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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 배, 늪에 산 감췄지만 짊어지고 달아나는 이를 몰라

늪과 산 이야기
들으니, 장생이 말하기를 “골짜기에 배를 감추고 산 전체를 늪 속에 감추고 나서 단단하게 감추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힘이 센 자가 등에 짊어지고 달아나버리는데도 깜깜한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라고 하였다.[감산 스님은 천진의 상태를 유형의 존재에 감추는 것은 배를 골짜기에 감추는 것과 같고 유형의 존재를 천지에 감추는 것은 산을 늪 속에 감추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역자주]

이 말은 감추는 것이 있으면 짊어지고 달아나버리는 자가 있지만 감추는 것이 없으면 짊어지고 달아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감춤이 없는 것을 지극한 것으로 여겼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감추는 것이 있는 것이 감추지 않는 것에 비교해볼 때 더 낫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산이 옥을 품고 있으면 초목에 윤기가 돌고 강물이 보배구슬을 담고 있으면 강 언덕의 초목들이 시들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어서 밖으로 광채가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군자는 몸속에 그릇을 저장해 놓았다가 시절인연을 기다린 연후에 활용하는 것이다. 또 산은 쌓은 것이 두텁기 때문에 높아서 온갖 아름다움이 갖추어지고 늪은 쌓은 것이 깊기 때문에 낮아서 온갖 덕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상(象)을 취하는 군자들은 잘 활용할지어다.

꿈에서 깨어나기
환인(幻人)이 바야흐로 하나의 갈대 잎 같은 조각배를 타고 환해(幻海)에 이르러 넓은 바닷물과 함께 광막한 곳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때마침 부유(浮遊) 선생이 다가오더니 질문을 하였다. “아! 기이하십니다. 내가 당신의 곤궁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형색을 보니 구름처럼 표표하고 얼굴을 보니 얼음처럼 서늘합니다. 속을 두드려 보면 텅텅 비어있지만 다가가면 온기가 있으며 풀어헤쳐보면 깊고도 깊습니다. 꽁꽁 묶으면 가슴이 답답한 듯도 하고 넓은 바다에 띄우면 묶이지 않은 배를 타고 있는 듯합니다. 이리저리 살펴보면 사람 같기도 하고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어느 곳에 계시면서 무슨 일을 하셨길래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습니까?”

환인이 응답을 하지 않고 그저 침묵만 지키면서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도 없고 말해주는 것도 없이 함께 침식하고 앉고 눕고 음식을 먹고 자나 깨나 기거하면서 틈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열흘이 되었다. 부휴 선생의 마음이 바짝바짝 타고 생각이 녹아버려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부휴 선생이 떠나려 하면서 환인에게 청하였다. “저는 풍파에 휩쓸려 있는 사람입니다. 바라건대 배를 빌려주십시오. 그러면 풍파에 떠있는 사람이 피안으로 갈 때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럴 의향이 없으십니까?”

환인이 말하였다. “앉아보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대는 꿈꾸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단 말이오. 그가 장야에 잠이 들면 반드시 잠에 푹 빠져서 깜깜해진 상태에서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갖 걱정으로 두려워서 벌벌 떱니다. 몸은 시체처럼 되었는데 마음은 도깨비처럼 되어서 가만히 있으면서 자리를 옮기지 않았는데도 온갖 기괴함이 생겨납니다. 시간이 잠깐 더해지는 것도 아닌데 천년이 흐른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껌껌하고 막막한 곳에 이르러 방황하면서 사방을 둘러보는데 혹 끝없는 산꼭대기를 올라가기도 하고, 혹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연못에 다다르기도 합니다. 독룡이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사나운 짐승이 뒤에서 쫓아오기도 합니다. 나아가자니 위태롭고 뒤로 가자니 위험하여 어디로 들어가고자 해도 틈이 없고 올라가려고 해도 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게다가 마른 가지를 부여잡고 썩은 등넝쿨을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벌과 전갈이 눈동자를 쏘려할 때도 있고 뱀이 다리를 칭칭 감을 때도 있습니다.”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kibasan@hanmail.net


[1284호 / 2015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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