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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천축승 지공이 고려 나옹에게

“동서를 바라보면 남북도 그렇거니 눈 밝은 법왕에게 千劍을 준다”

인도 마가다국 왕자 지공
8살 때 부왕 치유 위해 출가
나란다사원서 경율론 공부
스리랑카에선 선적인 깨달음
티베트 거쳐 원에서 교화행
고려에 왔을 때 “석가” 칭송

나옹 견성 후 중국에 가 친견
지공에게 인가 받고 구법순례
귀국 후 회암사 중창 등 앞장

“방장실에 앉아 다과를 드니 이것은 변함없는 좋은 약이로다. 동서를 바라보면 남북도 그렇거니 눈 밝은 법왕에게 천검(千劍)을 준다.”

1367년 겨울, 청평사에 머물던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은 원나라에서 온 보암(普菴) 장로에게 비통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스승 지공(指空, Sunyadiya, 1300?~1361)이 열반에 들었다는 것이다. 나옹은 보암으로부터 지공이 직접 쓴 편지 한 통과 가사(袈裟) 한 벌도 전해 받았다. 일생 구도와 전법의 길을 걸어온 스승이 자신에게 법을 유촉하고 있었다.

나옹은 지공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검은 얼굴에 새하얀 수염, 두 귀는 뚫었고 푸른 두 눈이 형형했던 지공. 1358년 3월23일, 그는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를 묻는 나옹에게 “본국으로 돌아가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을 찾아 머무르면 불법이 자연히 일어나리라”라고 말했다. 순간 나옹은 스승이 일컫는 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지공이 직접 고려를 다녀갔을 때 인상적으로 남았다던 곳, 인도 나란다사원의 기상을 빼닮았다는 바로 양주 회암사(檜巖寺)였다. 그곳은 나옹이 처음 견성한 곳이기도 했다.

나옹은 지공에게 삼배를 올리고 곧바로 귀국했다. 그때 나옹은 이제 더 이상 스승을 만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더라도 자신은 정(情)이 아닌 법(法)을 따라야 하는 출가자였다. 천축국의 마지막 고승 지공의 법을 고려에 펴겠다는 서원을 깊이 새겼었다.

지공의 입적은 나옹을 깊은 상념으로 이끌었다. 생과 사가 구름 한 조각이 나고 멸하는 이치와 다르지 않았지만 인간적인 그리움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나옹은 지공을 위해 향을 사르고 차를 올렸다. 이어 그는 지공을 찬탄하는 게송을 나직이 읊조렸다.

▲ 인도불교의 전통을 고려에 전한 천축국의 고승 지공. 그림은 통도사에 소장된 삼화상 진영 중 지공 부분.

‘마가다국에서 반야경을 보다가/ 문득 세 곳에서 온몸을 단박 잊었네/ 그 때에 만일 하늘을 찌르는 뜻이 있었더라면/ 남천축으로 가서 보명을 뵈었던가/ 아아/ 원나라에서 조용히 앉았으매 아는 사람 없었으나/ 천지를 진동시키는 소리 있었네.’

계율과 교학, 선정에도 두루 밝았던 지공. 그는 부처님이 태어난 지역인 마가다국의 셋째 왕자였다. 지공이 8살 되던 해 부왕의 병세가 악화되자 그는 왕의 병이 낫기를 발원하며 출가를 자청했고, 곧장 나란다사원의 율현(律賢, Vinaya bhandra)을 은사로 삭발했다. 지공은 오계를 받고 경율론 삼장을 익혔다. 불교 사상을 공격했던 96종의 이교도들에 대한 이론도 배웠다.

당시 인도는 이슬람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어 갔다. 인도불교도 막바지로 치달았다. 율현은 강직한 지공이 자칫 이슬람의 칼날에 스러질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지공에게 남인도 능가국(楞伽國, 스리랑카)의 보명존자를 찾아가 진리를 깊이 연구할 것을 당부했다. 보명은 아비달마에 밝았을 뿐 아니라 선에도 정통했다. 19살의 지공은 남쪽으로 걷고 걸었다. 평생 수만리를 홀로 걸어야 했고 이역만리에서 마지막 숨을 내려놓을 때까지 숙명처럼 떠돌아야 했던 긴 방랑의 시작이었다.

몇 달을 걸어 그는 능가국의 보명을 만날 수 있었다. 보명이 물었다. “나란다에서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는가?” 순간 교학과 계율을 깊이 안다고 자신했던 지공이었지만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보명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근원을 묻고 있었다. 지공은 참담했다. 보명의 한 마디에 자신의 무지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그는 석굴에 들어앉아 이 문제와 씨름했다. 6개월 뒤 그에게 깨침이 있었을 때 몸은 자작나무처럼 야위었고 두 다리는 돌처럼 굳었다. 지공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보명에게 나아가 말했다. “두 다리 사이가 한 발자국입니다.” 보명은 기뻐하며 깨달을 인정하는 징표로 의발(衣鉢)을 전했다. “너는 사자새끼다. 이제 세속의 중생교화에 힘쓰도록 하라.”

지공은 멀고 먼 교화의 여정에 올랐다. 미얀마와 말레이반도를 오갔고 다시 남인도에서 북인도를 거쳐 인도불교 전통이 이어지는 티베트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양한 밀교를 접한 그는 다시 원의 수도인 연도(燕都, 大都)에 도착했다. 오래지 않아 중앙아시아 호탄으로 되돌아간 그는 운남성을 거쳐 양자강 이남을 우회해 1323년 연도에 이르렀다. 지공이 고려인과의 인연이 닿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정치적으로 라마승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던 고려계 귀족들은 지공을 선지식으로 크게 떠받들었다. 그러나 지공은 교화의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황제를 비롯한 고위 관리들에게도 기꺼이 법을 설했다. 그들은 지공의 심오한 경지에 놀라워했다.

1326년 봄, 지공은 발걸음을 고려로 옮겼다. 고려인들은 “부처님께서 다시 태어나 이곳에 오셨으니 어찌 찾아뵙지 않겠는가!”라며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지공은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고 무생계(無生戒)를 주었다. 그 가운데에는 고려불교의 마지막 수호자로 성장할 8살의 어린 나옹도 포함돼 있었다. 지공은 법기보살이 상주한다는 금강산을 참배했고 다시 회암사를 거쳐 통도사도 방문했다. 그렇게 지공은 2년 7개월간 고려를 유람한 뒤 연도로 돌아갔다. 비록 지공은 떠났지만 고려인들에게 그는 활불(活佛)로 깊이 각인됐고, 숱한 구도자들의 정신적인 귀의처가 됐다.

▲ 양주 회암사에 있는 지공의 부도.

지공이 나옹을 다시 만난 것은 1348년 연도 법원사(法源寺)에서였다. 둘 사이에 곧바로 문답이 오고갔다.
“어디서 왔는가?”
“고려에서 왔습니다.”
“어떻게 왔는가?”
“신통으로 왔습니다.”
“나타내보라.”
나옹은 곧장 지공에게 다가가 합장하고 섰다. 걷고 손을 모으는 모든 일상의 행위 자체가 청정한 불성의 작용이며, 가장 놀라운 신통력임을 드러낸 것이다.
“무엇하러 왔는가?”
“후세 사람들을 위해 왔습니다.”

지공은 나옹의 법기(法器)를 알아봤다. 혼란한 고려 불교계에 스스로 역사의 지침이 되기 위한 사명감으로 이 자리에 섰음도 알았다. 지공은 나옹이 대중을 이끄는 판수(板首)로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지공은 자신의 법을 이을 제자를 만났음을 직감했다. 나옹도 지공을 만나고서야 자신의 깨달음이 부족함을 새삼 알았다. 나옹이 스스로 “쯧쯧, 이 눈먼 사람, 도로 대롱이 속으로 들어갔구나”라고 탄식했던 것도 스승에 대한 존경의 역설적 표현이었다.

나옹은 그동안 ‘삼세 부처님네도 그것을 어찌할 수 없고, 역대 조사님네도 어찌할 수 없으며, 천하의 큰스님들도 어찌할 수 없다’는 궁극의 답을 찾기 위해 곁눈질 한 번 않고 달려왔다. 개성에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0살 때 벗이 세상을 떠나자 자책감과 더불어 죽음의 문제에 몰두했다. 고민 끝에 그는 ‘삼계를 벗어나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고 발원하고 산문으로 향했으며, 얼마 뒤 회암사로 옮겨 가부좌를 틀었다. 밤낮 없이 정진하던 그는 오래지 않아 그곳에 머물던 일본 고승 석옹(石翁)과 응대할 정도로 수행이 깊어졌다. 그렇게 4년이 흘렀을 때 나옹의 의심덩이가 갑자기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는 노래했다. ‘허공을 쳐부수어 뼈를 꺼내고/ 번쩍이는 번갯불 속에 토굴 짓나니/ 누가 내 집 가풍 묻는다면/ 이밖에 다른 물건이 없다고 하리라’

그럼에도 나옹은 아직 자신이 궁극적인 경지를 체득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1347년 28살의 나옹은 중국의 고승들에게 직접 확인해봐야겠다고 다짐하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연도 법원사에서 ‘석가의 현신’ ‘제2의 달마’라는 지공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고려불교의 마지막 수호자인 보제존자 나옹. 그림은 통도사에 소장된 삼화상 진영 중 나옹 부분.

나옹은 지공과 수많은 문답을 주고받았다. 나옹은 지공의 말 한 마디에서 천지를 진동시키는 거대한 울림을 들을 수 있었으며, 그때마다 자신의 신념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지공은 거대한 산이었다. 그곳에서 2년간 머무르며 지공의 인정을 받은 나옹은 다시 구법의 길에 올랐다. 그는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을 참견(參見)했고 그들과 불꽃 튀는 법거량을 주고받았다. 매일 매일이 진검승부였다. 한번은 몽산화상의 법을 이었다는 노숙이 깔보듯 물었다.

“너희 나라에도 선법(禪法)이 있느냐?”
젊은 나옹이 늙은 노숙을 젊잖게 나무랐다.
“해 뜨는 곳의 고려와 저녁노을에 물드는 강남에는 바다와 산이 있을 뿐이고 옛날과 오늘이 통하기 마련이니 그 차이를 따져 무엇 하겠소?”

날이 갈수록 나옹의 취모검(吹毛劍)은 번뜩였고 중국 고승들의 감탄도 높아갔다. 그 중에는 임제의 법을 이은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1361)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서슬 퍼런 같은 문답이 다시 오고갔다.

“지공이 날마다 하는 일은 무엇이던가?”
“지공선사께서는 날마다 천검(千劍)을 씁니다.”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一劍)을 가져오라.”
평산은 지혜의 용이 아니라 본분인 체를 묻고 있었다. 그러나 나옹은 분별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나옹은 좌복으로 평산을 후려쳤다.
평산은 넘어지며 크게 외쳤다. “이 도적놈이 나를 죽인다.” 나옹이 곧 붙들어 일으키며 말했다. “내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살리기도 합니다.” 나옹은 천검을 떠난 일검이 따로 없다는 체용불이(體用不二)의 경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평산은 껄껄 웃으며 나옹의 손을 잡고 방장실로 들어가 차를 권했다. 두 달이 지났을 때 평산은 나옹에게 손수 지은 글과 함께 인가의 징표로 가사와 불자(拂子)를 건넸다.
‘그 하는 말이나 토하는 기운을 보면 불조(佛祖)와 서로 걸맞다. 종지(宗旨)의 눈은 분명하고, 본 곳은 아주 높다. 말 속에는 메아리가 있고 글귀마다 칼날을 감추었구나.’

나옹은 그런 평산에게 ‘가슴 속 독한 기운 하늘을 찔러 불조도 그 앞에 나아가지 못하네’라고 찬탄했다. 맹독이 호랑이를 쓰러트리듯 모든 망상을 타파한 평산의 지고한 경계를 나타낸 말이다.

나옹은 3년간의 구법행각을 마치고 스승 지공이 있는 연도 법원사로 돌아왔다. 지공은 나옹의 깨달음이 더욱 단단히 여물었음을 알았다. 지공은 나옹을 방장실로 맞아들여 법의(法衣) 한 벌과 불자(拂子) 하나, 그리고 산스크리트로 쓴 편지를 건넸다. ‘종지를 밝힌 법왕에게 천검을 준다’는 내용으로, 법으로서 중생의 번뇌와 고통을 단박에 끊어주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옹은 자신을 인가한 스승에게 감사의 절을 세 번 올렸다.

한 달 뒤 나옹은 다시 길을 떠났다. 이제 그의 명성은 원나라 곳곳에 퍼져 있었다. 1356년 10월, 최고의 권력자인 순제(順帝)가 나옹의 법을 칭송한 뒤 연도의 광제선사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얼마 뒤 나옹은 주지를 그만 두고 스승 지공을 찾아왔다. 그때 지공은 나옹에게 이제 귀국해 삼산양수간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나옹은 지공을 떠나 고려로 향했다.

나옹의 명성은 이미 고려에도 자자했다. 특히 지공과 평산의 법을 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에 거는 기대는 더욱 커져갔다. 1361년 가을 공민왕은 그를 개성으로 오도록 해 법문을 청해들었다. 왕은 감탄하며 말했다. “명성으로 들은 것이 직접 얼굴을 대한 것보다 못하구려.” 왕은 나옹이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도록 청했다. 거듭 사양하는 나옹에게 왕은 “그러시다면 나도 이제 불법에서 물러나겠소”라며 은근히 협박했다. 나옹은 부득이 신광사 주지로 머물러야 했다.

▲ 양주 회암사에 있는 나옹의 부도.

그 무렵 동아시아는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제국 원나라는 황위 계승문제로 다툼이 끊이질 않았고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해 11월, 나옹이 신광사에 머문 지 한 달쯤 됐을 때 원에 쫓긴 홍건적 10만 명이 고려를 재차 침공했다. 그들은 포악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였다. 왕은 개경을 떠나 청주를 거쳐 복주(안동)로 몽진했다. 신광사 대중들도 대부분 피난을 가고 나옹과 그의 제자들만 남았다. 며칠 뒤 나옹이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을 때 중무장을 한 수십 명의 홍건적들이 사찰에 밀려들어왔다. 모두들 두려워 떨었으나 나옹은 조금도 흔들림 없었다. 여느 때 신도들을 만나듯 무리들을 맞이했고, 그의 기개에 감탄한 도적의 우두머리는 나옹에게 오히려 귀한 침향을 공양하고 돌아갔다.

나옹은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죽고 사는 일이 명(命)에 있거늘 적들이 너희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제자들은 연일 피난가기를 계속 요청했다. 나옹은 결국 승낙하고 다음날 떠나기로 했다. 헌데 그날 밤 나옹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났다. 그는 의관을 갖추고 나옹에게 절을 한 뒤 말했다. “대중이 흩어지면 도적은 반드시 이 절을 없앨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부디 뜻을 굳게 가지십시오.”

다음날 나옹은 혼자라도 신광사에 머물겠다는 뜻을 밝혔다. 말을 탄 홍건적들이 종종 신광사를 오갔지만 사람을 해치거나 절을 훼손하는 일이 없었다. 고려군에 패퇴해 물러날 때도 나옹에게 깍듯한 예를 올렸다. 홍건적이 물러간 후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나옹은 더욱 유명해졌고, 태고보우(太古普憂, 1301~1382), 백운경한(白雲景閑, 1298~1375)과 더불어 고려 최고의 고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나옹은 대중들에게 생사를 벗어난 활발발한 선의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의 회상에 각지의 납자들이 모여들었다. 나옹은 참선하고 도를 배우는 데에 왕도가 따로 없으며, 오직 용맹스레 공부해야 성취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렇게 꾸준히 밀고 나가면 하루아침에 마음이 끊어질 때가 오고 그러면 비로소 무딘 쇠나 구리쇠도 눈이 활짝 열리리라 했다.

나옹은 불교가 점점 위기상황에 내몰리고 있음을 잘 알았다. 성리학의 도전과 비판은 갈수록 거세졌다. 그럼에도 불교는 쇄신의 노력은커녕 속세와 타협해 권력을 쥐고 그것을 이용함으로써 사회적·경제적으로 많은 폐단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나옹이 선을 추구했던 것도 그런 풍토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었다. 스승 지공이 그랬듯 나옹의 일거수일투족은 계율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나옹은 항상 여기저기 꿰맨 누더기 승복을 걸쳤으며 기름진 음식을 멀리했다. 불교가 대중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출가자부터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청빈해야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가 법을 설할 때면 분위기가 일변했다. 물 밑에서 불이 일어 허공을 사르고 초목과 총림들이 사자후를 토하는 듯했다.

나옹은 시가와 산문을 응용한 가사(歌辭)를 창안해 대중들이 탐욕을 버리고 깨달음의 삶을 살도록 이끌었다. 신령한 구슬을 불성(佛性)으로 상징해 번뇌에 흔들리거나 물듦 없이 당당함을 강조한 ‘완주가(翫珠歌)’, 누더기를 걸친 자유로운 선승의 안빈낙도를 표현한 ‘백납가(百衲歌)’, 윤회를 거듭하며 진흙 구덩이에서 고통 받았던 ‘마른 해골’이더라도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 모든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노래한 ‘고루가(枯髏歌)’ 등이 그것이다. 나옹의 바람대로 이들 가사는 오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나옹을 향한 세간의 존경과 찬탄은 더욱 커져갔다. 그 중에는 나옹의 누이동생도 포함돼 있었다. 누이동생은 그동안 오빠를 너무도 그리워했으며 꼭 만나보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나옹은 동생을 만나지 않기로 했다. 만남은 동생에게 또 다른 집착을 불러일으키리라 여겼다. 그는 동생에게 편지를 띄웠다. 모든 집착에는 괴로움이 따르니 자신을 만나겠다는 생각을 접고 항상 아미타불을 간절히 생각하라고 적었다.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아미타불이 생각나는 경지에 이르면 나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억울하게 육도(六道)에서 헤매는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간절히 부탁하고 부탁하오.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생각하여 부디 잊지 말지니 생각이 다하여 생각이 없는 곳에 이르면 몸과 마음에서 언제나 금빛 광명이 끊이지 않을 것이오.’

나옹의 편지를 받은 누이동생은 출가했다. 그때부터 그는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묘연(妙緣)’이라는 비구니로 살아갔다. 그런 묘연에게 나옹은 다시 시 한 수를 보내 격려했다.
‘무명의 거친 풀을 뿌리째 깎았나니/ 당당한 자성의 계율이 스스로 원만하리/ 지금부터는 어떤 그릇된 길도 밟지 말고/ 바로 겁(劫) 밖의 근원을 뚫고 가라’

세월이 흘러가도 나옹은 지공의 당부를 한 시도 잊지 않았다. 1370년 1월, 지공의 영골 사리가 고려로 이운된 것을 계기로 나옹은 회암사 중창에 착수했다. 그 일이 불교를 세우는 뜻 깊은 불사라 확신했다. 나옹은 여러 사찰을 찾아다니며 회암사 중창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폭넓은 후원을 약속받았다. 1370년 나옹은 불교계를 대표해 승과인 공부선(工夫禪)을 주관하고 다음 해에는 왕사로 책봉됐다. 나옹은 회암사에 지공의 사리탑을 세우는 등 중창불사에 힘을 쏟았다. 그런 나옹의 열정에 백성들은 물론 공민왕도 적극 호응했다. 1376년 4월, 마침내 회암사 낙성식이 열렸다. 비록 중창 과정에 공민왕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날 낙성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나옹에 대한 대중들의 존경이 얼마나 큰지 확연해진 것이다.

놀란 것은 신진사대부들이었다. 불교계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다시 높아진다면 성리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우왕에게 거듭 상소를 올렸고 마침내 나옹에게 멀리 밀양의 영원사로 옮기라는 조처가 떨어졌다. 나옹은 병이 들었다. 그를 태운 가마꾼들이 입적한 고승들이 통과하는 열반문으로 나오자 대중들은 목 놓아 흐느꼈다. 그러면서 억울하게 쫓겨 가는 나옹에게 힘내라는 응원을 보냈다.

나옹은 알았다. 자신의 삶이 끝자락에 이르렀음을. 5월3일 나옹이 뱃길을 따라 내려가는 도중 병이 심해져 신륵사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 나옹에게 여흥군수는 떠나기를 거듭 독촉했다. 나옹이 말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으오. 나는 곧 갈 것이오.” 그리고는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노승은 오늘 그대들을 위해 열반 불사를 지어 마치리라.” 그 말과 함께 나옹은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 57, 법랍 37이었다.

그 때 고을사람들은 오색구름이 산꼭대기를 덮는 것을 보았다. 나옹이 타던 흰말은 3일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더니 그의 입적과 더불어 머리를 떨구고 슬피 울기 시작했다. 다비를 마친 그의 몸에서는 수많은 영롱한 사리들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나옹이 자신들의 곁에 온 생불(生佛)이라 여겼고, 그에 대한 수많은 전설도 생겨났다.

▲ 지공(가운데)과 나옹(오른쪽), 그리고 무학(왼쪽)은 삼대화상으로 불리며 조선시대 내내 수많은 사람들의 귀의처가 됐다. 그림은 여주 신륵사에 보관돼 있는 삼화상 진영.

나옹이 밝힌 법의 등불은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3)와 환암혼수(幻庵混修, 1320∼1392)에게 이어졌으며 기나긴 억불의 시대에도 끝내 꺼지지 않았다. 특히 지공과 나옹,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은 ‘삼대화상(三大和尙)’으로 칭송되며, 수많은 사찰에 영정이 봉안되고 불교의례에까지 포함됐다. 나옹에 의해 크게 중창된 회암사도 조선시대 대표적인 왕실사찰이자 불교의 최후 보루로서 16세기 후반 유생들에 의해 불태워질 때까지 그 역할을 다했다.

한편 인도불교의 전통을 고려에 전한 천축국의 고승 지공이 고려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에게 보낸 편지는 ‘나옹화상집’에 전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 자료 : ‘나옹화상집’(동국역경원), ‘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허흥식, 일조각), ‘고려말 나옹의 선사상연구’(김효탄, 민족사), ‘나옹 선시의 상징과 역설’(박재금, 한국의 민속과 문화 12집), ‘동아시아 역사 자산의 소설 콘텐츠화-지공 사례를 중심으로’(윤채근, 어문논집 67), ‘나옹 혜근의 미타정토관’(이철헌, 한국불교학 18집), ‘나옹화상의 고루가 텍스트 분석’(정진원, 텍스트언어학 4집), ‘나옹혜근의 불교계 행적과 유물·유적’(황인규, 대각사상 11집), ‘전설의 형성과 의미, 나옹전설의 경우’(조동일, 관악어문연구 제3집)

[1287호 / 2015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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