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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해남 대흥사 부도밭

기자명 신대현

부도밭은 불교가 만든 또 하나의 문화공간…규모·공간미 압권

▲ 대흥사 부도밭.

절이 하나의 열린 박물관이라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경내 안팎이 신앙과 예술이 어우러지고 조화된 독특한 문화재로 장엄되어 있고, 산자락에 고즈넉이 자리한 절 주변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니 이 속에 있으면 저절로 기운이 샘솟는다. 자연과 점점 멀어져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만한 치유의 공간도 없을 것 같다. 절을 들어설 땐 잔뜩 지치고 허허롭던 마음이 절을 둘러보고 되돌아설 땐 넉넉하게 채워진 마음과 가뿐한 걸음으로 산문을 나서게 된다. 볼 게 많고 느끼는 게 많은 공간이 바로 절이다.

사찰은 하나의 열린 박물관
외부에 위치한 부도밭도
역사성 보여주는 대표 볼거리
부도밭 향한 관심 부족 아쉬워

대흥사 부도밭, 80여 기 운집
기라성 같은 고승대덕 발자취
조선시대 서산대사 부도는
시대적 한계 뛰어넘는 수작

단지 많은 사람들이 절에 가서 보는 대상이 주로 경내에 한정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전각 중심으로 집중돼 관람 포인트가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만일 그렇다면 절 주변의 많은 볼거리들을 놓치는 셈이기 때문이다.

특히 흔히 지나치기 십상인 대상이 바로 절 입구 산이나 언덕 자락에 자리한 부도밭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위치 탓에 오가며 눈길이 잘 닿지 않고, 설령 보았다 하더라도 막상 다가가기에 애매한 자리라서 그냥 멀찍이 바라만 보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다. 부도밭에 담긴 의미와 문화재적 가치가 적지 않기에, 여기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 서산 스님 부도.

부도밭은 ‘부도가 모여 있는 밭’이라는 말로 부도전(浮圖田)이라고도 한다. 부도는 스님이 입적하고 다비해서 나온 사리를 봉안한 것이니 한 사람의 일생이 다해야 새로 하나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부도가 많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 절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뜻도 된다.


부도 조성의 역사는 불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되었고, 모양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부도들을 한군데로 모아 부도밭이라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는지 정확히는 알수없다. 삼국과 통일신라의 절터에서 분명히 부도밭이라고 할 만한 공간은 보이지 않고, 이 기간 중에 부도밭에 해당하는 용어나 단어도 사용된 적이 없다. 이때까지는 일정한 공간을 두지 않고 형편에 맞게 사역(寺域) 주변에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부도나 탑비를 관리하고 봉향하기 위해 그 주변에 거주하기 위해 만든 건물을 뜻하는 부도전(浮屠殿)이라는 말은 고려 때 처음 나오니 아마도 부도밭은 이 무렵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 서산 스님 탑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진왜란 때 사찰 공간이 많이 파괴되어 전쟁 이후 부서지거나 흩어져 있던 부도들을 한데 모우기 위해 부도밭이 더욱 필요해졌다. 부도밭에는 부도만 아니라 비석도 두는데 이런 비석들은 주로 탑비(塔碑)다. 탑비란 한 스님 개인의 사적을 중점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입적 후에 세우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도와 한 쌍이나 마찬가지로 인식되어서 당연히 부도밭에 자리하게 되었다.

중국에는 곳곳마다 역대의 비석들을 한데 모은 비림(碑林)이라는 게 있어 그야말로 비석들의 숲에 들어온 것 같다. 우리나라에도 비석은 많이 있지만 이렇게 한데 모여 있지는 않아서 비림에 비길 만한 데는 없다. 대신 그 아쉬움을 부도밭이 채워준다. 수십 기의 부도와 탑들이 도열되어 있는 사이를 거닐면 그 속에 스며있는 색다른 장엄함이 느껴지고 몇 발 뒤로 물러나 전체를 바라보면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다. 우리 불교가 만든 또 하나의 문화공간을 대하는 느낌이다.

부도밭으로는 해인사·건봉사·미황사 같은 곳이 유명한데 모두 다 수십 기의 부도와 비석들이 촘촘히 모여 엄숙하고 장엄한 경관을 연출한다. 그 중에서도 해남 대흥사 부도밭은 공간미나 규모로 볼 때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전라남도 해남의 명산 두륜산의 주봉 가련봉과 노승봉·두륜봉 등 전부 8개의 봉우리가 활짝 핀 여덟 잎의 연꽃마냥 솟아올라 그 사이에 널찍한 터를 만들어 놓았고, 이 한가운데에 대흥사 가람이 자리한다. 두륜산 입구에 들어와 일주문을 건너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이라는 유선관(遊仙館)이 나오고, 이어서 한 아름 넘는 소나무 다섯 그루가 일렬로 서있는 모습 뒤로 부도밭이 펼쳐져 있다.

▲ ‘조선고적도보’에 기록된 대흥사 부도밭.

여기에 대흥사의 13대종사와 13대 강사를 포함한 역대의 여러 고승들의 부도 54기와 탑비 27기 등 모두 80기가 넘는 대덕들의 발자취들이 가득 모여 있다. 우리나라 부도밭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 같다. 열과 줄이 자로 잰 듯 아주 반듯하지 않지만 이런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시각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고, 또 널따란 마당에 가득 들어선 부도와 비석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걸어가다보면 지루함을 느낄새가 없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서산(西山)대사를 비롯해 풍담(楓潭)ㆍ취여(醉如)ㆍ월저(月渚)ㆍ설암(雪巖)ㆍ환성(喚惺)ㆍ호암(虎巖)ㆍ설봉(雪峯)ㆍ연담(蓮潭)ㆍ초의(草衣) 등의 대종사와, 만화(萬化)ㆍ연해(燕海)ㆍ영파(影波)ㆍ운담(雲潭)ㆍ벽담(碧潭)ㆍ완호(琓虎) 등 그야말로 우리 불교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기라성 같은 고승대덕들의 부도들이고 비석들이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명소 유적지를 촬영한 사진집인 ‘조선고적도보’에도 대흥사 부도밭이 실려 있다. 사진으로 봐도 부도밭의 청아한 기운이 잘 느껴지는데, 이곳은 당시에도 상당히 주목받았던 모양이다.

이 중에서 하나만 설명하라면 단연 맨 앞쪽에 있는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 스님의 부도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전체 높이 260cm로 부도치고는 퍽 큰 편이다. 팔각 지대석 위에 3단으로 된 기단부가 놓였고 그 위에 역시 팔각으로 된 탑신부·옥개석·상륜부의 순서로 쌓여 있다. 기단부 중에서 가장 아래인 하대석에는 당초와 연꽃무늬를 새겼다. 중간에 놓인 중대석은 크기가 작고 좁은 편인데, 네 면의 귀퉁이마다 사자와 코끼리 등의 동물이 일어서서 뒷다리로 하대석을 딛고 앞다리와 머리로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또 상대석에도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거북·게·개구리 같은 동물을 조각했다. 이런 동물 조각은 다른 부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색이다. 미황사 부도 중에도 물고기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이 새겨져 있는 걸 보면 이런 장식은 바다에 면한 해남 지역 부도만의 특징인 것 같다. 흔히 조선시대 부도는 예술성 면에서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 비해 좀 못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적어도 이 부도만 보면 앞선 시대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만큼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잘 만든 작품이니 보물로 지정된 건 당연하다. 기다란 모양의 탑신부 앞면에는 이 부도가 서산대사의 것임을 나타내는 ‘淸虛堂(청허당)’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기와지붕 모양을 한 옥개석 역시 팔각형인데 처마가 경쾌하게 위로 솟아 있고 기왓골도 또렷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부도밭에 같이 있는 탑비가 1647년에 세운 것이니 아마 같은 때 세워졌을 것이다.

언젠가 여기서 부도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답사 온 대학생들이 부도밭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들로 여기저기 열심히 보고 나자 지도교수가 한데 모이게 해서 설명을 하기에 줄 끝에 같이 서서 들어보았다. 그런데 말하는 내용이 부도와 탑의 모양새나 무늬 같이 겉모양새에 관한 언급뿐이었고 거기에서 더 나아간 게 없었다. 이런 양식도 알아야 하겠지만, 부도가 갖는 의미를 먼저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들으면서도 허전했다. 또 이런 부도가 한데 모인 부도밭의 상징성도 이곳을 찾는 사람이면 꼭 알아야 할 부분이고, 여기에 더해 그 주인공들의 인생과 행적에 대해서도 얘기한다면 부도와 비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사찰에서도 부도밭에 모아진 부도와 비석들을 하나하나 연구하고 어려운 한문은 쉽게 풀어준다면 일반인들도 그 가치를 알수있을 것이다. 부도밭에 대한 관심이 좀 더 깊어질 필요가 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들이 보완되어야 한다.

대흥사에는 이 부도밭 외에도 비석이 있다. 표충사 구역 안의 표충비각(表忠碑閣)에 있는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와 ‘건사사적비’가 그것이다. 앞의 비석은 홍문관 제학 서유린(徐有麟, 1738∼1802)이 1791년에 지은 것으로 서산대사의 일생과 임진왜란 때의 활약상을 가장 잘 전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서유린은 훗날 영의정까지 오르는 고위관료였는데 그런 그가 이 비문을 지은 것만으로도 서산대사의 위치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 비문을 지은 시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0년이나 지난 때였다. 이렇게 세월이 지난 후에도 국가 차원에서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비단 서산대사 한 개인만이 아니라 대흥사에 대해서도 여전한 고마움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흥사에서는 서유린을 위해 이듬해 ‘서판서(徐判書) 송덕비’를 세워 화답했다. ‘건사사적비’는 1792년에 세운 표충사의 역사가 기록된 비석인데, 연담유일(蓮潭有一) 스님이 표충사 건립에 큰 공을 세웠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어 절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자료다. 또 1979년에 세운 한글판 기적비(紀積碑)도 함께 있어서 요즘 사람들이 표충사의 역사와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부도란 한 수행자가 이 세상을 치열하게 살고 떠나간 뒤 남은 숙연한 자취이자 한편으론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자 문화재가 된다. 부도밭에 있는 사적비나 탑비를 읽고 부도를 보면 사찰사(寺刹史)를 온전히 알게 되니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문화공간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절에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에 부도밭에 들러 생전에 치열한 구도 정진을 하였던 스님들의 자취를 바라보는 것도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86호 / 2015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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