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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주의라는 약(藥)

“동족간 협력에 있어서 인간은 벌보다 매우 열등합니다”

▲ 달라이라마가 인도 갠지스강 인근에 있는 티베트사원에서 한국인 불자들에게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진을 전달하고 있다.

티베트에서는 많은 종류의 병들을 ‘사랑과 자비’라는 하나의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특질은 인간 행복의 궁극적 원천이고, 이에 대한 필요성은 우리 존재의 핵심에 놓여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사랑과 자비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사회적 교류의 너무나도 많은 영역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개 가족과 집으로 한정 되었고 공적인 생활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거나 심지어 순진하다고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제가 보기에 자비의 실천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의 증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최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국가로서, 집단으로서 또는 개인으로서 우리가 타인에게 의존하면 할수록 타인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더더욱 우리 자신에게 최선의 이익이 됩니다.

벌은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사회적 책임감과 협력 지니게 돼
상호의존성 바탕으로 해 생존

인간은 협동심 자체가 매우 부족
갈등하면서 자멸하는 경우 많아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것은 타협과 협력의 실질적인 원천이 됩니다. 단순히 화합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비에 충실한 마음은 넘쳐흐르는 저수지와 같아서 활력과 결의, 친절의 끝임 없는 원천이 됩니다. 이것은 씨앗과 같습니다. 그 씨앗을 심어서 자라면 용서, 관용, 공포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적인 힘과 자신감 등과 같은 수많은 여타의 좋은 특질들을 낳게 됩니다. 자비의 마음은 연금술사의 약과 같아서 나쁜 상황을 좋게 바꾸는 효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과 자비의 표현을 우리의 가족과 친구에만 한정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자비는 성직자와 의료계 종사자, 사회 사업가들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사회 조직의 필요한 업무입니다. 절실한 부분입니다.

정치, 사업, 종교 분야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이타주의적 접근이 이를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우리가 분쟁을 인식하는데 사용하는 바로 그 개념 자체가 때때로 문제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 때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면 양측은 그들을 결속시켜주는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착상태가 타결되고 결국에는 모두가 각기 자신들의 목적을 용이하게 이루는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느 당사자도 충분히 만족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서로가 양보하면 적어도 추가적인 위험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형태의 타협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방법을 좀 더 자주 사용하지를 않나요?

인간 사회에서 협력의 부족을 숙고해보면 그것은 우리의 상호의존적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벌과 같은 조그만 곤충들의 사례에서 종종 자극을 받습니다. 자연의 법칙은 벌들로 하여금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협력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벌들은 본능적으로 사회적인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헌법이나 법률, 경찰, 종교 또는 도덕적 수양도 없습니다. 그러나 본성 때문에 그들은 함께 충실하게 일합니다. 이따금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 전체 집단은 협력을 기반으로 해서 살아남습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은 헌법과 방대한 법률 체계 그리고,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종교, 뛰어난 지성 그리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마음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많은 비범한 속성에도 불구하고 실전에서는 저 조그마한 곤충들보다 뒤지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우리는 벌 보다 못하다고 느낍니다.

예를 들면 전 세계 대도시에 수백만의 사람이 함께 살고 있지만 이런 근접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일부 사람은 자신의 가장 깊은 감정을 함께 나눌 단 한 명의 사람도 없이 지속적인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우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짝짓기 위해서만 어울리는 외톨이 동물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가 대도시나 타운을 건설하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함께 살아야만 하는 사회적 동물임에도 불행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 대한 책임감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가족과 공동체의 기본 구조에 그 잘못이 놓여있습니까? 아니면 기계, 과학과 기술 같은 외부 환경에 그 결함이 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명화에 따른 금세기의 급격한 진보에도 불구하고 현재 딜레마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오로지 물질적 발달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강조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도 물질적 추구에 몰두한 나머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과 친절, 협력과 배려 등과 같은 가장 근본적인 인간적 필요를 기르는데 소홀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거나, 특정인이나 그룹과 연관성이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단순히 그들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나 인류 사회의 발전은 서로를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근본 바탕이 되는 본질적인 인간성을 잃어버렸다면, 그러면서 단지 물질적인 향상만을 추구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에게 이것은 명백하고 분명합니다. 진정한 책임감은 자비심을 기를 때에만 발현됩니다. 타인에 대한 자발적인 공감만이 진실로 타인을 위해 행동하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앞서 밝힌 자비에 관한 법문을 첨언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구촌에서 종교의 경우 국가적 경계가 없습니다. 특정 종교가 이롭다고 생각하는 민족이나 개인은 그 종교를 채택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종교를 찾고 선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정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타 종교를 거부하거나,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특정 종교를 선택한 사람은 스스로를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로부터 단절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지역의 사회 속에서 그 구성원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계속 삶을 이어가야 합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탈출할 경우 구성원들을 이롭게 할 수 없습니다. 종교의 근본적 목적인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와 관련해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중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반성과 자기교정이 그것입니다. 스스로를 신중히 살피면서,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즉시 수정해야 합니다.

더불어 물질적 진보에 대해 덧붙이고자 합니다. 서구인으로부터 물질적 진보에 대한 수많은 불평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그것은 서구의 자존심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이 항상 우선되기만 한다면 물질적 진보, 그 자체에 잘못된 점은 없습니다. 모든 범위의 인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발전과 영적인 성장이 결합되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확고한 신념입니다.

<출처=달라이라마오피스 홈페이지>
번역=백영일 번역전문위원

[1288호 / 2015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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