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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1칙 무제와 달마의 문답 (6)

“거듭해 봐도 반 푼의 값어치도 없군…코앞까지 왔는데”

▲ 보성 대원사 극락전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 중 달마대사 부분. 이 벽화는 불전 내부 동·서 벽면에 관음보살도와 달마도를 배치한 독특한 사례이자, 청도 운문사 관음보살·달마대사 벽화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참구]
<본칙> 무제가 물었다.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

달마대사가 말했다.

“모릅니다(不識).” (착어 ← 쯧쯧! 거듭해 봐도 반 푼의 값어치도 없군.)

양무제를 가둬버린 이론갑옷에
달마가 쏜 선의 화살 튕겨나가
‘모른다’로 거듭해 진리 보여도
‘확 트인’ 세계 알아채지 못 해

달마의 자비심 높이 사면서도
대낮에 불 켠 짓으로 본 원오
해매는 무제를 애타게 바라봐

많이 알아도 두려운 것이 죽음
갇힌 마음 자각할 때 선은 시작
알음알이 집합 ‘자기’ 내려놔야
“목 가려워도 대신 기침 못해줘”

달마대사는 “모릅니다(不識)”라고 말함으로써 진리 그 자체가 된 자신의 진면목을 남김없이 보여 주었다. 그것은 어떤 성인(聖人)도 알 수 없다. 왜 그럴까? 달마대사의 “모른다”에 사무쳐 보라. 온 천지에 “모른다”뿐일 때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달마대사의 “모른다”에는 ‘안다’도 발붙일 틈이 없고, ‘모른다’도 발붙일 틈이 없다. 이것을 만나면 이것이 되지만 이것에 물들지 않고, 저것을 만나면 저것이 되지만 저것에 물들지 않는다.

달마대사의 “모른다”는 앞의 화두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廓然無聖)”와 같을까, 다를까? 이에 대해 원오 선사는 송에 대한 평창(해설)에서 “눈 밝은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우매한 사람은 필시 둘을 다르게 볼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본칙의 평창에서는 “달마대사는 자비심이 너무 많아서 다시 그에게 ‘모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고 제창하고 있다. “모릅니다”라고 한 것이 달마대사의 자비심에서 우러나온 대답이라는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일구(一句)를 깨치면 천구(千句)·만구(萬句)를 단박에 깨친다고 했다.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일구(一句)를 완벽하게 깨달았으면 “모른다”라는 일구(一句)도 곧바로 꿰뚫어 안다. 달마대사가 “모릅니다”라고 한 것은 모자 위에 모자를 쓴 격이다.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는 한마디로 충분한 것을 재차 “모른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는 양무제. 그러나 달마대사는 저버리지 않고 양무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다시 보여준다. “모릅니다”라고. 이러면 알까 저러면 알까, 그래도 모르겠는가? 달마대사의 자비심이 펑펑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원오 선사는 달마대사가 자비심이 너무 많다고 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팔목에 낀 팔찌가 한 치나 헐렁하건만
(約臂黃金寬一寸),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임을 그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네(逢人猶道不相思).”

늘 임 생각뿐. 그리워하고 그리워하여 수척해진 몸, 팔목의 금팔찌는 한 치나 헐렁해져 버렸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립지 않다고 말하지만, 숨기는 그만큼 연모의 정은 더욱 깊어 간다. 여윈 한 치, 그것은 온몸으로 운 눈물이 아니던가. 선에서의 스승도 마찬가지다. 제자를 위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생각을 다한다. 어떻게 하면 제자가 알아차릴까? 오직 그 생각뿐이다.

한편, 원오 선사는 착어에서 달마대사의 “모른다”에 대해 다른 어조로 평하고 있다. 그는 “쯧쯧! 거듭해 봐도 반 푼의 값어치도 없군”이라고 비아냥거린다.

눈앞에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진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구나. 말한 만큼 흠이 생긴다는 것을 모르는가, 쯧쯧. 앞서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고 한 것도 이미 햇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대낮에 쓸데없이 등불 켜는 짓이었는데, 또 “모른다”라니? 반 푼의 값어치도 없는 말만 계속하고 있다는 질타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양무제의 눈을 뜨게 해주려는 달마대사의 극진한 마음을 한없이 높이 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종 오가 중의 하나인 법안종을 개창한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 선사가 수행승 시절 동료들과 행각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큰 비가 와서 개울이 넘치므로 잠시 성 서쪽에 있는 지장원에 들렀다. 이때 나한 계침(羅漢桂琛, 867~928) 선사를 뵈었는데, 계침 선사가 수행승 법안에게 물었다.

“어디를 가는가?”
“행각(行脚)하는 중입니다.”
“무엇이 행각인가?”
“모르겠습니다(不知).”
“모른다는 것이 딱 맞다(不知最親切).”

이 말에 법안은 번쩍 깨달았다.

위의 대화에서 ‘딱 맞다’고 번역한 것에 해당하는 원어는 ‘친절(親切)’이다. 선 문헌에서 사용되는 ‘친절(親切)’이란 용어에 대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친절을 베풀다’라는 용례에서처럼, ‘대하는 태도가 매우 정겹고 고분고분함(kindness)’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큰 오해다. 기존 번역들에서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된 것이다. 선 문헌에 나오는 친절(親切)은 대부분 ‘딱 들어맞음’이나 ‘마음에 깊이 와 닿음’을 뜻한다.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는 진실을 잃고, 어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는 깨달을 수 없다(承言者喪, 滯句者迷)”고 했다. 진리는 말로 설명하면 할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

“모른다”를 머리로 이해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고, 다른 사람은 또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양자는 모두 선에서 십만 팔천 리 멀어져 버린다. 각자 스스로 온몸으로 깨달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본칙> 무제는 알아채지 못했다. (착어 ← 애석하구나. 바로 코앞까지 왔는데.)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라는 양무제의 질문에 달마대사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했고, 양무제는 이 말에도 눈앞의 진리를 보지 못했다. 이에 대해 원오 선사는 평창에서 날카롭게 평한다.

“무제는 눈만 두리번거릴 뿐, 어디가 핵심인지,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문제가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문제 삼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사각 나무는 둥근 구멍에 들어가지 못한다(方木不逗圓孔)’는 말이 있다. 서로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맞추어 보려고 한들 힘만 들 뿐 결과는 뻔하다. 달마대사가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 “모른다”라는 두 개의 화살을 쏘았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양무제의 눈에는 인도에서 온 대사가 자신을 놀리는 듯이 동문서답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원오 선사의 말대로 이쯤 되면 문제가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문제 삼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경이 되어 버렸다. 양무제도 인내하는 데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양무제가 노여워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버렸을 것 같은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에 대해 원오 선사는 “애석하구나. 바로 코앞까지 왔는데” 하며 조롱하는 듯한 착어를 붙이고 있다. 달마대사가 “확 트여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양무제는 더 이상 교리로 분석하고 분별해도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분석·분별하는 마음을 멈췄어야만 했다. 분별하는 마음이 멈추면 진리의 세계는 저절로 나타난다.

어떤 것에 대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것은 헛일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자신의 화에 대해 아무리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고 변명해도 화의 뿌리는 뽑히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할 때, 누군가에게서 받은 모욕과 배신에 대해 아무리 울분을 토해도 마음은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할 때,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해 아무리 책을 읽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해도 여전히 죽음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자각할 때, 선은 거기서 시작된다.

그러나 양무제는 이론의 갑옷에 눌려서 이론의 갑옷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확 트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그는 이론의 갑옷을 입고 있지 않으면 불안했고, 벗으면 바보가 되는 것만 같이 느꼈을지 모른다.

이를 꿰뚫어 본 달마대사는 다시 “모릅니다”라는 선의 화살을 쏘았다.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을 때, 양무제는 눈치를 채고 뭐라고 한마디 던져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떤 선심(禪心)의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이론의 갑옷이 워낙 두꺼워서 선의 화살을 맞아도 맞은 흔적조차 없이 튕겨 나갔다.

온갖 알음알이의 총집합체인 ‘자기’를 내려놓을 때 무시겁래(無始劫來)의 무거운 짐이 내려진다.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을 때, 이 무거운 짐을 일시에 내려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애석하기 그지없구나. 남대문 앞에서 남대문인 줄 모르고 헤매고 있다니, 이런 멍청한 사람. 또 한 생을 날리게 생겼구나.

그래서 원오 선사는 “애석하구나. 바로 코앞까지 왔는데”라는 착어를 붙여서, 진리 속에 살면서 진리를 찾아 밖으로만 헤매고 있는 무제를 한심한 듯하면서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양무제가 알음알이 덩어리인 ‘자기’만 내려놓았더라면, 달마대사의 은덕으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목이 가려워도 누가 기침을 대신해 줄 수 있겠는가?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84호 / 2015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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