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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휴머니즘

기자명 함돈균

오래 전에 작고한 거물 시인 김수영의 산문 중에는 “참다운 노래가 나오는 것은 다른 입김이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입김/ 신의 안을 불고 가는 입김”(릴케 ‘오르페우스에 바치는 송가’)이라는 릴케의 시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반시론(反詩論)’) 김수영은 릴케를 통해 시가 세상의 얄팍한 유용함이 가닿지 못하는 무망(無望)하고 참된 신의 입김이라는 생각에 접근한다. 그런데 이 산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릴케의 ‘신의 입김’에서 ‘담배연기’를 연상하는 대목이다. 늘 줄담배를 피며 시 쓰는 자신을 보면서 그는 시가 나오는 입김과 담배연기가 나오는 입김이 다르지 않다고 여겼던 듯하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이라면 이런 얘기가 농담만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금연을 선언한 한 유명 시인이 요즘 글이 안 써진다면서 자기 시의 대부분은 담배연기였나 보다고 푸념하는 말을 들었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창작은 ‘지금 현실’의 익숙한 육체감각에서 벗어나 ‘다른 현실’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때 상당한 초조함을 견디며 메마른 감각의 골짜기를 넘어가는 시간이 불가피하다. 많은 작가들에게 담배는 이 고독하고 메마른 길에 유일한 동행자가 되곤 한다.

최근 한 선배학자에게 들은 담배 얘기는 인상적이었다. 그는 담배를 군대에서 고참이 된 후에야 배우게 됐다고 한다. 군대에 가 보니 훈련이나 작업 중에 담배를 피는 시간만은 예외적인 휴식시간으로 인정해 주더라는 것이다. 그는 졸병 때에도 담배를 배우지 않고 견뎠지만, 오히려 고참이 된 후에 졸병들에게 휴식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라도 담배 피는 시늉을 할 필요가 있었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이 ‘담배 휴머니즘’은 사회의 ‘노가다판’에서도 마찬가지다. 건설현장의 인부는 잠시 허리를 펴고 숨 돌릴 시간이 작업 중간중간 필요하지만, 관리자 눈치 때문에 그냥 쉴 수는 없다. 담배로 ‘숨 쉬는 시간’은 이때 짬짬이 휴식시간의 통로가 된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담배는 여학생들의 정치적 개인선언 같은 느낌도 있었다. 법적인 남녀평등이 실제 현실과는 상당한 괴리를 지닌 표리부동한 사회에서 담배 피는 여학생들의 무의식은 은연 중에 취향의 문제를 여성 억압에 대한 정치적 항의 표시 비슷한 것으로 전유하기도 했던 것이다.

담배세 인상으로 대표되는 현정부의 ‘건강정책’은 명백하게 더 정치폭력적이었던 과거 어떤 정부보다 모양새로는 훨씬 더 비겁해 보인다. 담배를 만악의 근원처럼 얘기하면서도 담배를 정부가 독점판매 하는 전매사업의 논리적 모순은 모른 척한다. 복지 문제처럼 건강한 삶의 질에 토대가 되는 논의들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동네깡패가 힘없는 행인들에게 ‘삥 뜯어가듯’ 여기저기서 유리지갑이나 서민들 주머니나 터는 이 나태한 행태에서는 국가 수취 행위에 응당 깃들어야 할 엄격함·공평무사함·품위란 당체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정작 얘기하고 싶은 것은 좀 다른 얘기다. 담배는 의학담론이나 국가담론 같은 기계적 논리로 일사불란하게 통제할 수 있는 70년대식 산아제한정책 같은 게 아니란 얘기다. 담배는 물리적이고 공식적으로 짜인 세계의 틈새에 ‘다른 숨쉬기’ 공간이 넓게 존재하는 게 사람살이란 걸 알려준다. 김수영이 ‘신의 숨결’에서 담배연기를 연상했을 때, 그의 시적 무의식은 이 다른 숨쉬기 공간이 개방하는 삶의 구체적 체험들에 닿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허파로 숨을 쉬지만 ‘사람살이’는 물고기 아가미마냥 생물학적 허파만으로 숨 쉬지 않는다. 육체와 정신을 아우르는 삶의 총체적인 건강 문제는 회피하면서 ‘허파’에만 집중된 정책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이러한 일들이 삶의 경험에 대한 인문적 무지에 기초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숨쉬기’ 공간에서 숨을 돌려왔던 이들에게 얼마나 큰 모욕감을 주고 있는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정부가 지금 외치는 ‘문화융성’ ‘인문학 진흥’도 사람과 사람살이의 세부에 대한 관점의 깊이를 확보하는 일 그 외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husaing@naver.com


[1285호 / 2015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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