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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일본 잇펜이 중궁 키시에게

“일대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두 나무아미타불로 돌아간다”

지방 호족 집안에서 태어나
13살 때 정토종 계열로 출가

부친 사망소식에 고향 갔다가
환속해 결혼하고 자식도 낳아

‘내 길은 수행’ 확신 후 재출가
혹독한 정진 후 염불전법 나서

평생 걷고 탁발하며 민중 교화
죽을 때 “시신 동물에게” 유언

“내 몸이 죽고 사는 무상의 도리를 자각하고 아미타불에 귀의해 단 한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른 뒤에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마음도 아미타불의 마음, 거동도 나무아미타불의 거동, 말도 나무아미타불의 말입니다. 그렇기에 살아 있는 목숨도 아미타불의 목숨, 죽어가는 목숨도 아미타불의 목숨입니다.”

1274년 2월8일, 36살의 잇펜(一遍, 1239~1289)은 길을 나섰다. 초봄의 볕은 따사로웠고 바람결에는 온기가 묻어났다. 천수백년 전 인도의 작은 나라 카필라에서 젊은 싯다르타왕자가 화려한 왕궁을 뒤로하고 출가수행자의 길로 들어선 날이었다. 잇펜과 길을 나선 쵸이치(超一)와 쵸니(超二)는 더 이상 그의 아내와 딸이 아니었다. 잇펜을 돕던 하인 염불방(念佛房)이 그러하듯 이제 같은 길을 걷는 도반이었으며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가르침을 세상에 알리는 떠돌이 염불승이었다.

잇펜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만나는 누구에게나 아미타불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에는 성자와 범부, 똑똑한 자와 어리석은 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고귀한 자와 미천한 자가 따로 없다고 했다. 10겁이라는 아득히 먼 옛날 법장비구가 오랜 수행으로 아미타불이 되었고, 그 분이 중생들에게 육자명호를 주는 순간 단 한 번의 염불로도 성불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5년, 10년 세월이 흘러도 잇펜은 여전히 길 위에 있었다. 머물지 않았기에 그는 늘 무소유였다. 동행과 이탈의 대열이 반복됐지만 잇펜은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 발걸음이 만리에 이르고 일본열도 전역을 감쌌다. 잇펜은 그 옛날 신라의 원효(元曉)와 교토의 구야(空也)가 그랬듯 저잣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사람들이 모이면 ‘나무아미타불 결정왕생 육십만인’이라고 쓰여 있는 패[賦算]를 일일이 나눠주었다. 패는 고통의 심연에서 신음하는 중생과 한량없이 자비로운 아미타불과 맺어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곳에 쓰여 있는 ‘육십만인(六十萬人)’은 ‘육자명호일편법(六字名號一遍法), 십계의정일편체(十界依正一遍體), 만행이념일편증(萬行離念日遍證), 인중상상묘호화(人中上上妙好華)’라는 말의 첫 글자들에서 따왔다. 육자명호는 가장 보편적인 불법이며 망념을 떠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깨달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잇펜은 때로 게송도 불렀다.
‘육자 가운데에(六字之中)/ 본래 삶과 죽음이 없으니(本無生死)/ 한번 외우는 사이에(一聲之間)/ 곧 무생을 깨치리라(卽證無生).’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에는 생사가 없고, 한번 부르는 일성 속에는 생멸이 없다는 이치를 노래했다. 명호를 외우면 누구나 나무아미타불 속으로 사라지고 그 순간 왕생한다는 것이니 왕생은 그저 나무아미타불에 모두 내맡기면 된다고 했다.

백성들은 환호했다. 처음 신기한 듯 구경하던 이들도 나중에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함께 춤을 추었다. 자연재해와 전쟁이 끊이질 않는 시대. 살인과 굶주림이 일상이 돼버린 속에서 이들에게 잇펜의 말은 환희로웠다. 비록 현세의 삶이 고단하더라도 그 너머에는 차별도, 서러움도, 굶주림도, 죽음도 없는 세상이 있다는 것. 단지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만 열심히 부르면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들은 잇펜에게서 받은 패를 소중히 간직하고, 어디서든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육자명호와 패가 있기에 그들은 먼 훗날을 기다리며 서러운 인생의 강을 건널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 잇펜의 제자이자 동생인 쇼카이(聖戒)의 주도로 만들어진 잇펜 그림 전기 ‘잇펜히지리에(一遍聖繪)’의 한 장면. 대자연에 몸을 맡기고 끝도 없는 편력의 길을 걸었던 잇펜의 삶이 잘 드러나는 이 그림은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당시에는 민간인이 승려에게 법문을 들을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천황과 귀족들의 안위를 위해서만 기도하는 삭발한 관리였다.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준다거나 상가에 가서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부정을 탄다고 믿은 천황과 귀족들이 승려들의 대중교화를 아예 법으로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간혹 관승(官僧)과는 전혀 다른 이들이 나타났다. 길을 닦고, 다리를 놓고, 우물을 파고, 시체를 처리해주는 승려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전부를 내주는 거리의 성자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이치 히지리(市聖)’ 혹은 ‘히지리(聖)’라 부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잇펜도 그들에게는 히지리였다. 일반 백성은 물론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최하층의 ‘비인(非人)’이나 역병에 걸린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칭명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잇펜이 걸으면 걸을수록, 춤을 추면 출수록 그를 따르는 이들도 점점 불어났다. 그중에는 잇펜을 스승으로 출가하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사람들은 잇펜과 그 일행을 시중(時衆)이라 불렀다. 이들은 매 순간순간을 임종이라 생각하며 간절히 염불했다. 그 옛날 초기교단이 그랬듯 이들은 해진 승복을 입고 걸식에 의존했으며, 철저히 계율을 지켰다. 처마나 나무 밑에서 잠을 잤으며, 찌는 더위와 살을 에는 추위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잇펜은 길 위에서 점점 유명인사가 돼갔다. 그를 보려는 이들이 줄을 이었고, 그 중에는 황실이나 고위관리들도 여럿 있었다.

훗날 시종(時宗)의 개조로 숭상된 잇펜. 그는 무사이자 유력한 호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천황의 권력을 넘보는 막부와 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천황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러나 황권회복을 목표로 거병했던 세력들이 크게 패하고 막부의 권한은 더욱 커졌다. 이때 황실의 편에 섰던 잇펜의 가문도 영지의 상당부분을 몰수당하고 권력을 상실했다. 일족들은 살해되거나 유배에 처해져 뿔뿔이 흩어졌다. 그가 10살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무사였던 아버지는 출가해 산사에 은거했다.

잇펜은 절에 맡겨졌고, 13살 때 쇼타츠(聖達)를 스승으로 출가했다. 쇼타츠는 정토종 계열의 승려였지만 염불만을 강조했던 호넨(法然)과는 달리 여러 선행도 모두 아미타불의 공덕이니 함께 닦을 것을 권장했다. 그곳에서 수행과 경전을 공부하던 잇펜이 25살 되던 해였다. 부친의 입적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주변의 강권으로 결혼해 자식까지 낳았다. 허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가장으로서 이행해야할 의무와 기대감은 그를 지치게 했다. 더욱이 영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친인척 간의 다툼은 세속에 대한 일말의 정까지 끊도록 했다.

잇펜은 자신이 세간 사람으로 적합하지 않음을 알았다. 속세의 삶을 접고 재출가를 결심했다. 1271년, 33살의 잇펜은 가족들의 절망적인 시선을 뒤로 한 채 스승 쇼타츠를 찾아갔고 다시 승려가 됐다. 잇펜은 나가노현 젠코지(善光寺)에 들어가 죽을 각오로 칭명염불을 계속했다. 그렇게 3년, 잇펜은 정토의 오묘한 이치를 깊이 깨칠 수 있었다.

10겁이라는 오랜 옛날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성도한 아미타불의 정각도, 극락왕생을 바라는 중생의 일념도 차별이 없어서, 절대의 명호에 귀명(歸命)하는 일념에 따라 중생도 현 모습으로 미타의 대회(大會)에서 같이 앉을 수 있음을 알았다. 중생의 노력이나 아미타여래의 힘이 아니라 육자명호 자체에 구제의 힘이 있기에 오로지 명호만 염하면 왕생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잇펜은 “영원히 세속의 생활을 염리(厭離)하고, 바로 일체의 것을 버리고 떠나 내 몸, 내 생명을 불법을 위해 바치고,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서원했다. 그는 첫 제도 대상으로 가족을 선택했다. 그는 아내와 딸을 찾아가 나무아미타불의 신묘한 이치를 들려주었다. 또 이제부터는 길 위의 삶을 살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내와 딸은 자신들도 함께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잠시 고민하던 잇펜은 아내에게는 쵸이치, 어린 딸에게는 쵸니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동참을 허락했다. 잇펜은 제자 1명과 두 명의 여인을 데리고 염불전법의 길에 올랐다.

그들은 춤을 추며 사람들을 흥겹게 했고, 기댈 곳 없는 백성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이 적힌 패를 나눠줬다. 그러던 어느 날 잇펜을 고민에 빠뜨린 사건이 벌어졌다. 잇펜이 패를 내밀자 한 승려가 자신은 믿음이 없으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순간 잇펜은 갈등했고 이 문제는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아미타불에 관심이 없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염불을 권하는 일이 과연 옳은가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우연히 신탁을 받았다. 어쩌면 내면의 목소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미타불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일체중생의 왕생은 결정됐다. 믿음과 불신을 가리지 말고, 깨끗함과 더러움을 싫어하지 말고 그 패를 전해주라.”

잇펜은 임제종 선사인 호토국사(法燈國師) 가쿠신(覺心, 1209~1298)으로부터 인가(認可)를 받기도 했다. 가쿠신은 잇펜에게 ‘망념이 일어나면 망념인 줄 알아차려라’는 ‘염기즉각(念起卽覺)’을 제시하고 염불의 경지를 물었다.

이에 잇펜은 “이름 외울 때/ 부처님과 나 모두/ 없어지리라/ 나무아미타불만/ 그 소리만 남으리”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가쿠신은 “아직 철저하지 못하다”라고 했다.

잇펜은 다시 “이름 외울 때/ 부처님과 나 모두/ 없어지리라/ 나무아미타불만/ 나무아미타불만”이라고 노래했다. 가쿠신은 선악시비의 분별과 알음알이로부터 자유로워진 잇펜을 인가하고 징표로 수건과 약상자를 건넸다. 염불과 선은 둘이 아니었다.

▲ 35살 때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수만 리를 걸으며 중생을 제도했던 거리의 성자 잇펜. 제자들에 의해 세워진 잇펜의 동상들은 모두 걷는 모습이다.

잇펜이 중궁(中宮) 이마데가와인 키시(金出河院嬉子, 1252~1318)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은 그의 생애 후반부였다. 키시는 근위대장 사이온지 킨스케(西園寺公相, 1223~1267)의 딸이었다.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아버지에 의해 10살에 입궁했고, 그해 가을 중궁에 책봉됐다. 중궁은 비록 황후의 아래였지만 황실의 정략적인 결혼관계 속에서 황후와 중궁은 대등했다.

키시는 일본 90대 천황 가메야마(龜山, 1249~1305)의 배우자였지만 불행했다. 천황은 황후만을 편애했으며, 황후 지지 세력들의 견제와 질투도 견뎌내기 어려웠다. 근위대장과 태정대신을 지내던 아버지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남에 따라 어린 그녀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그해 9월, 16살의 키시는 궁에서 쫓겨나 본가로 돌아왔다. 일상은 답답하고 하루하루는 고통스러웠다. 몇 해 뒤 황후의 존호가 내려졌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키시는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잇펜이라는 떠돌이 승려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잇펜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성자로 칭송했다. 키시는 그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도 시작했다.

키시는 출가를 결심했다. 가족들도 애써 반대하지 않았다. 남편도 아이도 없이 평생을 살아야할 그녀가 가련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뒤를 이어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른 오빠 사이온지도노(西園寺殿)는 누이동생을 적극 도왔다. 그 덕에 키시는 잇펜으로부터 ‘일아미타불(一阿彌陀佛)’이라는 법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왜 ‘일아미타불’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잇펜에게 편지로 법명의 의미를 물었다.

잇펜은 39살 때 받아들인 제자 ‘타(他)아미타불’을 시작으로 ‘유(唯)아미타불’ ‘바(婆)바아미타불’ ‘대(大)아미타불’ ‘정(定)아미타불’ ‘향(向)아미타불’ 등 아미타불을 법명의 돌림자로 사용했다. 염불하는 제자들이 곧 아미타불이었으며, 그렇기에 제자라도 공경하겠다는 잇펜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잇펜은 키시에게 답변을 보냈다. 삶과 죽음이 무상함을 자각하고 일념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그 순간 자신이 아미타불과 다르지 않게 됨을 강조했다. 그러면 삼계와 육도의 업장이 더 이상 자신을 구속할 수 없으며, 극락왕생 여부도 하찮게 여겨져 그저 나무아미타불 명호에 귀명하게 될 뿐이라고 했다. 1283년 8월, 32살에 출가한 그녀는 부지런히 정토의 업을 닦다 1318년 5월 67살에 서방정토로 떠났다.

잇펜은 이보다 30여년 앞선 1289년 8월23일 51살로 정토에 들었다. 그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걷고 춤을 췄으며 염불의 공덕을 알렸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모든 저술을 모두 모아 불태웠다. 그러고는 “일대(一代)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두 나무아미타불로 돌아간다”고 했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나무아미타불 속에 있으며 나머지는 사족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내 교화는 내 일생에 있다”고 선언했다. 자기의 학문이나 법을 이을 생각 말고 그대들은 그대들의 삶을 살라는 간곡한 당부였다. 그런 후 잇펜은 마지막으로 “내가 죽으면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들판에 내버려 짐승들에게 공양하도록 하라”고 부탁했다. 중생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지녔던 ‘거리의 성자’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잇펜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지만 제자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기억을 더듬고 자료들을 모아 ‘한슈법어집(播州法語集)’ ‘잇펜상인어록(一遍上人語錄)’을 펴냈다. 제자이자 동생인 쇼카이(聖戒, ?~1323)의 주도로 그림으로 만든 전기인 ‘잇펜히지리에(一遍聖繪)’도 10년 만에 완성됐다. 또 타아미타불 등 제자들은 신도들을 규합해 교단을 만들고 시종(時宗)이라고 이름 지었다.

자력과 타력, 선과 정토가 둘이 아닌 경지, 염불수행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평가 받는 잇펜. 그가 키시에게 보낸 이 편지는 ‘잇펜상인어록’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 자료 : ‘춤추는 잇펜’(김호성, 일본불교사연구소), ‘일본 시종의 조사 잇펜의 전법행각과 그 현대적 의미’(원영상, 전법학연구 제7호), ‘一遍’(今井雅晴 編, 吉川弘文館), ‘일본불교사’(가와사키 지음, 계환 스님 옮김, 우리출판사), ‘인물로 보는 일본 불교사’(마츠오 겐지 지음, 김호성 옮김), 위키피디아(http://ja.wikipedia.org/)

[1280호 / 2015년 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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