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 봉산수호로 형성된 사찰 숲

선왕 명복 빌고 목재 확보 위해 불교에 산림 기탁

▲ 영천 은해사의 들머리 솔숲. 은해사는 인종의 태실수호사찰(1546년)로 지정됐고, 이 솔숲은 종친부에서 1714년 사찰 입구의 땅을 구입해 소나무를 심은 것에서 유래한다.

1300년 전 진여원의 땔감숲(32ha)은 어떻게 오늘날의 월정사 사찰림(5782ha)으로 확대되었을까? 월정사 사찰림에 얽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 정확한 유래를 밝힌 기록은 없다. ‘자객으로부터 세조를 구한 고양이를 위해 사방 80리의 토지를 상원사에 하사했다’는 유래 또한 분명한 기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사찰에 땔감 숲 제공 전통
신라에서 조선까지 이어져

조선, 억불정책에도 불구
원찰을 늘리고 산림도 제공

임진왜란 후 산림 파괴되자
왕실, 사찰숲 봉산지정 보호

사찰림과 달리 사원전에 대한 기록은 다수 존재한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사원전(寺院田)에 대한 사급(왕이나 국가가 하사), 시납(신도의 기증), 두탁(농민들이 가렴주구를 피하고자 전지를 사찰에 기증하고 그 땅을 소작), 매입(사찰에서 매입)의 사례를 밝힌 기록들처럼 그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었다. 하지만 사찰 숲의 형성과정을 밝힌 기록은 쉬 찾을 수 없다. 국가(국왕)가 사원에 논밭뿐만 아니라 땔감용 산지도 나누어준 진여원의 사례처럼, 불교가 융성해짐에 따라 사찰도 늘어났을 것이며, 그에 따라 사원전이나 시지(柴地)의 하사 횟수도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고 있다. 태종실록(1406년)에는 ‘회암사, 표훈사, 유점사 이외의 사찰에도 시지 1, 2결을 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기사로 미루어볼 때,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고, 조선 초기에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양주 회암사와 금강산의 표훈사와 유점사 이외의 사찰에도 땔감숲을 왕실에서 하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각도의 사사(寺社)의 시지와 없어진 절의 기지(基地)를 상고하니, 합계한 전지(田地)가 253결(結)이 되는데, 요량(料量)하여 군자감(軍資監)에 소속시키기를 청합니다”라는 기록(세종실록 1427년)에 비추어 볼 때, 왕실은 각 사찰에 제공했던 시지를 필요에 따라 거두어들였음도 알 수 있다.

국가(왕실)에서 사찰에 하사한 산림에 대한 흔적은 사찰에서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자 설치한 금표(禁標)로도 확인된다. 명종실록(1550년)에는 “79개소에 이르는 내원당은 주변의 산에 금표를 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안동 봉정사가 관내의 산림을 너무 넓게 금표로 확정지어, 그 곳에 자라는 잣나무에서 일반 백성이 왕실에 공납하던 잣을 딸 수 없는 형편을 시정하라’는 지시(명종실록 1559년)도 내리고 있다.

봉은사 시지에 대한 명종실록(1559년)의 기록은 보다 구체적이다. “경기 백성들이 땔감을 채취하던 양근(楊根)·월계(月溪)를 거쳐 오고갈 때마다 봉은사가 매번 길가에 긴 푯말을 세우고 거기에 ‘봉은사 시장(奉恩寺柴場)’이라고 써둔 것을 보아 왔는데 ‘수사지(受賜地)’라 자칭하고 금표(禁標)를 세워 백성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라는 기록은 왕실 원당인 봉은사의 땔감숲이 얼마나 광대한지 간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이런 기록을 통해 국가(왕실)가 사찰에 산림(땔감숲 포함)을 제공하는 관행은 멀리 통일신라시대의 진여원 이래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사찰이 넓은 산림(또는 땔감숲)을 보유한 사실은 조선시대에 강력하게 시행된 억불정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 이면에는 왕실 원당이 있었다.

조선 왕실은 숭유억불에 따라 사원의 숫자를 제한하고, 사원전을 환수하고, 사찰 노비도 줄였다. 그렇지만 선왕의 능역을 지키는 능사(능침수호사찰)와 태실을 지키는 태실사찰(태실수호사찰), 선왕선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왕실기원사찰)도 필요했다. 학자들은 왕실기원사, 태실사찰, 능사(임란 이후는 조포사)는 순수 종교적 목적의 불교수도사와는 달리 지배계급의 목적에 따라 또는 지배계급의 각별한 보호를 받기 위한 상호 보험적 성격으로 건립된 사찰(원당)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성리학적 명분으로 불교를 억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선왕 선후의 영혼천도를 위해 불교에 의지하였던 왕실의 이중적 형태 때문이다.

왕실 원당은 능역과 태실이란 수호 대상(산지)의 특성상 산지수호의 업무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 반대급부로 광범위한 시지(또는 산림)를 확보할 수 있었다. 태종, 세종, 명종실록의 시지에 대한 기록들이 그러한 내용으로 양주 회암사는 태조와 세종의 원찰(왕실기도처)이었다. 또 금강산 표훈사와 유점사는 세조의 원찰이었으며, 봉은사는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가 묻힌 선릉의 능사였다.

능침사찰이 수행해야 할 산지수호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총독부가 1930년 발간한 ‘묘전궁릉원묘조포사조(廟殿宮陵園墓造泡寺調)’를 통해서 그 임무를 짐작할 수 있다. ‘조포사조’에는 능역의 보호 관리를 책임진 능침사찰의 승려는 “절 인근(능역 인근)의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도 함부로 베지 못하게 엄히 감시하라”는 지침이 수록되어 있다. 왕실이 능역과 태실 주변의 산림을 철저하게 보호한 이유는 풍수적 길지인 이들 장소가 훼손되면 왕조의 번영에 해롭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은해사 뒤편 태실봉에 자리잡은 인종태실.

유사한 사례는 직지사와 은해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2대 왕 정종은 즉위 직후 다른 곳에 있던 자신의 태실을 직지사 대웅전 뒤편의 북봉에 옮기고, 직지사를 태실수호사찰로 지명하여 태실 수호의 소임을 맡겼다. 직지사 주지는 수직군의 수장으로 태실 주변 30리 내의 산림에서 벌목과 수렵과 경작행위를 감시했다. 태실 주변의 산림을 태봉산(胎封山)으로 수호했던 소임 덕분에 직지사는 넓은 영유지를 확보하고, 억불의 시대에도 사세(寺勢)를 무난히 유지할 수 있었다. 직지사는 오늘날도 약 600ha의 산림을 보유하고 있다. 은해사 역시 1546년 인종의 태실수호사찰로 지정되면서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고, 종친부에서 사찰 입구의 땅까지 구입하여 대대적으로 소나무를 심었던 기록(1714년)도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억불정책은 더욱 심화되자 많은 사찰들은 위기에 봉착한 사원경제의 자구책으로 왕실 원당을 자임했다. 이러한 시대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조선 후기의 실록에는 사찰의 시지 사급 관련 기록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 왕실은 시지 사급 대신에 원당 주변의 산을 봉산(封山)으로 지정하여 그 관리를 사찰에 맡기고 있다. “삼남(三南)의 읍(邑)에 율목(栗木)을 분정(分定)하던 예를 혁파하고 구례현(求禮縣) 연곡사(燕谷寺)로 주재봉산(主材封山)을 만들어 율목을 장양(長養)하도록 하소서”라는 영조실록(1745년)의 기사는 사찰 산림이 봉산의 대안으로 제시된 최초의 공식기록으로 원당과 봉산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18세기 중반 이후 사찰과 봉산의 관계는 더욱 발전하여 “명산대찰의 산은 봉산이고, 절은 원당이므로 봉산은 곧 원당”(‘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으로까지 확대된다. 이렇게 확대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조선 후기의 산림황폐가 자리 잡고 있다. 16세기 말의 임진왜란과 17세기 중반의 병자호란은 극심한 산림황폐를 가져왔다. 양란 이후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고자 왕족과 권세가는 산림사점을 확대하여 산림파괴를 촉진시켰고, 공동체에서 이탈된 사회적 약자들은 화전과 개간으로 산림황폐를 심화시켰다. 산림황폐가 나라 전역에 확산된 상황에서 그나마 산림이 온전하게 보전된 장소는 사찰 주변이었다. 결국 왕실은 국용(國用) 임산물을 확보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사찰 주변의 산림을 봉산으로 지정할 수밖에 없었다.

송광사 산림부의 기록처럼 명산대찰은 대부분 원당이었을까? 원당에 관한 최근 연구에 의하면 조선시대 총 249개소의 사찰이 원당으로 지정되었고, 이는 조선후기 전체 사찰(시대에 따라 1363~1684개소)의 15~18%에 달했다. 이 수치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왕실의 명복과 능사와 태실 주변을 지키기 위해, 또 왕실 의례용 임산물인 숯[香炭]과 위패용 밤나무 목재[栗木]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원당(해당사찰)에 내려진 봉산수호의 책무는 봉산 일대에 대한 독점적이며 배타적인 이용권으로 발전하여 종국에는 사찰림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286호 / 2015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