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 제1칙 무제와 달마의 문답 (3)

“앉은 ‘나’도 좌복도 세월도 없는 그 자리가 깨달음 도량”

▲ 소림사에서 오솔길 따라 일조암과 달마굴을 차례로 참배한 뒤 조금 더 오르면 거대한 달마상과 마주한다.

[참구]

<본칙> 달마대사는 말했다.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廓然無聖).” (착어 ← 얼마나 현묘한 대답을 하는가 했더니, 화살은 신라로 날아가 버렸네. 참으로 명백하군.)

“확 트여 성스럽다 할 것 없다”
무제 질문에 달마의 대답이 화두

의미 캐내 진리 찾으려는 수행자
책에 나오는 문구 분석·정리하면
진위 여부 떠나 영혼 울리지 못해
남에게 보이려는 답은 무의미
답이 곧 자신이자 자신이 답 돼야

머리로 화두 해석하는 순간 죽비
‘이게 뭔가’ 일념으로 사무칠 뿐
문득 ‘있는 그대로 진리’ 드러나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聖諦第一義)란 어떤 것입니까?”라는 양무제의 물음에 달마대사는 조금도 주저 없이 “확연무성(廓然無聖)”, 곧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무슨 뜻일까? ‘참구해야 할 화두’이다.

여기서 ‘참구해야 할 화두’라고 밝힌 화두는 집필자가 임의로 선정한 것이 아니다. 실제 참선 수행에서는 본칙 전체를 화두로 삼아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칙에 나오는 몇 개의 핵심 대목만 화두로 든다. 선의 전통에서는 ‘벽암록’‘무문관’ 등에 나오는 본칙의 어느 대목이 참구해야 할 화두인가가 이미 선정되어 있다. 수백년간 계승되어 온 전통적인 이 실제 참구 화두를 ‘참구해야 할 화두’라고 밝힌 것이다.

‘벽암록’‘무문관’ 등 공안집의 각 칙에서 ‘참구해야 할 화두’는 한 칙에 하나만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러 개가 있다. 본칙에 ‘참구해야 할 화두’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평창이나 송에도 ‘참구해야 할 화두’가 있는 경우가 있다. ‘무문관’ 제2칙 ‘백장야호’의 경우는 ‘참구해야 할 화두’가 여섯 개나 된다.

원오 선사는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를 묻는 양무제에게 달마대사가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고 대답한 것을 두고 평창(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제창한다.

“천하의 납승들은 이것을 뛰어넘지 못하는데, 달마대사는 무제를 위해 단칼에 베어 주었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를 대단히 잘못 이해하여 무엇에 홀린 듯 눈알을 부라리면서,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멋지게 빗나갔네.”

천하의 납승들이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쩔쩔매지만, 달마대사는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성스러운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교리적 설명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험한 살아 있는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달마대사의 이 한마디는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에 대한 온갖 이론적인 생각을 단칼에 베어 그 흔적조차 없애 버린다.

“확연무성(廓然無聖)”, 곧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에 의존한다. 그리고 책에 나오는 문구를 실마리로 하여 머리로 분석하고 정리해서 답을 도출하려고 한다. 이렇게 도출된 답은 그 진위 여부를 떠나 그의 영혼을 울리지 못한다. 그 답이 곧 자신이고, 자신이 곧 그 답이 되지 못한다. 보통은 자신과는 별 관계가 없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답이 되고 만다.

난생 처음 듣는 신비로운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고 하자. 사랑하는 딸로부터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꼭 알려달라는 부탁까지 받은 상태다. 이때 당신은 이 소리를 어떻게 듣겠는가? 그 소리에 대해 알려고 책을 찾겠는가? 타인에게 그 소리에 대해 물어보려고 하겠는가?

당신은 책도 찾지 않고 누구에게 물어볼 생각도 없이, “이 소리가 무슨 소리지?” 하는 일념으로 오롯이 이 소리만 들을 것이다. 당신의 몸과 마음에는 이 소리뿐, 다른 잡념이 끼어들 틈이라고는 없다. 당신은 이 소리와 하나가 된다.

여기서 난생 처음 듣는 소리가 화두이다. 화두는 그렇게 참구한다. 책에 적힌 문구, 남에게서 들은 말, 자신의 추측 등 온갖 것을 들이대어도 화두는 뚫리지 않는다. 실마리를 찾을만한 비교대상도 없고, 머리로 화두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순간 스승의 죽비가 가차 없이 날아온다. 뭐가 뭔지 구분이 되지 않는 칠흑의 심연 속에 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알 수 없는 이 화두를 붙들고 오직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일념으로 사무치고 사무칠 뿐이다. 이 사무침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불현듯 화두는 뚫리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화두가 뚫리면서 보인 세계와 자신 사이에는 아무런 간극이 없다. 자신이 곧 그 세계요, 그 세계가 곧 자신이다. 그때 터져 나오는 한마디는 언어 이전의 한마디이며, 바로 자신이다. 그 한마디 그대로가 곧 자신이다. 결코 책에서 보고 외운 한마디도 아니며,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한마디도 아니다.

그런데 아뿔싸!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를 요즈음 수행자들은 화두로서가 아니라 책에 나오는 문구처럼 받아들여 입으로 읊조리고만 있으니! 자신의 자각적 체험에서가 아니라 이 말의 의미만 캐내어 궁극적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아, 이런 것이구나!” 하고 이해될 때 마치 깨달은 양,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에서 완전히 빗나간 분별망상에 불과하다고 원오 선사는 질타하고 있다.

이어서 원오 선사는 이 화두를 뚫었을 때 나타나는 경지를 스승인 오조 법연 선사의 말을 빌어서 설명하고 있다.

“나의 스승이신 오조 법연 선사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를 꿰뚫는다면, 오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쉴 것이다(歸家穩坐). 많은 선사들이 똑같이 말(葛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위해 칠통같이 캄캄한 어리석음을 멋지게 깨부수어 주었으나, 그 중에서도 달마대사는 출중하다.’ 그래서 일구(一句)를 깨치면 천구(千句)·만구(萬句)를 단박에 깨친다고 했다. 꿈쩍도 않고 단단히 앉아 좌선하면 확실히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인용문에서 ‘말’이라 번역한 것의 원어는 ‘갈등(葛藤)’이다. 선에서는 말이나 문자, 또는 이에 의한 설명을 갈등이라 한다. 원래 갈등은 칡넝쿨과 등나무넝쿨이 다른 초목을 휘감아 달라붙는 것을 말한다. 넝쿨이 초목에 달라붙어 꼼짝 못하게 하듯이, 언어도 우리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대자유를 속박하기 때문에 선에서는 언어를 갈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속박하지만 인간사회는 언어 없이 하루도 순탄하게 돌아갈 수 없다. 육성과 문자에 의한 의사전달이 없는 하루를 상상해 보라. 휴대폰과 인터넷도 무용지물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이 언어에 의해 움직이고 질서화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선에서도 말에 의한 구속을 바로 그 말로써 해방시키기도 한다. 달마대사의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도 그 예 중의 하나이다. 사람들의 칠통같이 캄캄한 어리석음을 깨부수어 준 말 가운데 달마대사의 이 말은 출중하다고 법연 선사는 평하고 있다.

또한 법연 선사는 이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화두를 꿰뚫은 사람은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 편안히 쉴 것이라고 한다. 어디에도 걸림 없는 자신의 본래모습을 회복하여 일상생활이 진리 그대로가 된 것이다. 회사에 출근하여 바쁘게 일하고 지친 몸으로 퇴근길 지하철에 오르지만, 마음은 한없이 자유롭다.

‘지금 여기’의 일상생활이 애타게 찾고 있던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쓸데없이 헤매고 다니는 것을 멈춘다. 남의 일에 괜한 참견도 하지 않고, 지나간 과거사를 떠올려 괴로워하지도 않고, 오지 않은 미래의 일에 불안해 하지도 않는다. 항상 이 순간의 이것 자체가 되어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아무런 걸림이 없다.

▲ 달마대사가 9년 면벽을 한 소림사 달마굴은 돌기둥으로 산문을 세워 묵현처(黙玄處)라 음각했다.

언제 어디서나 이렇게 무애자재한 삶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화두에만 몰두하라. 몸도 마음도 온 천지도 ‘확 트여 한없이 넓고 넓어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는’ 바로 그때, 문득 한도인(閑道人)으로 되살아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선 수행자들이 화두를 참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선적(禪的)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좌절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세상이 잠든 겨울의 한밤, 좌선 시간이 끝난 뒤에도 혼자 남아 계속 화두를 붙들고 앉았지만 도무지 진척이 없다. 불현듯 고향의 어머니 생각과 자신의 처지가 맞물려 뜨거운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이라면, 난관에 부닥친 선 수행자의 심경이 얼마나 처참한지 안다.

이 심정을 잘 알고 있을 원오 선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당부하고 있다. “꿈쩍도 않고 단단히 앉아 좌선하면 확실히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고. ‘장경칠좌(長慶七座)의 정진(精進)’이라는 말이 있다.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 선사가 12년간 좌선 정진하는 가운데 7개의 좌복이 닳아 해어졌다는 사실을 이르는 말이다. 하나의 좌복도 좌선으로 해지기가 힘든데 얼마나 좌선했으면 7개의 좌복이 닳아 떨어졌을까! 좌절에 부딪힐 때마다 새겨볼 말이다. 앉은 ‘나’도, 앉은 좌복도, 12년 세월도 없을 때, 바로 이 자리가 깨달음의 도량이다.

옛 선사는 “머리 둘을 단번에 벤(兩頭俱截斷), 칼날 시퍼렇게 창공에 번뜩인다(一劍倚天寒)”고 읊었다. 일체의 잡념을 완전히 끊고, 끊은 흔적조차 없는 경계, 한 칼 우주를 관통하는 절대의 ‘좌선’. 이 ‘좌선’에서 만천하에 드러나 있는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의 진리를 보라!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81호 / 2015년 2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