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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토론’에 토론은 없었다

“당신은 그렇게밖에 살 수 없어?!”하는 물음에는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까?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해야 할까? 아니면 “당신이나 잘 사세요”해야 할까? 이런 식의 문답은 토론이 아니다. 비난이니 꾸짖음은 토론으로 전개될 수 없고, 어떤 생산적인 결과도 낳을 수 없다.

요즈음 한창 뜨거운 열기를 탔던 청문회의 방식도 전혀 토론과는 다르다. 어떤 인물이나 사안의 이면까지 꼬치꼬치 캐내고, 문제가 없는가를 검증하는 과정과 토론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목적이 다르고 방법 또한 다르다.

부적절한 논점을 가지고 강변을 하거나, 자신을 포장하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토론의 진행을 근본적으로 가로막는다. 예를 들어 보자. 주택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를 두고 토론이 되고 있는 마당이라 하자. 거기에 주택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가를 열심히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하자. 거기에 대해 무어라 할 것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다. “누가 아니랍디까?” 지금은 그러한 문제의식은 이미 공유하고, 그 구체적인 방안을 찾는 마당이다. 이미 공유한 문제의식을 열심히 강조하는 것은 얼핏 그 사람의 열정과 순수성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는 있을지언정 토론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토론의 진행에 발목을 잡게 마련이다.

토론에는 언제나 서로 다른 입장과 시각이 있다. 다른 입장과 시각이 없다면 토론을 할 필요가 없다. 그 때에는 한 목소리로 주장을 하면 된다. 공동성명을 내든가. 다른 입장이 있다는 것은 꼭 나쁜 것이 아니다. 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시각을 교정받기도 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일깨워 주기도 하면서 보다 나은 결론을 도출해 내고자 하는 것이 토론의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과 상대방의 다른 지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신은 이러한데 나는 이러하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인식의 차이가 있고, 해결 방법의 차이가 있다. 혹 지향점 자체에 차이가 있다면 그건 좀 심각하다. 그래도 거기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통해 함께 나아갈 바탕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 토론이다.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면서 비로소 토론이 된다. 물론 격렬한 공방이 오갈 수 있다. 내가 보는 시각이 옳고 당신이 보는 시각이 틀렸다, 내가 제시하는 방법이 옳고 당신이 제시하는 방법이 틀렸다고 분명히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토론은 시작한다. 그러나 거기엔 당신이 맞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하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일방통행 식으로 나와 내 주장을 밀어붙이려는 곳에는 토론이 있을 수 없다. 그 이전에 당신은 틀렸다고만 외치고, 내 시각과 내 방법이 이러하다는 것을 내놓지 않으면 또한 토론이 진행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기 때문이다.

논하고자 하는 문제의 초점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으면 토론이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어 승풍의 문제를 논하면서, “나는 승풍의 타락이 이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면, “그런데 당신은 승풍의 타락 문제가 이정도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증거는 당신의 이러이러한 언행에 있다”고 말하면서 논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면 승풍 타락 문제에 대한 상황인식의 문제로 논점이 좁혀진다. 만약 상황 인식이 공유되면 그 다음 “나는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당신은 이런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실효성이 없고…”하는 방식으로 해결방안의 문제로 토론의 초점이 잡힐 수 있다. 그런데 상황인식이 문제라는 것인지 해결방안이 문제라는 것인지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원점에서 논의가 맴돌게 된다.

두 번의 ‘끝장토론’ 현장의 중심에 있었다. 개인적 역량의 부족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정도의 인식은 바탕에 있어야 불교계에 토론 문화가 정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 tysung@hanmail.net


[1283호 / 2015년 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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