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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지내는 곳 따라 다르지 않고 감정은 경계 따라 변하지 않는다

진헐료선사가 병이 들어 드러눕게 되었을 때 시를 지어 마음을 표현했다.

‘병이 덜컥 찾아온 후에야 비로소 이 몸이 고통 덩어리임을 알아차리나니(病後始知身是苦)/ 건강할 땐 대부분 다른 사람 위해서 바쁘게 미쳐 돌아간다네(健時多爲別人忙).’

진·당 모든 서첩 애서 삼고도
송 4대가 서첩엔 생각 못 미쳐
유배지서 동파 필체 풍미 알고
모른 결에 서법 가까이하게 돼

진실하도다. 이 말씀이여!

‘사람의 본성은 본래 물도 아니고 불도 아닌데(性本非水火)/ 저리도록 써늘한 느낌과 괴롭도록 뜨거운 느낌이 저절로 생겨나는구나(寒熱自然生).’

이것은 내가 예전에 바닷가에 거처하면서 병으로 끙끙거릴 때 지은 시다. 지금은 바다 바깥인 영남지방에서 살고 있는데 옛날에 앓았던 병이 홀연히 도졌다. 그런데 그 전에 아팠던 상태가 완연하게 느껴진다.
병이 거처하는 지역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느끼는 감정이 경계 따라 변하는 것도 아니로구나. 이놈의 병 취미가 원래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긴 한데 사람들에게 말해주기는 어렵다.

소동파가 말하기를 ‘무릇 심하게 좋아하는 무엇인가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폐단이 있다’고 하였다. 내가 동파의 문집을 읽어보았더니 혜총 각범이 후에 동파의 유배지에 왔을 때 동파가 살았던 옛날 집을 찾아가 재미있는 일이 없었는지를 물어보는 내용이 나왔다. 어떤 할머니가 대답하기를 ‘소상공은 어찌해볼 수 없어서 시 짓기를 좋아했지요’라고 했다. 이런, 어찌하여 할머니조차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도록 했더란 말인가. 이것이 어찌 폐단이 아니랴.

소동파가 처음 추방을 당하여 영남의 혜주에 이르렀을 때 여지의 맛을 보고는 시를 지어 말하였다.

‘하루에 여지 삼백 개를 먹을 수만 있다면(日啖荔枝三百顆)/ 영남사람 되어도 상관없겠네(不妨常作嶺南人).’

나는 처음에 이 시를 읽어보고는 속으로 지나치게 꾸민 말이라고 여겼다. 내가 이곳에 머문 지 거의 6년이 다 되어간다. 계절이 새롭게 한 번 바뀔 때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시를 열 번이고 백번이고 읊조리게 된다. [여지는 중국 남방에서 많이 나오는 열대과일이다. 양귀비가 몹시 좋아했다. 한나라 때에는 장안까지 여지를 수송하느라 고생들깨나 했다. 과일의 성질이 따뜻하다. 동파거사와 감산대사도 이 과일을 맛보고는 그만 홀딱 반했다. 장이 따뜻해지면서 속이 확 풀리는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자주]

나는 평생 동안 진나라와 당나라의 모든 서첩을 애서로 삼아 훌륭하다고 여기면서도 송나라 4대가의 서첩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다. 영남지방으로 유배를 당하고 나서 소동파가 이곳에 거처했을 때를 항상 생각하며 동파의 필체에 강물이 도도하게 굽이쳐 흐르는 듯한 풍미가 있음을 느끼고는 모르는 결에 서법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이에 헌사를 올린다.

다른 사람들이야 이 말에 특별한 맛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리오. 서법의 오묘함은 실로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다. 옛날부터 임서(臨書)한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모두 궁극의 경지를 말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힘주어 말한다. “동파거사의 필체는 마치 기러기가 긴 허공을 날아감에 그림자가 굽이쳐 흐르는 황하강물 추수(秋水)에 잠겨드는 것과 같다네”라고. [추수(秋水)는 장자 추수편에 나오는 말이다. 흙탕물이 되어서 넘실넘실 흘러가는 황하강물이다. 중국은 대륙이어서 땅이 몹시 넓다. 여름에 쏟아진 장맛비가 대륙을 가로질러 흐르기도 하면서 가을이 되면 황하로 몰려든다. 그렇게 몰려든 강물이 누런 흙탕물 파도가 되어 넘쳐흐른다. 그 위를 기러기 떼가 날아간다. 물결 따라 기러기의 날개 그림자가 저절로 춤을 춘다. 역자주]

이것은 선가에서 말하는 것과 같아서 밑바닥까지 번쩍 들어 올려서 홱 하고 뒤집어 엎어버리는 한 구절이다.서법을 배우는 이들이 이 경지에 꿰뚫어 들어갈 수만 있다면 서법에 있어서 상승(上乘)의 경지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1278호 / 2015년 1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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