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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1칙 무제와 달마의 문답(5)

“‘안다’ 반대 아닌 ‘모른다’에 대한 의문으로 천지를 덮어라”

▲ “그대는 누구요”라는 양무제 질문에 달마대사는 “모른다”고 답했다. 이 대답이 참구해야할 화두다.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관음보살 달마대사 벽화(보물 제1817호).

[참구]
<본칙> 무제가 물었다.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

달마대사가 말했다.

“모릅니다(不識).” (착어 ← 쯧쯧! 거듭해 봐도 반 푼의 값어치도 없군.)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라는 양무제의 물음에 달마대사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릅니다(不識)”, 이 대답이 ‘전통적인 참구해야 할 화두’이다.

이렇게 대답한 달마대사는 누구인가? 화두 속의 등장인물을 나와 관계없는 먼 옛날 사람으로 본다면 당신에게 그것은 이미 화두가 아니다. 바로 이 순간의 내가 화두의 상황 속에서 그가 되지 않는다면 화두는 생명 없는 옛날이야기나 문학작품으로 끝나 버린다. 당신이 달마대사라면, 당신은 양무제의 물음에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한마디 해 보라!

범부는 “넌 누구냐” 질문에
이름만으로 대답하기 십상
언어 이전 ‘나’ 존재는 착각
나란 말 없으면 ‘나’도 없어

나비·나방 구별 못하는 프랑스
모두 ‘빠삐용’으로 불리기 때문
말을 진실로 믿는 집착은 오류

‘모른다’만 있어야 진실한 참구
스승과 독참서 견처 보이고 점검
수행 중 장애들 벗어나게 도와

“학문은 독학이 가능하지만
선에서 독학은 통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댁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쉽게 “이 아무개입니다”라고 답한다. “당신은 진정 이 아무개입니까?”라고 또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눈치가 빠른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아무개든, 홍길동이든 이름은 상관없어요. ‘나’에게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니까.”

이 대답은 이름을 무엇이라고 붙이든 ‘나’는 이름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 ‘나’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 ‘나’는 변하지 않는 동일물로서 배후에 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착각이다. 언어(말, 이름) 이전에는 ‘나’가 없었다.

불교의 유식과 중관, 현대 언어학과 철학에서 이룬 성과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는 나라는 말에 의해 생겨난 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나’가 이름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이름에 의해서 비로소 ‘나’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말이 없다면 ‘나’도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나비’와 ‘나방’을 구분한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한 곤충으로 인식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말에는 나비와 나방이라는 단어가 서로 구분되어 별도로 있기 때문이고, 프랑스어에서는 이 둘이 모두 ‘빠삐용’이라는 말로 불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언어에 따라 보이는 세계가 달라진다.

나비라는 말 이전에는 ‘나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 나비로 불리는 그것은 그때도 있었을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그것은 ‘나비’가 아니었고 ‘나비’는 없었다. 그 질문은 나비라는 말로 ‘나비’를 인식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역으로 추정한 것에 불과하다.

본래의 세계, 언어 이전의 세계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나비’를 다른 것과 구별하게 되었을까? 다시 말해, 왜 ‘나비’가 우리에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나비라는 말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 나비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나비’를 다른 것과 구별하게 하고 존재하게 할까? 그것은 나비 이외의 다른 말과의 ‘차이’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요컨대 단어 상호 간의 ‘차이’ ‘구별’에 의해서 그렇게 인식될 뿐이지 원래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처럼 언어는 본래부터 있던 것을 그대로 나타내는 거울이 아니다. 그 언어대로 보이게 하는 요술쟁이다. 원래부터 꽃인 꽃은 없다. 따라서 언어가 보여주는 그대로를 진실이라고 믿고 집착하면 큰 오류를 범한다.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 “모릅니다(不識).” 위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모른다’는 말을 듣는 순간 ‘모른다’가 아닌 다른 말, 예를 들어 ‘안다’와의 구별을 통해 ‘모른다’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 의미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의미의 테두리 내에서 “왜 모른다 했을까?” 하고 의문을 갖는 것이 곧 화두를 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시작부터 잘못이다. 그것은 기존의 ‘모른다’는 의미에 두 발을 꽁꽁 묶인 채 머리를 굴려 “모른다”고 한 까닭을 찾는 것이다. 우물 속에서 우물 밖 세상을 찾는 형국이다. 이렇게 하면 그것은 이미 이름만 화두일 뿐 화두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활구(活句)가 아닌 사구(死句)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달마대사의 “모른다”는 그런 차원의 ‘모른다’가 아니다. 달마대사의 “모른다”는 ‘모른다’라는 말을 초월한, 말 이전의 소식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모른다’라는 의미의 연장선상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모른다”이다. 따라서 달마대사의 “모른다”는 ‘안다(識)’의 반대인 ‘모른다(不識)’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안다’고 해도 틀리고 ‘모른다’고 해도 틀리는, 그 둘을 초월한 그런 “모른다”이다.

“난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 ‘모른다’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천지를 덮어, 온몸과 마음에 이 “모른다”밖에 없는 것을 일러 ‘화두를 든다’고 한다. 그것을 ‘참구(參句)’라고 부른다. 이 “모른다”가 도대체 무엇인가? 알았다면, 한마디 해 봐라!

단지 모를 뿐이다. 온 천지에 “모른다”뿐 어떤 것도 들어갈 틈이 없다. “모른다”를 ‘모른다’라는 당신의 테두리에 가두지 말라. 석가모니조차도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것을 말로써 설명할 수가 없다. 안다고 하는 자는 장님이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간절히 화두를 참구해 나가다 보면 자신의 체험이 나온다. 화두에 대해 “이것이다” 하고 스스로 깨달은 바라고 할 수도 있고, 그 화두에 대한 자신의 경지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이것을 견처(見處)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신의 견처가 바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틀렸다면 무엇이 문제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추구하는 문제가 과학에 속하는 것이라면 실험이나 수학적 증명을 통해 만인이 인증하는 검증을 스스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에 관한 한 자신의 허점을 스스로 발견하기란 대단히 어려울 뿐 아니라, 해결하기도 무척 어렵다. 또한 사람마다 나타나는 경지가 다르기 때문에 획일화된 매뉴얼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눈 밝은 진정한 스승만이 각 수행자의 다양한 견처를 꿰뚫어 보고 지도할 수 있을 뿐이다. 선에서 화두 참구에 대한 스승의 점검과 인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의 종가라 할 수 있는 중국 선종에서는 이러한 점을 간파하여 독참(獨參)이라는 훌륭한 제도를 만들었다.

독참은 선 수행자가 스승과 정기적으로 일대일로 만나 선문답으로 경지를 점검받는 제도이다. 독참이라는 호칭 대신 입실(入室)이라고도 부른다. 독참 때, 스승과 제자는 화두를 두고 선문답을 나눈다. 여기서 스승은 매우 중요하다. 스승은 생명을 다루는 의사와 같다. 돌팔이 의사는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가 처방하는 엉터리 치료법은 오히려 사람을 해친다. 먼저 스승부터 화두에 대한 진정한 체험이 없으면 결코 제자를 제대로 지도할 수가 없다.

독참에서 제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견처를 보인다. 스승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제자의 견처에 일침을 가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한 치의 양보도 없다. 화두를 두고 벌어지는 진리의 결전장이다. 독참에서 오고간 말이나 행동은 일체 비밀에 붙여진다.

화두 참구는 수학적·과학적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화두가 제시하는 진리를 체험하여 그에 부응한 인격적·정서적 해탈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화두 참구의 핵심은 기존의 모든 지식과 앎에서 벗어나서 화두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머리 굴리는 습관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기 때문에 화두를 머리로 풀어낸다. 일단 머리로 어떤 해답을 찾았으면 그 답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그 답에 묶여서 더 이상 화두 참구에 진척이 없다.

또한 수행의 긴 여정에서 초심의 기세당당함은 시간이 흐르면서 의기소침으로 바뀌기 쉽고, 허상(魔境)을 깨달음으로 착각하여 옆길로 샐 수도 있다. 타성에 젖어 화두를 드는 것도 아니고 들지 않는 것도 아닌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수행 도중에 생기는 이러한 장애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독참이다. 독참이 거듭되면서 스승의 선적인 안목과 힘에 의해 수행자의 뿌리 깊은 아집이나 머리 굴림은 박살나고, 수행자는 스스로 자신의 문제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또한 다음 독참 때에는 바른 견처를 보여야 하기 때문에 수행자는 화두 참구 외에는 잠시도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한다.

독참에서는 화두 참구만 점검받는 것이 아니다. 수행자가 의기소침에 빠져 있으면 스승은 의욕을 불러일으켜 수행에 매진하도록 한다. 수행자가 자기도 모르게 타성에 젖어 있거나 심신의 편안함만 즐기고 있으면, 스승은 눈이 번쩍 뜨이도록 꾸짖어서 진정한 수행의 길을 걷게 한다.

수행자는 이렇게 독참을 통해 혼자서는 도저히 뚫기 어려운 관문을 뚫어 나간다. 독참을 체험해 보면, 선은 스승의 지도 없이는 힘들고, 학문은 독학이 가능하나 선은 독학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다. 선이 누구에게서 누구로 진리가 이어져 왔는가를 밝히는 법맥(法脈)을 중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를 향한 절절함과 힘을 불러일으키고 유지시키는 독참은 선의 본고장 중국 선종이 창출한 탁월한 선 지도 방법이며, 천 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것이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83호 / 2015년 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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