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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황룡사 장육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려시대 화재로 소실…불두 파편이 전설 속 불상의 유일 증거

▲ 경주 황룡사 금당지의 석조대석. 길이가 320㎝ 가량되어 여기에 세워져 있었을 장육상의 위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학문이란 실증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실증적이라는 것이 꼭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야 할 듯싶다. 그것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면 굳이 연구할 필요가 있을까? 만약 톨스토이가 그의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밝혔다면 과연 톨스토이 연구자가 해야 할 일이 있을까? 실상 문제는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조절하는 힘도 흔히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사라진 금동 장육상
‘삼국유사’ 에 기록 전해져
석조대석으로 당시 위용 짐작

‘아쇼카왕 주문대로 제작’ 전설
중국 아육왕상 사진 실마리로
인도 불상 특징 유추했으나
후에 잘못된 사진으로 알려져

합리적인 유추에 상상력 더해
신라 조각사 복원 노력 주목

미술사도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 미술사의 중심 소재는 우리가 지금도 볼 수 있는 작품들이지만, 때론 남아있지 않는 작품이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경주 황룡사지의 금동 장육상(丈六像)이다. 이 상은 비록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당시 황룡사가 불타면서 사라졌지만 ‘삼국유사’에 그 기록이 남아있고, 장육상이 서있던 거대한 대석이 아직 현장에 남아있어 몇 가지 추론을 가능케 한다.

‘삼국유사’ 탑상(塔像)편의 ‘황룡사장육’조에 의하면 인도의 아육왕(阿育王), 즉 아쇼카왕은 높이 1장6척(=16척, 지금 단위로 대략 5m 높이로 추정된다)의 석가모니 청동상과 그 협시보살상을 주조하려다가 번번이 실패하자 그 재료를 배에 실어 바다로 떠나보냈다고 한다. 여기에 그가 만들려고 했던 석가삼존상의 모형과 설계도도 함께 실었다고 하는데, 그 배는 수백년 동안 전 세계를 떠돌며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이 나라들마다 모형과 설계도대로 불상 주조를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하여 도로 떠나보냈는데, 결국 신라 진흥왕(眞興王, 546~576) 재위 시절에 사포(絲浦, 지금의 울산)에 도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진흥왕은 법흥왕(法興王, 514~540)에 이어 불교를 받아들여 신라의 중앙집권화를 도모하고 있던 차였는데, 불교 역사상 전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아쇼카왕이 보낸 보물선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반드시 성공해내고 싶은 불사(佛事)였을 것이다.

더욱이 이 주조는 진흥왕의 바람대로 한번에 성공하였다고 하니, 당시 신라의 주조기술이 얼마나 첨단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만약 황룡사지에 지금과 같은 대석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삼국유사’의 기록은 그야말로 “왕년에 우리 집에 금송아지 있었다”는 식의 그렇고 그런 풍문으로만 치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황룡사지 금당지의 거대한 대석은 실제 그곳에 거대한 청동 삼존상이 세워져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나 지난 글에서 살펴본 국보 제78호 반가상의 제작연대가 6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만약 신라의 불상이라고 가정한다면 대략 진흥왕대에 해당하는 시기이니, 국보 78호 반가상이야말로 황룡사 장육상의 우수한 제작기술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과연 황룡사 금당에 봉안되었던 장육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그 모습을 추정해볼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첫째로 그 모습은 신라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인도의 아쇼카왕이 주문한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쇼카왕은 역사적으로 기원전 3세기를 살았던 사람이므로 그가 떠나보낸 배가 무려 800년 이상을 떠돌다가 신라에 당도했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날리는 없을 터인지라 무엇인가가 이 불상이 인도불상의 분위기를 연출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충분히 해볼 수 있다.

▲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 출토의 아육왕 명문이 있는 불입상. 양나라 551년. 높이 48.5㎝. 인도 간다라 불상양식을 보여준다.

이에 관한 첫 번째 주장은 중국에서 발견된 ‘아육왕상’이라는 명문이 쓰여진 불상을 근거로 제시되었다. 특히 중국 사천성에서 이러한 명문을 가진 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황룡사 장육상의 원형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중국의 아육왕상과 우리나라의 황룡사 장육상을 연관지어 해석한 학설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에는 중국과의 교류가 원만하지 않을 때였고,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중국의 자료를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아주 드물게 공개된 중국 사천성 출토의 아육왕상 사진은 황룡사 장육상의 직접적인 모델로 제시될 수 있었는데, 특히 불상의 옷주름 처리가 주목되었다. 이에 의하면 가슴 앞에서부터 다리 아래로까지 ‘U’자형으로 표현된 질서정연한 옷주름이 아육왕상의 특징으로 지적되었고, 그 외 신라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불상들 중에서 그러한 옷주름을 지닌 불상들은 황룡사 장육상의 모방작이거나, 혹은 당시 신라에 유행했던 인도풍 불상 양식의 흔적이라고 해석됐다. 하지만 논의의 전거가 되었던 사진 속의 불상은 발굴되자마자 몸과 불두를 임의로 접합하여 촬영한 것임이 뒤늦게 밝혀졌다. 현재는 그와 같은 불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머리와 몸이 온전한 실제 아육왕상을 보면, 인도 간다라 불상을 모방해서 만든 상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잘못된 사진에 의한 학설이었지만, 원형을 확인한 현 시점에서 보면 간다라 불상을 직접 모방했다는 점에서 역시 인도 양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황룡사지 출토품으로 전하는 금동불입상. 높이 20.1㎝.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중국 북위(北魏) 불상양식에 속한다.

이에 대한 반론은 현존하는 신라불상양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만약 황룡사 장육상이 인도양식이었다면, 그의 영향을 받은 인도풍의 불상이 진흥왕대를 전후해서 많이 등장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대부분 중국불상양식의 사례들만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傳) 황룡사지 출토의 금동불입상편은 완전한 발굴품은 아니지만, 동국대 박물관에 입수될 당시 수집된 다양한 정보와 조사를 통해서 황룡사지에서 수습된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에 황룡사 장육상의 복원적 고찰은 실제 수습된 유물을 근거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첫 번째 학설에서 근거가 되었던 상이 잘못된 정보에 의한 것이었고, 원래의 간다라풍 불상으로 다시금 고찰을 해본다면, 신라불상 중에 간다라 풍의 불상은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황룡사지에서 수습된 불상 역시 인도적인 분위기는 없고, 중국 북위 혹은 동위시대 불상양식을 따르고 있다.

어쩌면 이 사안의 쟁점은 ‘삼국유사’라는 문헌에 등장하는 아쇼카왕, 즉 인도에서 시작된 전설 이야기에 더 비중을 둘 것인가, 아니면 현존하는 유물들의 양상에 더 비중을 둘 것인가 하는 방법론상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에 대해 비교적 근래에 제기된 새로운 학설은 보다 절충적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비록 아쇼왕의 설계대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만큼 직접적인 인도불상양식으로 해석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아쇼카왕 전설은 단지 아쇼카왕이 만들어놓은 불상이 중국에서 발견되는 서사구조인데 반해 ‘삼국유사’의 전설은 우리 손으로 직접 대형불상을 주조하는 구조라는 점에 착안하여 바닷길을 통해 불상의 원재료들이 수입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함으로써 ‘삼국유사’의 기록에 어느 정도 신빙성을 부여하였다. 아울러 지금의 우리 시각에서는 뚜렷하게 인도불상양식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시각에서는 새로운 양식으로 보였을 불상양식의 변화를 추적하여 중국에도 없고, 그렇다고 인도불상도 아닌 독특한 양상을 지닌 신라의 불상들을 선별하여 그러한 상들이 바로 황룡사 장육상의 흔적일 것으로 새롭게 추정한 것이다.

▲ 경주 황룡사지 출토의 나발이 붙어있는 금동불상 머리 파편. 29.8×17.5㎝. 무게 6.2㎏.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높이 5m 가량의 불상에서 떨어져나온 파편으로서, 문헌속에 등장하는 장육상의 일부분으로 추정된다.

전설은 어디까지 믿어야하는 것일까? 황룡사지에 남아있는 거대한 불상들은 정말 신라 당시에도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인도에서 온 불상으로 믿어졌을까? 아니면 그것은 단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풍문에 불과한 것일까? 비록 사라져버린 불상에 관한 논의였지만, 이는 신라 불상의 양식적 연원을 밝히고 ‘삼국유사’라는 문헌사료에 합리적이고도 풍부한 상상력을 가미하여 신라 조각사를 복원적으로 고찰해보려고 했던 가장 흥미진진한 미술사적 논의로 자리매김 되었다. 아쉬우나마 국립경주박물관 황룡사실에는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불상 머리 부분 파편이 전시되어 있다. 이 파편이야말로 전설 속 장육상의 유일한 증거인 셈인데, 오늘도 이 유물은 우리들의 관심어린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287호 / 2015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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