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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1칙 무제와 달마의 문답(4)

“현묘한 대답인가 했더니, 화살은 신라로 날아가 버렸네”

▲ 일본화가 셋슈 토요(雪舟等楊, 1420~1506)가 1496년 그린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참구]
<본칙> 달마대사는 말했다.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廓然無聖).” (착어 ← 얼마나 현묘한 대답을 하는가 했더니, 화살은 신라로 날아가 버렸네. 참으로 명백하군.)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라는 달마대사의 대답에 원오 선사는 “얼마나 현묘한 대답을 하는가 했더니”라는 착어를 붙이고 있다. 멋진 답을 기대했더니 고작 이 정도인가 하는 뜻이다.

양무제 기대 무너뜨린 달마의 답
촌철살인 선기로 코멘트 단 원오
‘확 트임’ 화두의 참된 의미 설파

‘나’에 집착해 다시 묻는 양무제
애써 아는 체 하다 얼굴 빨개져
‘속됨’ 반대 ‘성스러움’에 묶여
이원적 분별 갇혀 한계 못 벗어나

상대적 세계서만 살다 죽는 범부
성·속 대립 소멸되면 불이 체득

이것은 반어법을 이용하여 달마대사의 대답이 매우 출중함을 나타내는 ‘억하(抑下)의 탁상(托上)’이라는 표현법이다. 폄하하는 말로 오히려 칭송을 강화하는 것으로, 선 특유의 수사법이다.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참으로 현묘한 한마디로 양무제를 비롯하여 선 수행자들을 분별망상에서 벗어나게 해서, 참다운 자유인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고 달마대사를 극찬한 것이다.

원오 선사는 이어서 “화살은 신라로 날아가 버렸네”라는 착어를 달았다. ‘신라’는 우리나라를 가리키며, 중국에서 아주 먼 곳, 땅 끝을 의미한다. “화살은 신라로 날아가 버렸네”는 그림자도 형체도 없어졌다는 뜻이다.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이 한마디로 “화살은 신라로 날아가 버렸다”, 다시 말해 그림자도 형체도 없어져 버렸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머리로 이 의미를 캐낸다면 많은 해석을 도출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론적으로 정교한 대답을 예상하고 있던 무제의 기대가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앞의 문구 “얼마나 현묘한 대답을 하는가 했더니”를 선 특유의 수사법인 ‘억하의 탁상’으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멋진 답을 기대했더니 고작 이 정도인가’라는 상식적인 수준으로 이해했을 때 나올 수 있는 해석이다.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참구해야 할 화두이고, “화살은 신라로 날아가 버렸네”는 화두에 대한 착어라는 점이다. 착어는 선 수행자들을 올바로 이끌기 위해 붙인 짧은 코멘트이며, 원오 선사의 번쩍이는 촌철살인적인 선기에서 나온 말이다.

“화살은 신라로 날아가 버렸네”라는 착어는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화두에 대한 원오 선사의 선적인 간파를 표현한 것이지, 양무제의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이 아니다. 양무제의 기대가 무너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 착어는 그보다는 더 깊은 곳을 말하고 있다.

▲ 중국 선종 초조 달마대사가 설한 심론을 정리한 ‘달마대사관심론’. 고양 원각사 소장 시도유형문화재 제242호.

그러면 이 착어의 참된 의미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직접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화두를 간절히 참구하는 것이 제일이다. 화두 참구를 통해 선적인 눈을 떠 보라! 온 몸과 마음, 그리고 온 천지가 티끌 한 점 없이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 눈은 스스로를 볼 수 없듯이, ‘확 트임’ 그 자체가 되었는데 그것을 대상화하여 일으키는 생각과 말의 그림자가 있을 리 있겠는가?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시비하는 자체가 ‘확 트임’을 가두고 왜소하게 만드는 일이다.

달마대사의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이 한마디에 지혜 있는 자는 그림자 하나 없이 활짝 트인 본래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것을 원오 선사는 “화살은 신라로 날아가 버렸네”, 즉 그림자도 형체도 없어졌다고 착어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고, 언제 어디서나 진리 한가운데 있다는 것에 눈을 뜨라. 온 천지는 이처럼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북한산은 높고 남산은 낮은가?

이어서 원오 선사는 “참으로 명백하군”이라는 착어를 붙여 수행자들의 분심을 촉발시키고 있다.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대답, 이 얼마나 명백한가? 보이면 보이는 대로, 들리면 들리는 대로 그대로가 티끌 한 점 없이 확 트여 있지 않은가?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하는가? 그런데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헤매는 자는 안경을 쓰고 안경을 찾는 꼴이라고 수행자들의 선기(禪機)에 불을 붙이고 있다.
<본칙> 무제가 물었다.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 (착어 ←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애써 현명한 체하는구나. 예상한 대로 여전히 찾지 못하는군.)

달마대사의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라는 친절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양무제는 그 진의를 꿰뚫는 역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 이 구절을 원오 선사는 평창(해설)에서 이렇게 제창한다.

“달마는 느닷없이 그에게 한 방 먹였는데 적잖은 허점을 내보였다. 무제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나’에 대한 집착(人我見)에 사로잡혀 다시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라고 물었다.”
원래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것이 선(禪)이다. 그래서 “성스러운 궁극적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라는 양무제의 물음에 달마대사는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다 드러내어 보여 주었다.

그러나 달마대사는 너무 친절한 나머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말았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허점이었다. 우리가 사는 범부의 세계에서 ‘확 트였다’는 ‘확 트이지 않은 것’이 전제되어야만 성립한다. 이 세상이 온통 검정색뿐이라면 검정색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검정색이 아닌 다른 색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검정색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상대적 세계에서만 살다가 죽는다. 보통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통상 이 상대적 세계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달마대사가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말에 의해 확 트이지 않은 세계가 전제되어 버렸으므로, 순수한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는 세계”에 흠을 내어 버린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자체가 허물이기는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것이 중생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양무제는 달마대사가 내보인 진리의 세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양무제는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고 말한 달마대사의 대답이 못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그는 “당신이야말로 성스러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요? 그런데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니 무슨 말이요?”라고 반박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늠름한 기상으로 너무나 쉽게 묘한 대답을 하는 눈앞의 이 대사가 누구인지 새삼 의문스러웠다.

그래서 양무제는 다시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라고 물었다. 양무제는 나(我)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에 대한 집착이 있으면 나와 남을 별개로 본다. 진리의 눈으로 보면 나와 남은 둘이 아니다(不二). 즉 별개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불교 교리에 통달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자각적 체험에 의해 나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지 않으면 나와 남은 엄연히 둘이다. 누가 물으면 의식하여 둘이 아니라고 대답할 뿐, 일상생활에서는 언제나 둘이다. ‘자타불이(自他不二)’는 결국 남에게 보이기 위한 말에 불과하게 된다. 양무제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달마대사가 바로 자신인데도 그에게는 자신과는 별개의 사람으로 보였고, 그래서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라고 물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를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스럽다 할 것도 없는 세계에는 ‘성스럽다’도 없고 ‘속되다’도 없다. 그 둘을 모두 떠난 세계, 그  둘에서 자유롭게 된 세계다. 깨달음에 의해 이렇게 ‘성(聖)’과 ‘속(俗)’의 대립이 없어지면, 다른 여타의 대립 개념도 동시에 소멸한다. ‘나’와 ‘남’, ‘짐’과 ‘그대’, ‘싫다’와 ‘좋다’라는 대립 개념도 없다.

이때 세상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눈에 보이는 그것 그대로일 뿐이다. ‘내’가 아닌 ‘달마대사’가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 의해 색칠된 달마대사가 아니다. 달마대사가 달마대사 그대로 온 천지 가득히 보일 뿐이다. 이때 내가 달마대사고, 달마대사가 나이다.

양무제의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에 대해 원오 선사는 호된 착어를 붙이고 있다.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애써 현명한 체하는구나. 예상한 대로 여전히 찾지 못하는군”이라고. 아예 모르면 물을 것조차 없지만 어설프게 알고 있으면 끝까지 아는 체하다가 결국 밑천이 드러나 창피를 당하게 된다. 양무제가 바로 이런 형국이다.

불교 경전을 강의할 정도로 교리에 박식했던 양무제는 달마대사의 대답을 납득하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러웠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이번에는 짐짓 현명한 체하며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잡힌 새우는 아무리 뛰어도 넣어 둔 용기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蝦跳不出斗)’는 말이 있다. 자신이 만든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면 끝이라는 뜻이다. ‘속됨’의 반대인 ‘성스러움’에 묶여 있는 양무제, 다시 말해 이원적(二元的) 분별에 갇혀 있는 양무제는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라고 대들었지만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원오 선사는 이렇게 좌충우돌하는 양무제를 두고 “예상한 대로 여전히 찾지 못하는군”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82호 / 2015년 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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