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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송광사의 율목봉산 관리

조선의 산림정책과 행정 증언하는 귀중한 사례

▲ 구례 연곡사의 율목봉산 숲. 피아골 계곡의 자연석에 새겨진 봉표 아래 쪽 숲이다.

조선시대의 사찰은 국가의 산림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했다. 사찰이 조선 왕조의 능역과 태실 주변의 산림을 직접 수호한 사례(법보신문 1288호 참조)는 보호 중심의 산림관리였다. 반면 사찰이 왕실의 의례용 임산물을 직접 공급한 사례는 생산 중심의 산림관리였다. 왕실의 의례용 임산물은 황장(黃腸)과 국용주재(國用主材)와 향탄(香炭)을 말한다. 황장은 왕족의 관곽재(棺槨材)로 이용된 몸통 속이 누른 소나무이며, 국용주재란 국가와 공신과 재신(宰臣), 향교의 위판(位版)에 사용된 밤나무재(材)이고, 향탄은 각 능(陵)·원(園)·묘(墓)의 제향(祭享)에 사용된 신탄재(薪炭材)인 숯을 일컫는다.

왕실, 사찰숲 율목봉산 지정
위폐제작용 밤나무 안정확보

18세기 산림황폐 가속화되자
남부지방 사찰 중심으로 확대

‘조계산 송광사사고 산림부’는
조선의 봉산관리 유일한 기록

사찰주변 숲은 자연발생 아닌
스님들의 노력과 관리의 산물

조선 조정은 왕족이 사용할 황장 못지않게 국용주재인 밤나무 목재의 확보도 중요하게 인식했다. 그 이유는 유교적 윤리 도덕을 기본으로 한 성리학이 조선왕조의 중요한 국가통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조상들은 싹을 틔워도 밤톨의 껍질이 오랫동안 뿌리에 붙어있는 독특한 밤나무의 발아(發芽) 특성을 근본을 잊지 않는 행위로 인식하였고, 왕조나 한 가문의 근본이 되는 조상 숭배를 상징하는 위패 제작에는 밤나무만 사용했다. 따라서 밤나무의 확보는 황장목의 확보와 마찬가지로 조선왕실의 중요한 현안이었다.

억불의 시대에, 조선 조정은 국용주재인 밤나무의 조달책임을 언제부터 사찰에 부여하였을까? 그 답은 “삼남(三南)의 읍(邑)에 율목(栗木)을 분정(分定)하던 예를 혁파하고 구례현(求禮縣) 연곡사(燕谷寺)로 주재봉산(主材封山)을 만들어 율목을 장양(長養)하도록 하소서”라는 ‘승정원일기’(1745년)에서 찾을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18세기부터 본격화된 산림황폐로 인해 충청도와 경상도와 전라도의 각 읍에서 조달했던 밤나무를 더는 확보할 수 없어서 1745년에 연곡사 주변의 밤나무 숲을 주재봉산으로 지정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율목봉산과 진목봉산을 나타낸 표석. 봉표 ‘위쪽은 참나무봉산[以上眞木封界]’이고, ‘아래쪽은 밤나무봉산[以下栗木封界]’임을 표시하고 있다.

산림황폐로 인해 사찰 주변의 산림을 율목봉산(栗木封山)으로 지정한 사례는 연곡사 지정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조선 조정은 연곡사에 황장봉산을 지정한 다음 해(1746년)에 밤나무의 고갈을 염려하여 하동 쌍계동 일대를 율목봉산 후보지로 물색하였다. 결국 연곡사 주변을 율목봉산으로 지정한 3년 후 연곡사가 관리하는 율목봉산의 밤나무 생산이 감소함에 따라 하동 쌍계동 일대의 쌍계사, 칠불사, 신흥사 등에 율목봉산을 새롭게 지정하도록 1748년에 교시를 내리고 있다.

영조 시대 이후 순조 8년(1808년)에 순천부(順天府) 조계산에 율목봉산 지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순조30년(1830년)에 이르러 송광사도 율목봉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기사가 ‘승정원일기’에는 수록되어 있다. 결국 조선후기 율목봉산의 관리는 연곡사(1745년)에서 쌍계사(1748년)를 거쳐 송광사(1830년)에 이르기까지 남부지방의 사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왕실이 사찰에 율목봉산의 관리를 위탁했던 까닭은 나라 전역의 산림이 헐벗었던 18세기 중반 사찰 숲은 온전했을 뿐만 아니라 봉산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나 산림관리의 경험을 사찰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율목봉산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정되고 운영되었을까? 그 지정 절차와 관리 운영 방법은 ‘조계산송광사사고(曺溪山松廣寺史庫) 산림부’로 알 수 있다. 율목봉산의 지정 절차는 왕실의 절실한 필요가 있었지만, 형식상으로는 먼저 전라관찰사가 조정에 지정 요청의 품의를 구하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전라관찰사는 국가의 제사와 시호를 관장하던 봉상시(奉常寺)에 연곡사의 율목봉산만으로는 나라에서 필요한 위패 제작용 밤나무를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형편을 설명하고, 그 해결책으로 송광사 일대를 율목봉산으로 지정하기를 원한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 장계에 따라 봉상시는 왕세자에게 송광사의 율목봉산 지정을 요청하고, 조정에서는 왕세자의 이름으로 허가했음을 ‘산림부’에는 밝히고 있다.

▲ ‘조계산송광사 산림부’의 ‘율목봉산’ 절목(부분).

송광사의 ‘산림부’에는 율목봉산의 운영에 필요한 17개 항의 시행규칙인 ‘절목(節目)’을 담고 있다. ‘절목’은 율목봉산을 이미 운영하고 있던 연곡사와 쌍계사의 절목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으며, 그 사본을 병영(兵營), 수영(水營), 진영(鎭營), 고을 수령에게 각각 보내어 율목봉산의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지시하는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절목’의 세부항목을 살펴보면 율목봉산의 관리가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벌목과 식목에 관한 내용으로 ‘밤나무의 벌목은 연곡사, 쌍계사, 송광사가 차례로 3년마다 돌아가면서 시행하고, 봉표 안의 사찰과 민가는 봉상시에 이속시켜 밤나무의 보호와 양성에 힘쓰게 하는 한편, 매년 밤나무 500그루씩 심는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벌목뿐만 아니라 식목도 함께 힘썼음을 알 수 있다.

봉산수호에 대한 벌칙에는 ‘백성이 몰래 경작한 곳은 밤나무 식재가 적당하면 밤나무를 심어 가꾸고, 무덤을 몰래 조성하거나 밤나무를 몰래 벌채할 경우 율로 논죄하고, 총섭이나 도별장이 옳게 다스리지 못하거나 부정행위를 할 경우 귀양을 보낸다’고 규정하고 있다. 봉산관리의 인력 동원은 ‘봉산에 밤나무 식재는 승려와 백성이 맡아서 하고, 매년 차감을 보내 관리 감독하는 한편 격려한다’고 수록되어 있다. 절목의 벌칙을 통해 왕실의 봉산수호 의지와 그 관리 감독권을 사찰에 부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밤나무의 식재 시기, 식재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점은 아쉽다.

송광사 ‘산림부’에는 조선 조정이 위패용 밤나무를 원활하게 조달하기 위한 관리 감독에 대한 절차도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조정(봉상시)에서는 해당 사찰에 차감을 파견하여 관리 감독 업무를 수시로 확인하는 한편, 차감과는 별개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율목경차관을 3년마다 해당 사찰(연곡사, 쌍계사, 송광사)에 보내서 밤나무 식재와 위패용 재목의 벌채작업을 감독하였다. 그 목적으로 송광사에는 율목봉산의 업무를 총괄할 책임자 총섭(總攝)과 부책임자 율목도별장(栗木都別將)을 임명하고, 관인(官印)과 나무패[將牌]를 하사하여 인허가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오늘날 이 관인과 장패는 송광사 박물관에 전시 수장되어 있다.

봉산일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한 반대급부도 있었다. 절목에는 ‘영문(營門)과 본관(本官)이 부여하는 군역과 사역을 면하고, 이를 어기면 법률에 따라 엄중히 처벌한다’는 항목과 절목 반포 후, ‘봉산 안의 승려와 백성의 부역을 즉시 면제한다’고 명기하여 불필요한 승역을 없앴다.

조정의 지시에 따라 송광사는 도벌단속과 보호업무를 수행할 승려[都山直]와 봉산 순찰을 담당할 마을주민[牌山直]을 지정하여 도벌과 몰래 경작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또한 봉산 경계로 동(굴목치), 서(외문치), 남(이읍촌), 북(오도치) 4곳에 표석을 설치하는 한편, 이들 경계 사이사이에 10개의 표석을 세워 구역을 한정하였다. 조계산 송광사 일원에 율목봉산의 경계를 나타내는 10여개의 표석이 1830년에 세워졌지만, 현재까지 어떤 표석도 발굴된 것은 없다.

밤나무의 벌채 과정은 조정에서 위패에 사용할 밤나무를 확보하고자 먼저 감독관인 율목경차관을 현장으로 파견하였으며, 경차관은 목수 1명과 범칠관을 대동하여 벌채목을 선정했다. 또 운반작업(목수 1인과 군인 30명), 치목작업(목수 6명과 봉표 구역 내 백성 6명이 보조일꾼), 도배작업(승려)을 시행하여 조정에 진상할 밤나무를 준비하였다.

송광사의 ‘산림부’를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조선 조정의 봉산관리에 대한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송광사의 ‘산림부’는 ‘한국 임업사’ 또는 ‘한국 산림사’의 중요한 부분을 증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조선시대 산림관리 부분을 복원하고 있다. 산림 이용과 보호뿐만 아니라 산림행정의 구체적 절차와 형식까지도 증언하고 있는 이 기록은 사찰의 산림 금양(禁養) 실적으로 인정되어 종국에는 해당 임야에 대한 법적 소유권의 기초가 되었다. 결국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사찰림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 동안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며 지켜온 사찰의 산림관리를 통해서 형성된 것임을 송광사의 율목봉산은 증언하고 있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288호 / 2015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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