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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맑은 출가와 재가의 길

출가. 가지 않은 길이다.

삭발염의에 맑은 스님을 만날 때마다 그 길에 미련은 무장 커진다. 고백하거니와 출가를 진지하게 고심할 때가 있었다. 송광사로 구산 방장스님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밤중에 불쑥 찾아갔던 기억도 새롭다. 대학 새내기인 내게 구산 스님은 자정이 다가옴에도 마다하지 않고 시간을 내주셨다. 당돌한 물음에 벼락같은 외마디를 지르거나 방망이로 치는 따위 없이 다사롭게 응대하셨다. 방장실을 나설 때 받아온 ‘법문’은 세 글자, ‘동사섭’이었다. 그 뜻을 늘 헤아려보라는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동사섭. 사섭의 하나로, 고통이나 즐거움을 중생과 함께 한다는 뜻이다. 구산 선사가 왜 그 말씀을 던졌는지 정확한 뜻을 감히 알 수는 없다. 내게 출가할 근기가 보이지 않아서였으리라 짐작만 할 따름이다.

새삼 37년 전의 이야기를 들먹인 까닭은 새롭게 출가한 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잊지 못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의 줄기 황악산이 품고 있는 직지사, 사미와 사미니 수계교육이 한창인 그곳에서 새맑은 기운을 듬뿍 받았다. 대학 강의는 물론, 여러 사회단체 강연에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기운이 온 몸으로 전해져왔다.

남 행자 65명, 여 행자 43명, 108명이 사미와 사미니계를 수업하는 곳에서 저녁 시간에 들려오는 “석가모니불” 소리에 ‘출입금지’ 문 앞만 서성거렸다. 예비 스님들이 줄을 지어 단아하게 걸어가는 행렬을 볼 때는 나 자신의 탐진치가 조금은 맑아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현장에서 행자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원 연수국장 석중 스님은 ‘행자의 눈물’을 소개하며 눈 슴벅였다. 행자입문 교육에 3보1배, 3천배와 1보1배가 있다. 그런데 40대 남자 행자가 1보 1배를 하다가 빈혈로 쓰러졌다. 그 행자는 그 와중에도 수계 교육에서 탈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눈물을 쏟으며 꼭 교육을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석중 스님은 세속의 인연을 끊고 출가해서 올곧은 수행자로 살아가려는 서원이 얼마나 절절하면 그렇게 눈물 흘릴까 싶었단다. 행자 교육에는 미국, 캐나다, 폴란드에서 온 외국인도 있고, 굳이 밝히지 않지만 대기업이나 전문직에서 활동해 온 행자도 있다. 출가자다운 아름다운 자세다.

끊임없이 출가하는 행자들은 기실 한국 불교의 미래다. 적잖은 사람들이 ‘사부대중 공동체’를 이상으로 내세우고, 나 또한 그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하지만 불교의 중심은 출가한 비구, 비구니 스님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 말이 ‘사부대중 공동체’ 담론과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출가자는 출가자대로, 재가자는 재가자대로 마땅히 할 일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출가의 세계를 재가에서 비판할 수도 있고, 재가의 세계를 출가에서 비판할 수도 있다. 서로 견제하는 도반이 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터다. 하지만 공동체를 이뤄가려면 서로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이를테면 과도한 일반화와 무례한 언행은 공동체 형성을 흔들 뿐 아니라 당사자의 정당한 뜻마저 폄훼케 한다.

붓다의 뜻을 이 땅에 벅벅이 실현하려면 출가의 길과 재가의 길 모두 변화가 절실하다. 기실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는커녕 대한민국 정치, 경제, 사회를 탐진치로 물들이는 재가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언젠가도 강조했듯이 재가 불교운동 또한 다른 종교에 견주어 미약하다. 출가와 재가가 서로 도반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할 이유다.

근자에 종단 안팎에서 불거지는 진흙탕 풍경은 자못 사납다. 여기서 모든 갈등을 ‘진흙탕’으로 매도할 뜻도 그럴 이유도 내겐 전혀 없다. 하지만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난다고만 보기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갈등이 적지 않다. 누구보다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알지 않을까. 그 갈등에 지금 이 순간도 눈물로 정진하고 있을 108 행자의 새맑은 기운을 두 손 모아 전한다.

손석춘 건국대 교수 2020gil@hanmail.net

[1287호 / 2015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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