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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의 보루이자 승군의 뿌리…‘땅밟기’ 등 개신교 만행에 몸살

  • 사회
  • 입력 2015.03.06 17:28
  • 수정 2015.03.06 23:26
  • 댓글 1

‘봉은사역’ 유래 된 봉은사는 어떤 사찰?

서울의 중심부, 강남을 대표하는 도량으로 손꼽히는 봉은사의 위상은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1200여 년의 세월을 이어온 봉은사는 역사의 흥망성쇠를 민족과 함께 겪어온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특히 학자들은 “조선시대 억불숭유정책 아래서 불교의 명맥을 이어 민족문화유산의 씨앗을 보존했으며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승병의 씨앗이 잉태된 곳이라는 점에 봉은사 역사의 방점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봉은사역’이라는 역명 또한 이런 역사성을 두루 감안한 결정이다.  그럼에도 1200여년 역사의 현장을 일제 강점시기의 왜곡된 사회 잣대를 들이대 ‘친일 사찰’로 규정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탄압을, 일제 강점기에는 사찰령의 오욕을 견뎌온 봉은사는 오늘날에 이르러 이같은 개신교계의 무차별한 훼불에 또 다시 몸살을 앓고 있다.

신라 794년 창건…1200년 역사
억불숭유 조선서 불교명맥 지켜
승과평 통해 사명․서산대사 배출
임진왜란 맞아 구국․구민 선봉에
조선말엔 추사 김정희 활동무대
1929년 대홍수 때 나청호 주지
708명 구조…정재 풀어 구호도

개신교, 땅밟기․협박성 편지 등
공격적 선교 행위 끊이지 않아
“용서․인욕했더니 이젠 역사왜곡
파사현정으로 갈등 확산 막아야”

신라 원성왕10년(794년) 연회(緣會)국사가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된 봉은사가 지금의 이름을 얻은 것은 조선시대 이르러서다. 연산군4년 정현왕후가 선릉의 원찰로 중창한 후 사찰명을 ‘봉은사’로 바꾸면서다. 이후 명종 3년(1548년) 허응당 보우 스님이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은 후 조선불교 중흥의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명종 6년 승과가 부활하며 봉은사는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의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이에 저항하는 유생들의 폐불행위도 점점 극심해져 보우 스님을 모함하며 죽일 것을 청하는 상소를 한 달 넘게 올라오기도 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봉은사에는 승과평이 설치, 1550년 승과가 부활했다. 그 결과 조선불교를 이끌 거장들이 이곳에서 배출됐다.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스님, 사명대사 유정(1544~1610) 스님을 비롯해 승과를 통해 배출된 스님들이 40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전국의 사찰을 복원하고 제자들을 배출하며 꺼져가던 불교의 불씨를 다시 살려냈다. 특히 승과를 통해 배출된 스님들은 40여 년 후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승군의 구심점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70세의 노구였던 서산대사 휴정 스님은 왕명을 수락, ‘팔도선교십육종도총섭(八道禪敎十六宗都摠攝)’에 임명돼 승군의 선봉에 나섰다. 서산대사는 전국에서 승군을 일으켰는데 이렇게 일어난 스님들은 황해도의 의엄 스님, 관동의 사명대사 유정 스님, 호남의 뇌묵 처영 스님 등의 승병장을 선봉으로 전국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특히 사명대사는 왜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포로 1400여 명을 구해오는 등 국가와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주역이었다. 보우 스님이 봉은사를 중심으로 펼친 조선불교의 부흥과 승과의 복원이 결국 나라를 구하는 초석이 된 것이다.

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는 “봉은사는 임진왜란 극복의 씨앗이 잉태된 곳이었을 뿐 아니라 남한산성을 축성하고 병자호란 때 의승군을 일으킨 각성 스님 또한 봉은사 주지로 구국의 선봉에 서는 등 헤아릴 수 없는 역사의 중심무대였다”며 “일제 강점기의 굴곡된 단면으로 봉은사의 역사성을 단정하려 든다면 그들의 역사 인식을 오히려 되물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일보가 ‘봉은사, 대표적 친일사찰이었다’는 기사에서 ‘대표적 친일 인사’로 지목한 나청호 스님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스님은 1925년 7월 한강을 덮친 일명 ‘을축년 대홍수’ 때 직접 배를 띄워 떠내려 강물에 휩쓸려 가는 사람들을 무려 708명이나 구해낸 주인공이다. 당시 청호 스님은 1000여 가구, 4000여 명의 주민이 대피한 가운데 지금의 잠실 인근 느티나무 두 그루에 700여 명이 스님들이 올라가 구조를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뱃사람을 수소문해 구조에 나설고자 했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스님은 인명을 구조해 오는 사람에게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하고 뱃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신천리까지 가서 노약자와 어린이부터 차례로 배로 옮겨 봉은사로 돌아왔다. 청호 스님은 인명 구조 활동 후에는 사중의 모든 재물을 풀어 삶의 터전을 펼친 이재민 구호활동을 펼쳤다. 이에 인근 주민들이 앞장서 봉은사에 ‘수해구제공덕비’를 세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일제가 제정한 사찰령에 의해 임명된 주지이지만 그의 행적을 ‘친일’로만 단정할 수는 없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억불숭유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불교의 명맥을 당당히 이어온 봉은사는 현대에 이르러 개신교계의 무분별한 선교에 또 다시 몸살을 치러야 했다. 지난 2010년 10월 전 국민의 공분을 불러온 개신도교들의 ‘봉은사 땅 밟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 2010년 발생한 일부 개신교도들의 훼불 동영상 중 일부. 일명 '봉은사 땅밟기'로 알려진 이 동영상은 개신교도들이 경내에까지 난입한 충격적 사건인 동시에 공격적 선교 행태의 심각성으로 개신교계는 국민적인 지탄을 받았다.

개신교도들이 사찰 경내와 법당을 돌아다니며 ‘사찰이 무너지길’ 기도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제작, 온라인에 게재하는 만행에 불교계는 경악했다. 특히 동영상에 등장하는 개신교도 중에는 “(서울) 도심의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이렇게 큰 절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놀랐다”며 “이 땅이 하나남의 땅이라고 선포했다”고 말하는 등 광신적 행위의 단면을 드러내 실소를 넘어선 심각한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땅 밟기를 자행한 개신교도들에 대한 여론의 질타와 함께 일부 개신교계가 전국의 사찰 뿐 아니라 해외의 불교국가에서까지 무차별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땅 밟기 동영상들이 쏟아졌다. 이와 함께 비난 여론이 급증 개신교계 전체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파국으로 치닫자 해당 영상의 당사자들이 서둘러 봉은사를 방문,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들끓던 봉은사 여론은 “강력 대응”에서 ‘한 번 더 자비와 용서’로 선회했다. 당시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은 이번 사태를 “일부 개신교계의 몰지각한 행동”으로 덮어주며 “종교간 화합과 배려”를 당부하기도 했다.

▲ '봉은사 땅밟기'가 알려지며 개신교계를 향한 국민 여론이 악화되자 관계자들은 서둘러 봉은사를 방문 사과했다. 당시 봉은사는 이들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더이상의 대응을 자제했다.

하지만 이웃 종교에 대한 몰지각한 배타행위는 이후에도 근절되지 않았다. 2012년 10월에는 개산대제를 하루 앞두고 봉은사 진여문 앞에서 개신교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포교용 CD로 위장한 개신교 목사의 설교 CD를 배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가하면 지난 1월6일에는 봉은사에서 소임을 맡고 있는 국장 스님 앞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지옥에 와있다”는 성경 구절을 내세워 “늦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함께 천국에 갈수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가 도착해 무차별한 선교행위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음을 증명했다.

▲ 지난 1월 봉은사의 한 국장 스님에게 배송된 익명의 기독교도 선교 편지. 훼불에 버금가는 내용들이 들어 있어 봉은사 대중들을 경악시켰다.

그러나 당시 봉은사 측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일부 몰지각한 기독교계의 행위로 이해하며 사회적 문제로 확대시키지 않았다. 당시 봉은사 관계자는 “일부 기독교계의 그릇된 활동이 종교간 화합이 저해되는 것이 더욱 우려스럽다”며 “스스로 각성하고 참회할 수 있길 바란다”고 자비문중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봉은사의 인욕과 용서는 결국 일부 개신교계에 의해 봉은사의 역사가 ‘친일사찰’로 매도되는 결과로 돌아온 셈이다. 

▲ 2012년 10월 개산대제를 하루 앞둔 봉은사 앞에서 법문을 가장한 선교용 CD가 배포됐다. 기독교계의 선교행위가 점점 더 교묘해지는 동시에 상식을 벗어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전준호 대한불교청년회장은 “일부 개신교계의 무분별하고 공격적인 선교활동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역사 왜곡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며 “종교간 갈등 확산을 막기 위한 불교계의 용서와 이해 못지않게 이러한 갈등 학살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함께 파사편정의 자세로 종교편향에 대응하는 불교계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285호 / 2015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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