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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평화를 향한 인류의 지혜(하)

“타인에게만 강요하는 희생을 ‘나’에게 촉구하세요”

▲ 달라이라마가 북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남걀사원에서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중동 혹은 동남아시아에서의 분쟁, 남북문제 등과 같은 오늘날의 갈등에서 분노는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런 갈등은 서로가 인간임을 이해하는데 실패함으로써 발생합니다. 더 강력한 무력의 사용도, 군비경쟁도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갈등과 다툼, 폭력은
개인에서 사회와 국가로
확산돼 전쟁까지 일으켜

국가간 지도자라고 해도
인간적으로 만났을 때는
갈등과 다툼 자체가 없어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가
서로 인간임을 자각할때
진정성 있는 대화 가능해

그것은 순전히 정치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기술적인 진보와 관련된 것만도 아닙니다. 인류가 함께 부딪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예리한 이해가 요구되기 때문에 이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입니다. 증오와 다툼은 그 누구에게도, 투쟁의 승자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폭력은 언제나 비참한 상황을 초래합니다.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비생산적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인종, 문화, 이념의 차이를 넘어 인류가 공동으로 처한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것에 대해 세계의 지도자들은 배워야 할 시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 지역사회, 국가, 나아가 세계 전체가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현재 세계의 긴장 관계를 일으키는 상당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계속되어 온 동구권과 서방 진영의 갈등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양 진영은 전적으로 비우호적인 관점에서 서로를 평가하고 인식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이렇게 지속된 비합리적인 다툼은 동료 인간으로서 서로에 대한 호의와 존경의 부족에서 기인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 두 진영의 대표 격인 미국의 지도자와 옛 소련의 지도자가 무인도 중간에서 갑자기 서로 만났다면 확신하건대 그들은 자연스럽게 동료 인간으로서 서로를 응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미국의 대통령과 소련의 서기장이라고 확인되는 바로 그 순간 상호 의심과 오해의 벽은 그들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특정한 주제 없이 비공식적인 확대 모임의 형태로 더 많은 인간적인 접촉을 하게 되면 상호 이해가 증진됩니다. 그들은 서로를 인간으로서 관계를 맺는 것을 배우게 되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국제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상호 의심과 증오의 분위기에서는 어떤 당사자도, 특히 적대 관계의 과거 역사가 있는 당사자는 생산적인 협상을 할 수 없습니다.

일년에 한번 정도 세계의 지도자들이 특정한 업무 없이 아름다운 곳에서 인간적으로 서로를 알기 위해 만나는 것을 제안합니다. 그런 후 나중에 만나 상호 문제와 지구상의 여러 문제들을 토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호 존중과 서로의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분위기에서 세계의 지도자들이 회담 테이블에서 만나게 하자는 바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리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개인 간의 접촉을 증진하기 위해 국제관광을 더욱 장려하기를 바랍니다. 인류가 궁극적으로 하나임을 드러내는 인간적 관심을 끄는 기사를 좀 더 많이 다루는 대중 매체도, 특히 민주사회에서는 세계평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국제무대에서는 소수 강대국의 등장으로 국제기구의 인도주의적 역할이 무시되거나 소홀히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부분이 수정되어 모든 국제기구들이, 특히 국제연합이 인류를 위한 최선의 이익을 확보하고 국제적인 이해를 고취하는데 있어서 좀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이기를 희망합니다. 소수 강대국 회원들이 자신의 일방적인 이익을 위해 UN과 같은 국제기구를 지속적으로 남용한다면 그것은 비극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UN은 반드시 세계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 기구는 모두에 의해 존중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UN은 억압받는 약소국들에게, 나아가 전체로서의 지구공동체 가족들에게 유일한 희망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국가는 과거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서로에게 더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이해는 국가적 경계를 넘어 국제사회 전체를 향해야 합니다. 무력 사용의 협박 또는 실질적인 무력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의 이해를 통해 진정한 협력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세상의 문제는 단지 증가되기만 할 것입니다. 가난한 국가의 국민에게 그들이 원하고 마땅히 주어야 할 행복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당연히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부자들에게는 문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만약 원치 않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형태가 이를 꺼려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강요된다면 세계평화의 성취는 요원해 보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터놓고 만족시킬 수 있다면 평화는 반드시 오게 됩니다.

정의와 조화, 평화의 성취는 여러 요소에 달려있습니다. 단기 보다는 장기적인 인류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막대한 과제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에 기초한 저의 제안 외에 다른 대안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행복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인류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기보다는 관련된 모두의 상호 장기적인 이익 때문입니다. 새로운 현실에 대한 평가와 이해는 지역 또는 대륙 간의 경제협력기구 즉 EEC(유럽경제공동체), ASEAN(동남아국가연합)의 등장을 통해 보여집니다. 특히 경제개발과 지역안정이 절실한 지역에서 이와 같은 초국가적인 기구들이 더 많이 결성되기를 바랍니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보편적 책임감에 대한 요구는 분명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선하고 친절한 마음을 계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적 행복도 영속적인 세계평화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서로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편적 책임, 사해형제, 사해자매를 주창하지만 실상 인류는 국가별 사회라는 형태의 분리된 독립체로 조직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개별 사회들이 세계평화를 위한 빌딩블록 같은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좀 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반사회적인 세력과 싸우기 위한 숭고한 목적의 기구들이 설립되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런 이상들은 이기심으로 기만 당했습니다. 오늘날 윤리와 숭고한 원칙들이, 특히 정치분야에서 어떻게 사리사욕의 그늘에 의해 덮이고 있는가를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목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치는 ‘도덕관념 없음’과 동의어가 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전적으로 정치를 멀리하라고 경고하는 학파가 있습니다. 윤리의식이 결여된 정치는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지 못하고, 도덕이 결여된 삶은 인간을 짐승 수준으로 떨어뜨립니다. 하지만 정치가 당연히 ‘더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치문화의 ‘수단’이 인류의 행복 증진을 위한 높은 이상과 숭고한 개념을 훼손시켰습니다. 따라서 더러운 정치에 의해 종교가 오염되는 것을 두려워해서 영적인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얽히는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윤리는 정치에 발붙일 곳이 없고, 종교인들은 스스로를 은둔자로 격리해야 한다는 통속적인 가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종교에 대한 그러한 시각은 너무나도 일방적입니다. 거기에는 사회에 대한 개인의 관계, 삶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적절한 시각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윤리는 종교 수행자들에게 지극히 중요한 것처럼 정치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과 지배자가 도덕적 원칙을 망각할 때 위험한 결과가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신을 믿든, 업보를 믿든 윤리는 모든 종교의 근본 바탕입니다. 도덕성, 자비, 예의, 지혜 등과 같은 인간적 특질들은 모든 문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길러지고 이를 촉진하는 사회환경 속에서 체계적인 도덕 교육을 통해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좀 더 인도적인 세상이 실현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요구되는 특질들은 처음부터, 어린 시절부터 배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가 이런 변화를 만들도록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 세대가 인간의 기본 가치를 부활시키는 시도를 해야만 합니다. 어떤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미래 세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 걸친 중요한 변화를 현재의 우리교육 시스템에 제도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도덕적 퇴보를 멈추게 하고자 요란하게 소리 지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정부는 ‘종교적인’ 책임을 떠안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인도주의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기존의 시민·사회·문화·교육·종교단체를 강화해서 인간적 가치, 영적인 가치를 되살리도록 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평화를 위한 보다 안정된 토대가 형성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듯합니다.

사회 속에서 살면서 동료 시민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의 적에게도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단순히 말로는 종교의 가치를 타인에게 확신시키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정직성 및 희생에 부합하는 삶을 우리는 스스로에게 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에 봉사하고 인류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가 단순히 타인을 개종시키는데 이용되기 보다는 모든 존재에게 항상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는데 종교가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 종교에는 국가적 경계가 없습니다. 특정 종교가 이롭다고 생각하는 민족이나 개인은 그 종교를 채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종교를 찾고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정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타 종교를 거부하거나,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특정 종교를 선택한 사람이 스스로를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로부터 단절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지역 사회 속에서 그 구성원과 조화를 이루면서 계속 삶을 이어가야 합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탈출해서는 구성원들을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종교의 근본적 목적인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와 관련해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중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반성과 자기교정이 그것입니다. 스스로를 신중히 살피면서,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즉시 고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물질적 진보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합니다. 서구인으로부터 물질적 진보에 대한 수많은 불평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그것은 서구의 자존심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이 항상 우선되기만 한다면 물질적 진보, 그 자체에 잘못된 점은 없습니다. 모든 범위의 인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발전과 영적인 성장이 결합되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확고한 믿음입니다.

<출처=달라이라마오피스 홈페이지>

번역=백영일 번역전문위원

[1282호 / 2015년 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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