문(誡文)을 들려주었다.

‘참을 인 한 글자는(忍之一字)/ 우리 집안의 묘약이지(吾家妙藥)/ 삼교의 성인이(三敎聖人)/ 이것을 닦아 깨달았네(修此而覺)’

1289년 10월, 동안은 10년 불경공부를 회향하던 날 용안당의 이름을 아예 간장사(看藏寺)로 바꾸었다. 소유하고 있던 토지도 간장사에 모두 희사했다. 그는 발원했다.

“주상 폐하께서는 만수무강하시고 자손들은 걸음걸음마다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기를….”

▲ 동안거사 이승휴가 머무르며 ‘제왕운기’ 등 명저를 남긴 두타산 천은사 내의 이승휴 사당. 삼척시 제공

동안이 화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10년간의 불경독송이 가져온 변화였다. 그는 숱한 선어록을 열람했다. 당송의 선문화를 이끌었던 활활자재한 선사들의 세계가 한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동안은 보조 지눌(1158~1210)의 ‘수심결’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등 국내 선사들의 뛰어난 저술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점점 간화선에 매료돼갔다.

동안이 몽산을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다. 동안은 간화선 수행을 결심하고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을 찾았다. 그때 선에 밝은 지인들이 소개해 준 인물이 몽산이었다. 그는 이미 선객들 사이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1290년대 초 고려불교계와 인연이 닿은 후 고려 승려들이 휴휴암에서 안거를 지내는가 하면 수선사 10세인 혜감국사 만항(萬恒, 1249~1319)과 일연의 법을 이은 보감국사 혼구(混丘, 1250~1322)도 몽산의 법을 찬탄했다. 특히 1296년에는 원에 입국한 충렬왕과 고위관리 10여명이 휴휴암을 찾아가 몽산의 법문을 직접 듣기도 했다.

동안은 지인들로부터 몽산에 대한 많은 얘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몽골과의 항전에 적극 참여했던 지사라거나 혹은 임제종 적통을 계승한 선승이자 남송의 마지막 군사(軍師)라고도 했다. 실제 몽산은 남송을 정복한 원나라 승상 백안(伯顔)이 그를 큰 사찰 주지로 삼겠다는 걸 완강히 거절했으며, 남송이 망한 뒤에도 원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을 때도 잦았다. 몽산이 대륙의 새로운 패권자인 원에 순응하지 않았고, 생사를 넘나드는 혹독한 수행으로 깨달음을 이뤘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몽산은 전란의 시대를 살다 갔다. 1234년 북중국을 장악한 몽골은 몽산이 22살 되던 1253년 남송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으며, 그가 48살 되던 1279년 남송이 멸망하고 원이 들어섰다. 1231년, 강서성 서양(瑞陽)에서 태어난 그는 몽골에 대한 저항의식 속에서 성장했다. 몽산은 재능이 뛰어났지만 세간에 뜻은 없었다. 불연(佛緣)도 일찍 찾아왔다. 14살 때 어느 승려가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묻자 그는 죽암묘인(竹巖妙印)를 찾아가라고 했다. 죽암은 자신을 찾아온 어린 몽산에게 “이 일을 잊지 마라. 다시 찾아오는 때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몽산이 휴휴암에 정착하기 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운서주굉(1535~1615)의 ‘선관책진(禪關策進)’에는 몽산이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1264년 6월, 33살의 몽산이 독한 이질에 걸렸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 때 몽산은 병든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정성껏 향을 피우고 기도했다.

“지난 세월 지은 악업을 참회합니다. 이 목숨이 지금 다해 죽는다면 다음 생에는 속히 출가하기를 원하옵니다. 만약 병이 낫는다면 출가해 깨달음의 등불을 밝혀 후학들을 널리 구제하기를 서원합니다.”

그는 좌복에 앉아 화두에 들었다. 오래 전부터 참구해왔던 무자(無字)화두였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에도 그는 무섭도록 화두에 집중했다. 얼마 뒤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를 괴롭히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몽산은 그해 8월 출가했다.

산문에 든 뒤에도 몽산은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고섬여영(孤蟾如塋)으로부터 ‘승려가 죽으면 어느 곳으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즉답을 못한 몽산은 “확연히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35살 되던 1266년 3월, 좌선 도중 한 수좌가 향 상자를 떨어뜨리는 소리에 몽산은 홀연히 깨달았다. 그는 게송을 읊었다.

‘일어나 나갈 앞길은 막혔구나/ 있는 곳은 파도치는 물 위이어라/ 초탈한 옛 조주선사여/ 참 얼굴이 다만 이것이었구려.’

몽산은 설암, 퇴경, 허주, 석범 등 선사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깨달음을 일일이 점검했다.
문 : “이것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답 : “말한 바가 모두 다 진실을 가리킨다.”

문 : “남전이 고양이를 베어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답 : “배를 갈라 마음을 드러냄이다.”

문 : “조주가 짚신을 머리에 이고 나간 이유는 무엇인가?”
답 : “손과 다리로 함께 온통 드러냄이다.”

몽산은 누구와의 선문답에도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환산정응(皖山正凝)은 달랐다. 몽산이 자칫 알음알이의 병에 빠질 수 있음을 간파했다. 그가 몽산에게 물었다.

“‘광명이 고요하게 강의 모래만큼 많은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게송은 장졸수재(張拙秀才)가 지은 것이 아닌가?” 이에 몽산이 대답하려 하자 완산은 번개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순간 몽산의 모든 사량분별이 딱 멈춰버렸다. 몽산은 비로소 생로병사의 근원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꿈속에서조차 화두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1267년 봄, 들에서 돌아오는 돌층계 위에서 홀연히 의심이 풀리면서 몽산은 대오했다. 이제 삼계에서 그를 옭아맬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었다.

훗날 몽산은 법어에서 공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3년간 법답게 수행했는데도 견성하지 못한다면 이 산승이 대신해 지옥에 들어가리라.”

▲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보물 제768호.                                                     문화재청 제공

몽산은 강소성 전산(澱山)을 거쳐 소주 휴휴암이라는 작은 암자에 상주하며 대중들을 이끌었다. 때로는 서신으로도 정성껏 답변해주었다. 만년의 몽산은 자국민보다 고려인들과 교류가 잦았다. 승려들뿐 아니라 왕실인사와 고위관리들도 있었다. 그러나 몽산은 고려 조정에서 신념을 지키다 관직에서 쫓겨난 늙은 거사를 잊지 않았다. 동안거사 이승휴, 그는 비굴과 아첨의 시대에 꿋꿋이 기개를 지킬 줄 아는 대장부였다. 몽산이 동안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도 그의 대쪽 같은 성정 때문이었다.

동안도 절망의 시대를 살았다. 몽산처럼 그도 역사의 수레바퀴에 무기력하게 깔려있지는 앉았다. 1224년 경산 가리현에서 태어난 동안은 8살 되던 해 몽골의 침략을 겪었다. 중앙 관직에 진출한 부친 덕에 그는 11살 때 피란 수도 강화에서 학문을 익힐 수 있었다. 동안이 14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종조모 원씨에게 몸을 의탁해야 했다. 경제적인 궁핍으로 모친도 경산에서 친정인 삼척으로 돌아갔다. 동안은 학문의 끈을 놓지 않았다. 22살 때 국자감시를 통과하고 29살 때에는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청운의 꿈을 펼칠 기회를 얻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최자(崔滋, 1188~1260)도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했다.

과거에 급제한 동안은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으로 금의환향했다. 모친과 친척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했고, 그가 곧 큰일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모질었다. 몽골의 5차 침입으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모두 막혀버린 것이다. 동안은 삼척 요전산성(蓼田山城)에서 몽골군에 맞서 싸웠으며, 노모 봉양을 위해 직접 농사를 지었다. 온가족이 돌림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훗날 동안이 관청의 지나친 수탈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직접 탐관오리를 처벌했던 것도 이때의 궁핍한 경험에서 비롯했다.

그렇게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를 지지해주던 종조모와 최자가 세상을 떠났다. 과거에 급제한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 동안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41살 되던 해였다. 강화도에 들어간 그는 어렵게 하급관리직을 맡을 수 있었고, 때때로 벌어지는 누명도 꿋꿋이 견뎌냈다. 1273년 3월, 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찾아왔다.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돼 원나라에 입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쓴 표문이 원 세조와 관리들의 탄복을 받으며 일약 문장가로 주목받았다. 동안은 원에서의 활약으로 도병마녹사(都兵馬綠事)에 올랐다. 다음해에 다시 그는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다시 서장관이 되어 원에 입국했다. 왕위를 계승할 세자[충렬왕]도 동행했다. 원에 도착한 그는 세자를 설득해 고려가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황제에게 허락받도록 건의했다. 그 결과 “고려의 역대 임금이 정해 지켜온 것들은 하나라도 빠뜨려 잃지 말 것이며 옛 것에 따라 그대로 시행하라”는 원 세조의 조칙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감찰어사·사간 등을 맡으며 시정의 잘못을 15개조로 나눠 아뢨다. 뇌물을 받은 관리 7명은 탄핵했다. 그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원망을 넘어 모함과 비방을 일삼았고 그로인해 동안은 동주(東州, 철원)의 수령으로 좌천됐다. 그가 자신의 호를 ‘동안(動安)’이라 지은 것도 이때다.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으려면 누가 흔들더라도 마음을 편안히 하고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감찰직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복귀한 동안은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 그는 자신의 측근 세력만 키우는 왕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충렬왕이 덕으로 정치할 것도 간했다. 왕은 크게 분노했고 동안은 끝내 파직되고 말았다. 훗날 ‘고려사’ 편찬자는 이를 두고 ‘언로(言路)가 막혔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다시 삼척으로 돌아온 동안은 불법의 세계에 몰입했고, 화두참구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동안은 몽산이 답신을 하리라고는 그리 기대하지 않았다. 관직에서 쫓겨나 궁벽한 산골에 머무는 늙은 거사에게까지 일일이 답한 여력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몽산이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거기에는 동안이 어떻게 수행해야 화두를 깨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해 마치 무릎을 맞댄 듯 상세히 전하고 있었다. 동안을 더욱 감동시킨 것은 ‘동안거사 사간(司諫) 이승휴께서는 대장부의 지기(志氣)를 갖춘 분’이라는 구절이었다. 평생을 망국의 지사로서 임제종의 선사로서 살아왔던 몽산의 평가에서 동안은 자신이 인생역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위로할 수 있었다.

몽산은 편지에서 ‘석가와 미륵이 그의 종인데 그는 바로 누구인가’를 화두 삼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다보면 천지의 의심이 다 깨지고 온갖 법이 원만하게 통해 밝아진다는 것이다. 또 언어구사만 중시하는 구두선(口頭禪)을 경계하고, 조금 얻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니 항상 깨어있을 것을 당부했다.

이에 동안은 법어를 내려준 인천(人天)의 스승에 대한 감사의 글을 다시 보냈다.
“무릇 한 마디 말, 한 구절 글을 받더라도 상대방의 근기에 따르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옛 부처가 조사의 문에 들어가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써 낙으로 삼기 위해 다시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이어 처음 절하고 받는 날로부터 200일에 이르렀지만 관조가 용렬하고 마음이 들떠 공부에 진전이 없음을 털어놓았다. 그렇더라도 대종장(大宗匠)의 지중한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과 더불어 게송으로 몽산을 찬탄했다.

‘흙탕물 뒤집어쓰고 미숙한 근기 인도해주며/ 사종(四種)의 의심을 자세히 살펴보라 했네/ 눈썹을 치켜들 필요 없이 직접 목격하여/ 아침 향불 저녁 예불로 스승 삼으라 했네// 회광반조 그 공부는 원만하지 못하나/ 삼교가 한 근원임을 분명히 알겠네/ 끊임없이 탐색하며 저 언덕 왔다 갔다 하며/ 저 가풍의 막중한 은혜 갚기를 맹세했네.’

▲ ‘제왕운기’ 보물 제1091-2호.

동안이 조정의 관심을 다시 받은 것은 70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충렬왕의 뒤를 이을 세자[충선왕]가 개혁을 표방하면서 동안에 대해서도 새롭게 평가했다. 충렬왕에게 바쳤던 ‘제왕운기’도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세자의 주선으로 판각될 수 있었다. 1298년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동안에게 조정에 나와 줄 것을 거듭 청했다. 왕의 정성에 못 이겨 잠시 관직에 나아갔지만 75살의 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동안은 왕에게 거듭 물러날 수 있도록 요청했고 그해 8월 삼척으로 돌아와 2년 뒤 77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몽산은 평생 대중교화에 힘썼다. 그는 상례와 장례를 직접 주관함으로써 전란으로 죽어간 이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가혹한 현실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염불화두를 적극 보급하기도 했다.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시간을 가리지 말라. 혀는 움직이지 말고 마음은 맑게 하라. 염불하는 자신을 때때로 점검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라. ‘이 몸은 헛되고 임시로 빌린 것이라 오래지 않아 무너지리니 나는 그때 어디로 돌아가는가.’ 이와 같이 힘쓰기에 날과 달이 쌓이면 이 몸이 흩어지지 않고 곧바로 서방의 아미타불을 친견하리라. 천만번 정신을 차리고 용맹심을 발휘해 간단없이 공부하라. 자연히 고향집에 이를 시절이 있으리라. 게으르지 말라.”(몽상화상 염불화두법)

몽산은 중국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고려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덕이본 육조단경’ ‘법어약록(法語略錄)’ ‘몽산화상육도보설’ ‘제경촬요’ ‘몽산행실기’ ‘행적기’ ‘염불화두법’ ‘도덕경’ 등 그의 모든 저작이 국내에서 발견됐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무문관(無門關)’이 기본적인 선서(禪書)가 됐지만 고려와 조선에서는 ‘몽산법어’가 간화선의 지침이 됐다. 몽산의 제자인 철산소경(鐵山紹瓊)이 1304년 7월부터 3년간 고려를 방문했을 때 왕, 관료, 승려, 유학자에 이르기까지 고려인들은 그를 몽산 대하듯 여기저기서 가르침을 청했다. 나옹이나 천희 등 고려말 고승들도 몽산의 유적을 탐방했다. 한국 간화선에서 무자화두 위주의 화두참구법이나 의심을 강조하는 경향, 깨달은 이후 선지식으로부터 인가가 극히 중시된 점도 몽산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몽산과 관련된 보물, 유형문화재 등 지정문화재가 20여건에 이르는 것도 몽산이 한국 간화선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을 방증한다.

몽산덕이와 동안거사 이승휴가 나눈 편지들은 동안을 닮아 강직했던 그의 막내아들 이연종이 편찬한 ‘동안거사집’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 자료 : ‘동안거사집’(진성규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고려에 남긴 휴휴암의 불빛 몽산덕이’(허흥식, 창비), ‘몽산덕이와 고려후기선사상 연구’(인경, 불일출판사), ‘이승휴의 생애와 저술’(변동명, 진단학보 99), ‘이승휴의 내전록 저술’(변동명, 한국사상사학 제23집), ‘이승휴의 불교관’(진성규, 진단학보 99), ‘고려후기 몽산법어의 수용과 간화선의 전개’(조명제, 보조사상 제12집), ‘몽산 덕이와 고려 인물들과의 교류’(남권희,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21), ‘몽산화상보설에 나타난 몽산의 행적과 고려후기 불교계와의 관계’(최연식·강호선, 보조사상 19집)

[1277호 / 2015년 1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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