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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락산 학림사-용굴암-내원암

물과 구름 사이에 남긴 삼학의 자취를 꺼내보다

▲ 초의와 추사의 첫 인연이 맺어진 학림사 산길에 봄 햇살이 내려앉았다.

"자네는 집 밖 쫓아다니고 나는 집안에 앉아 있네. 집 밖에 있는 건 무엇인가?"

설악산과 소백산에 변산바람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니 봄이라 해야 할까? 하나, 며칠 전에도 눈이 내린 서울이다. 봄이라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어야 봄이니 서울의 봄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햇살은 춘삼월 기운을 담아 따듯하다. 그 햇살, 일주문 현판에도 앉았다. 수락산 학림사(水落山 鶴林寺)!

▲ 학림사 전경

고고함을 상징하는 두루미와 연관 있을 터. ‘학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는 학포지란(鶴抱之卵)에서 유래됐을 게다. 일주문에서부터 대웅전으로 이어진 108계단을 따라 오르니 금방이라도 날아갈듯 한 청학루(靑鶴樓)가 남쪽을 향해 서있다. 어디로 날아가려는가? 그 등에 올라 타 볼 일이다. 저 앞에 보이는 산, 가만 보니 묘한 형상이다. 고개를 옆으로 40도 기울여 보니, 히야! 부처님께서 누워 계신다. 불암산이다! 법문 한 마디 듣고 싶었던 게다. 아니다. 법음 듣고자하는 세상 사람들, 부처님 품안에 안기고 싶은 중생들을 제 등에 태워 저 불암산으로 데려다 주고 싶었던 게다.

▲ 수령 600년의 학림사 반송.

청학루에서 내려와 대웅전을 바라보는 순간 그 옆에 서 있는 소나무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수령 600년의 반송이 내뿜는 기풍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학림사 참배 후 산을 오르는 내내 그 반송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200년 전 초의와 추사의 첫 만남을 저 소나무는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박동춘 소장(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이 번역한 초의선사의 ‘제해붕대사영정첩’을 따라 그 날을 그려보자.

때는 초의선사가 수종사에서 겨울 추위를 피해 이곳 학림사로 발길을 돌려 해붕대사를 모시고 살았던 1815년 어느 날이다. 추사가 눈길을 헤치고 해붕대사를 찾아와 토론을 벌였다. 주제는 공(空)과 각(覺), 그리고 소생(所生)이었다 한다. 추측컨대, “이 세상에 실체라 할 만 한 건 없다”는 해붕대사의 단언에 추사는 “그렇다면 지금 ‘실체가 없다’고 말하는 내 앞의 해붕은 무엇이냐?” 따져 물었을 법하다. 학덕 높은 사람이라는 소문만 들으면 달려가 패기 넘치는 담론을 즐기던 추사가 아니었던가. 한 겨울 서릿발보다 더 매서운 법거량이 수락산을 송두리째 흔들었을 터.

▲ 용굴암 석굴법당.

하나, 특출한 재기가 있어도 공의 이치를 확연하게 간파하지 못하면 깨달음은 요원하다 했다. 밤새 토론을 벌였겠지만, 그날 밤 추사는 선풍에 실려 전해져 오는 보물을 쥐지는 못했다. 돌아가는 추사에게 해붕대사는 글 한 줄을 써 건넸다.

‘그대는 집 밖을 쫓아다니고 나는 집안에 앉아 있네. 집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집안에는 원래 번뇌가 없네.’

해붕의 일갈은 분명 추사의 장도(壯途)에 나침반이 되었을 게다.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인 1856년 5월 추사가 ‘해붕대사화상찬’을 지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승주 선암사에 있는 해붕대사 진영에는 스님을 향한 추사의 존경심이 오롯이 담겨 있다.

해붕과 추사의 법담을 묵묵히 지켜보았던 초의. 평생을 도반으로 지낸 두 사람의 첫 인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제주도 유배시절에도 추사는 “스님(초의)과 함께 한 죽로(차 마시는 일)의 옛 인연을 다시 잇지 못함이 한스럽다” 했고, 초의는 이에 화답하듯 무려 다섯 차례나 망망대해를 건너 추사를 만났다. 초의는 훗날 추사를 이렇게 회고했다.

‘추사공과 나는 신의가 두터워 경모하며 서로 경애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

바람살이 제법 차다 싶더니 어느덧 용굴암에 닿았다. 자연석굴에 봉안된 나한상이어서인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1882년(고종 19)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에 밀려난 명성황후는 이 바위굴 16나한상 앞에서 7일기도를 드렸다. 우연일까? 명성황후는 궁으로 돌아간 후 다시 집정하게 됐다. 부처님 공덕이라 생각했던 명성황후는 후사금을 내렸고 이내 법당이 지어졌다. 물론 아주 작은 암자였고 지금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2000년대 들어서다.

▲ 도솔봉에서 바라 본 수락산 주능선.

용굴암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미륵보살이 머문다는 도솔봉이다. 여기서부터 수락산 주능선이 펼쳐진다. 탱크바위, 철모바위, 배낭바위들이 길손을 반긴다. 남쪽의 불암산, 서쪽의 도봉산과 북한산도 한 눈에 들어오는 호쾌한 능선이다. 매월당 김시습을 기리기 위해 곰바위 정상에 지은 ‘매월정’도 어렴풋이 보인다. 석림사쪽으로 가면 매월정에 앉아 바람 한 점 안을 수 있지만 후일을 기약하고 내원암으로 향했다. 김시습이 10년간 머무른 터를 품은 그 절이다.

천재 김시습은 친구를 잃은 후 ‘죽음’에 천착했다. 누구도 그의 물음에 답을 못하자 송광사와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 머물며 그 화두를 풀어가고 있었다. 그의 나이 21살 때인 1455년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계유정난이라 불리는 세조의 왕위찬탈 사건. 이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3일 내내 통곡하고는 보던 책 모두 불사른 뒤 스스로 삭발하고는 승려가 되어 길을 떠났다. 중흥사를 떠난 지 얼마 안 돼 도착한 곳이 내원암일 가능성이 높다.

세조왕위 찬탈의 설계자 한명회는 권세를 앞세워 한강 인근에 자신의 별장과 정자를 지었다. 정자 이름은 압구정(狎鷗亭). 명나라 한림학사 예검이 지어준 이름이다. 권력과 재물만 탐하는 사람으로만 인식되어서는 안 되니 ‘갈매기와 더불어 한가로이 노닐며 살아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하나, 한명회는 성종 때까지도 권세를 이용해 부를 축적해 갔다.

한명회는 압구정에 자작시를 새긴 주련을 걸었다. ‘젊어서는 나라 돕고 늙어서는 강호에서 편히 쉬네(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지나가다 이를 보게 된 김시습. 세조의 전제정치에 초목들도 숨죽이고 있을 때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담아 노량진가에 임시 매장했던 그가 그냥 둘리 없다. 부(扶) 자리에 망(亡)을, 와(臥) 자리에 오(汚)를 써 넣었다. ‘젊어서는 나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 더럽히네.’ 결국 한명회는 그 주련을 내렸다.

▲ 내원암으로 이어지는 돌계단.

내원암으로 이어지는 돌길 옆으로 아직은 얼어붙은 금류폭포가 있다. 봄 햇살 더 받으면 한 여름의 위용을 찾아가겠지. 이 폭포는 저 아래 은류·옥류폭포로 이어진다. ‘물 떨어지는 산’ 수락산 이름에 걸 맞는 풍경이다. 김시습은 저 폭포를 보며 눈과 귀를 씻었을까? 수락산도 그의 발길을 잡지는 못했다. 시 ‘만의’에 담긴 심상이 대변한다.

‘만 골짜기 천 봉우리 밖에서/ 외로운 구름과 새 날아든다/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내겠지만/ 내년엔 어디서 머물 것인가/ 바람 잦아든 소나무 창가엔 고요함 머물고/ 향 스러진 방은 조용하다/ 이번 생은 이미 단념했기에/ 물과 구름 사이에 자취 남기리라.’

▲ 김시습의 흔적이 남아있는 내원암 전경.

청초한 학처럼 살다간 초의, 추사, 매월당의 자취가 남아 있는 수락산에도 이내 꽃망울 터지는 소리로 가득할 것이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서울 당고개역(지하철 4호선). 4번 출구로 나와 시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다 보면 학림사 표지판이 보인다. 성림아파트 앞에서 학림사 표지판을 확인한 후 1km 걸으면 학림사에 닿는다. 학림사에서 용굴암까지는 대략 1.8km(40여분). 여기서 정상까지 1시간이면 충분하다. 정상서 청학리 하산길을 따라 20여분 내려오면 내원암이다. 금류, 은류, 옥류폭포를 지나면 수락산 유원지. 버스역인 수락산마당바위입구에서 10, 10-5번 버스를 타고 다시 당고개역으로 돌아온다. 등산은 약 3시간. 하산은 1시간 정도 걸린다. 학림사 02)936-1700, 031)841-8794

이것만은 꼭!

 
수락산 오백나한전 : 석가여래상과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안치했는데 조선 중엽 옥돌로 조성했다. 작은 형태의 오백나한상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방아 찧는 혜능이 그려진 벽화가 눈길을 끈다. 약사전에는 석조여래좌상(서울지방문화재32호)이 안치되어 있다.


 
내원암 미륵불 : 대웅전과 영산전 사이에 서 있다. 제작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표현 양식으로 보아서는 조선석불로 짐작되지만 고려 미륵불상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1285호 / 2015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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