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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를 향한 인류의 지혜(중)

“일체 생명은 나의 어머니, 우주공동체는 가족입니다”

▲ 종교와 인종에 차별없이 세계의 모든 이들과 교류하며 만남을 갖고 있는 달라이라마. 2011년 1월, 인도 갠즈스강 인근에 있는 티베트 도량에서 경주 기림사 전 주지 종광 스님과 한국인 불자 순례단을 맞이하고 있다.

불교 심리학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속하는 존재’라고 오해하고 이에 대해 열정적으로 갈망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격성과 경쟁을 효과적인 도구로 인식하고 이를 사용해서 갈망과 집착의 대상을 추구하고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러한 정신적 태도는 일상에서 쉽게 행동으로 나타나고 당연한 결과로써 호전성을 낳게 됩니다. 그런 과정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마음에 작용해 왔고 현대적인 환경에서 그런 경향은 더욱 쉽게 강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미혹과 탐욕 그리고, 공격성이라는 이 독(毒)을 어떻게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들 뒤에는 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생의 출발과 마지막엔
일상서 타인의 친절에 의존
그럼에도 인생 중반기에는
타인에게 친절하지 못한가
명상통해 깊이 생각해봐야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교들
인류 이롭게한다는데 일치
이러한 공통성에 주목할때
세계인류는 평화롭고 풍요

대승불교 속에서 성장한 저는 사랑과 자비가 세계평화의 도덕적 틀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자비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매우 가난한 사람에게 연민과 자비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가난하기 때문에 동정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자비심은 이타주의적 배려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아내나 남편, 자녀 그리고, 가까운 친구에 대한 사랑은 대개의 경우 애착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애착이 변하면 그들에 대한 친절한 마음도 바뀌게 됩니다. 아마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애착에 근거하지 않고 이타주의에 바탕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고통 받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고통에 대한 인간적인 대응으로써 자비심을 유지하게 됩니다. 자비심은 우리 내면에서 길러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대상이며 그것도 유한한 자비심이 아니라 무량한 자비심으로 길러내야 합니다. 차별 없는, 샘솟는, 한량없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자비심은 친구와 가족에게 향하는 일상적인 사랑과 분명히 구분됩니다. 우리가 강조하는 무량한 사랑과 자비심은 우리를 해치는 적에게도 베푸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자비의 논리적 근거는 “고통을 회피하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는 다시금 ‘하나’라는 타당성 있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는 행복에 대한 보편적 가치추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생명체는 유사한 욕망을 가지고 태어나고 이를 충족할 동등한 권리를 지닙니다. ‘나’ 자신을 타인과 비교한다면 타인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그 타인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단지 한 사람일 뿐이지만 타인은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체를 우리의 사랑하는 ‘어머니’로 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 모두를 사랑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라고 가르칩니다. 불교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무수히 반복해 왔으며 그래서 각각의 존재는 언젠가는 우리의 부모였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주의 모든 생명체는 가족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를 믿던지, 믿지 않던지 사랑과 자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부모의 보살핌과 친절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만년에 병들고 늙게 되면 우리는 다시금 타인의 배려에 의지하게 됩니다. 인생의 출발 시점과 마지막에는 타인의 친절에 의존하는데, 그렇다면 왜 인생의 중반기에는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하는 걸까요? 모든 생명체에게 친근함을 느끼는 마음의 계발이 전통적인 종교활동으로 연관되는 종교성을 내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종, 종교, 정치적 성향을 떠나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인류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 더 넓고 더 길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계발하고 실현해야 할 영향력이 큰 심성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황금기에 잘못된 현실 에 사로잡혀 소홀히 하곤 합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는, 좀 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수많은 타인과 비교한 우리 자신의 상대적인 사소함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가진 것을 타인들과 나누는 것이 더 값어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이 이해되고 수용된다면 진정한 자비심 즉, 타인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존경은 지금 이곳에서 구현하게 됩니다. 개인의 행복은 더 이상 의식적인, 이기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타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전체 과정의 필연적인 그리고, 훨씬 더 뛰어난 부산물로써 개인의 행복이 주어집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흐름 속에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이 일어납니다. 고요하고 맑은 마음이면 문제들은 곧잘 해결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증오, 이기심, 질투 그리고, 분노 등으로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판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눈멀게 되고 그런 혼란한 순간에는 전쟁을 포함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비와 지혜의 수행은 모든 사람에게 유용하고 국가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논의된 원칙들은 세계 모든 종교의 윤리적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불교, 기독교, 유교,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시크교, 도교, 조로아스터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는 사랑이라는 유사한 이상형을 제시하고 있으며 영적인 수행을 통해 인류를 이롭게 한다는 동일한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추종자들을 보다 나은 인간으로 향상시키는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종교는 신(身), 구(口), 의(意)가 제 역할을 완성하게 하는 도덕적 계율을 가르칩니다. 거짓말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살생하지 말라 등을 실천할 것을 주문합니다. ‘이기적이지 말라’는 것이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가르친 일체 도덕적 계율이 지향하는 한결같은 목표입니다. 위대한 스승들은 그들의 추종자들을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부정적 행위에서 벗어나 선(善)의 길로 인도하기를 바랐습니다.

모든 종교는 이기심과 함께 다른 문제들의 근본 원인을 잉태하는 방만한 마음을 규율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고 있습니다. 종교들은 평화롭고, 절제되고, 윤리적이며 지혜로운 영적 상태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가 근본에 있어서는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믿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리의 차이는 시대와 상황 그리고, 문화적 영향의 차이 등에 기인합니다. 실제로 종교의 순수 형이상학적 측면에서의 학문적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다양한 질병에 대해 각기 특정한 치료법들이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인류에게 편안함과 행복을 주는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합니다. 생명체들이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얻도록 도와주기 위해 모든 종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비록 종교적 진실에 대해 특정한 해석을 더 선호하는 것도 그 나름의 근거를 갖고 있지만 인간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화합을 향한 정당성이 더욱 큽니다. 각 종교는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고 세계문명에 기여하고자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결코 개종이 초점이 될 수는 없습니다. 타인을 불자로 개종시키거나 단순히 불교적 관점을 확산시키는 것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 종교들의 근본적인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으며 다른 종교를 훼손하면서 어떤 특정종교를 옹호하거나 어떤 새로운 ‘세계종교’를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경험과 세계 문명을 풍요롭게 하는데 모두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각기 다른 기량과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데 다양한 방법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마치 음식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좀 더 호소력이 있고, 어떤 사람은 창조자를 전제하지 않고 모든 것은 스스로의 행동에 따른 결과로써 이해하는 불교를 더 선호하기도 합니다. 유사한 논점을 다른 종교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논점은 명확해집니다. 각 개인의 삶의 방식, 다양한 정신적 필요성, 전승된 국가의 전통에 적합한 세계의 다양한 종교가 인류에게는 모두 필요합니다.

종교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력들을 환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필요가 현재 시점에서 더욱 시급합니다. 모든 종교가 인류의 향상을 각자의 주요 관심사로 다룬다면 세계평화를 위해 서로 협조해서 함께 일하는 것은 매우 용이한 일이 될 것입니다. 종교간 이해를 통해서 모든 종교가 함께 일하는데 필요한 화합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단계이긴 하지만 즉각적이고 손쉬운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다양한 종교 간에 존재하는 교리상의 차이를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로운 보편 종교에 의해 기존 종교들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세상은 그 모든 종교를 필요로 합니다.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종교 수행자들이 부딪치는 두 가지의 주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종교간 필요한 수준의 화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종교간 이해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 첫째입니다. 서로의 종교에 대한 존중을 통해, 인류의 행복에 대한 공통 관심을 강조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개개인의 가슴에 와 닿고, 전반적인 인류의 행복을 향상시키는 근본적인 영적 가치에 대한 유효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 그 두 번째입니다. 이것은 세계 모든 종교의 공통분모 즉, ‘인도주의적인 이상’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단계는 우리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또는 공동으로 행동을 취하게 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 요구되는 정신적인 필요조건을 갖추도록 만듭니다.

진정한 공동체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 즉, 친절한 마음을 계발하는데 있어서 타 종교를 필요한 도구로써 이해할 때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수행자들은 세계평화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지성주의에 빠질 수 있는 신학 또는 형이상학적 세부사항에 치중하지 말고 종교의 목적 자체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진실로 각 종교의 내부적인 관심사에 불과한 미묘한 형이상학적 차이점을 제칠 수 있다면 세계의 주요 종교는 세계평화에 공헌할 수 있고 인류의 이익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지구촌 일부에서 정신적인 가치를 파괴하려는 조직적인 시도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세계 인류의 대부분은 각자의 종교적 수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비종교적인 정치 체제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종교에 대한 끊임없는 귀의는 종교의 힘, 그 자체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기운과 힘은 세계 평화를 위해 필요한 정신적인 환경조건을 형성하려는 목적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세계의 종교지도자와 인도주의자들이 맡아야 할 특별한 역할이 존재합니다.

궁극적으로 세계 평화를 성취할 수 있을지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분노에 의해 지배당한다면 우리는 인간 지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인 지혜를 잃게 됩니다. 분노는 오늘 세계가 부딪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출처=달라이라마오피스 홈페이지>

번역=백영일 번역전문위원 yipaik@wooribank.com

[1280호 / 2015년 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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