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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구다라관음상 국적 문제

유력했던 백제제작설, 일본 자생나무 재료로 밝혀져 논쟁

▲ 일본 호류지 유메도노(夢殿)의 구세관음상. 아직도 봄·가을에 잠시 동안만 공개되는 비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대 삼국의 문화가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런 만큼이나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고 일본이 자생적으로, 혹은 우리나라를 간과한 채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성장했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역사왜곡이라고 비난한다. 물론 고대의 임나일본부설로부터 근대의 위안부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왜곡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바람직한 학문적 논의까지 모두 역사왜곡으로 치부하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비판까지 퇴색시킬 수 있다.

19세기 페놀로사·오카쿠라가
구세관음·구다라관음 조사하며
‘한반도풍’ ‘백제양식’이라 기록

일본 헤이안 시대의 기록에서도
백제를 통해 들여왔다고 기술돼
1930년대부터 면밀한 연구 통해
백제제작설 일축하는 결과 나와

‘우리나라 제작’ 주장하기보다
백제의 잔영 들춰내는 작업 필요

▲ 호류지 보장전에 전시중인 구다라(백제)관음상. 높이가 228㎝에 달하는 대작이다(사진 왼쪽). 백제 규암출토의 금동보살입상. 구다라관음과 통하는 조형감각을 보여준다(사진 오른쪽).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 호류지(法隆寺)에 전하는 유메도노(夢殿)의 구세관음(救世觀音)과 보장원(寶藏院)의 구다라관음상, 두 구에 관한 논쟁이다. ‘구다라’라고 하는 것은 ‘백제(百濟)’의 일본식 발음이니 결국 ‘백제관음’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당연히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상으로 생각하고, 그 앞에서 각별한 감흥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재 일본이 이를 더 이상 백제의 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구세관음도 마찬가지로 백제에서 전래된 것인가의 여부가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유메도노의 구세관음상은 원래 비불(秘佛)로 모셔져왔는데, ‘비불’이란 법당 안의 감실 안에 봉안한 뒤 완전히 봉인하여 그 모습을 볼 수 없게끔 만들어놓은 것을 말한다. 특히 그 상이 귀하고 신성하다고 생각할수록 비불로 전하여 함부로 보지 못하게 했다. 여하간 비불이었던 구세관음은 1884년 어네스트 페놀로사(Ernest Francisco Fenollosa, 1853~1908)와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2~1913)의 주도 아래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즈음 일본은 서구화에 열을 올리면서 전통문화는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페놀로사와 오카쿠라 같은 인물들에 의해 다시금 일본적인 것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전통문화재가 재조사되기 시작한 때였다. 때문인지 오랜기간 비불이었던 호류지의 불상도 어떤 방식으로든 공개의 허락을 받았던 모양이다. 이때 금당에 봉안되어 있었던 구다라관음도 함께 조사가 이루어졌다. 다만 이 당시에 구다라관음은 관음이 아닌 허공장보살로 알려져 있었다.

이 두 보살상에 대해 보고자들이 ‘한반도풍’ ‘백제양식’ 혹은 ‘조선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매우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아마도 유례가 드물게 높이가 각각 180㎝, 228㎝나 되는 훤칠한 상이어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얼마나 사전지식을 가지고 두 보살상에 접근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실 호류지에 전해져 내려오는 오래된 기록들에서도 이 상들을 이미 백제에서 전래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구세관음에 대해서는 헤이안 시대에 찬술된 ‘부상략기(扶桑略記)’와 호류지의 승려 성예(聖譽, 1394∼1427)가 쓴 ‘성예초(聖譽抄)’가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威德王, 525~598)이 자신의 아버지 성왕(聖王, 재위 523~554)을 추모하기 위해 구세관음상을 만들어 일본에 보냈으며, 이후 성왕이 환생하여 쇼토쿠(聖德) 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구다라관음에 대해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98년에 쓰여진 ‘화주법륭사당사영험병불보살상수량등(和州法隆寺堂社靈驗幷佛菩薩像數量等)’인데, 여기서는 이 상이 허공장보살이며, 원래는 천축(인도)의 상으로서 백제를 통해 건너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 호류지 금당 석가삼존상의 제작자 도리(止利)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백제계 장인으로 강력하게 추정하고 있다.

결국 구세관음은 백제에서 직접 제작한 것이고, 구다라관음은 인도불상이지만 백제를 통해서 들여왔으니, 백제 장인 출신 사마(司馬)씨의 후손 다리(止利)가 만든 아스카 대불 및 호류지 금당 석가삼존상, 백제 성왕이 보내주었다는 나가노(長野) 젠코지(善光寺)의 아미타불상의 사례와 함께 백제가 일본 고대 불상양식 형성에 있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19세기 말 일본미술의 재발견이 시작되던 무렵에는 그랬다.

하지만 1930년대 즈음해서는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구다라관음상의 경우는 문헌에 의하면 인도에서 만들어져 백제를 통해 들어왔다는 것인데, 사실상 구다라관음은 전혀 인도적인 양식의 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이 인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과 함께 뭉뚱그려 백제를 통해 들어왔다는 사실도 부정되었다. 그러나 백제 전래설은 부정되었음에도 그 독특한 특징 때문에 외래양식이라는 사실은 지속해서 받아들여졌다.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는 보살상으로 새롭게 해석되기도 했다. 구세관음의 경우는 처음 페놀로사와 오카쿠라가 재발견했을 때는 비록 외래양식으로 규정하고 그중에서도 백제작으로 강하게 비정했지만, 일본조각사의 양식적 흐름이 정리됨에 따라 호류지 금당의 석가삼존상과 같은 계통의 전형적인 아스카 불상 양식에 포함되어 고찰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1년에는 일본의 목재 전문가가 구다라관음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고 그 결과 재료가 녹나무임을 밝혔다. 이는 한국에서는 자라지 않는 나무이기 때문에 결코 백제 조각일 수 없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구다라관음상의 백제제작설을 일축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결정적 근거가 제시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한편 일본 아스카 불상의 주류 양식으로 재평가된 구세관음은 비불로서 아직도 유메도노에 봉안되어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신성성을 유지한 반면, 구다라관음은 금당에서 나와 지금과 같이 박물관의 유물로서 전시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일종의 차별로 해석하는 견해가 종종 제시되었는데, 미술사 뿐 아니라 역사, 문화 관련 칼럼에서 이러한 현상을 비판하는 견해를 종종 접할 수 있다. 즉, 일본이 구다라관음상은 백제불상이기 때문에 더 이상 종교 예배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한낱 유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하였다시피 일본은 지금 이 관음상을 일본에서 만든 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차별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이 이 상을 일본작품으로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거나 혹은 법당이 아닌 박물관에 봉안된 사실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 비판은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 아울러 필자도 나라지역에 들를 때마다 호류지의 이 보살상을 친견하고 오지만, 일본의 관람객들에게도 이 상은 각별한 경외의 시각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 구세관음과 구다라관음의 이러한 봉안의 차이는 구세관음은 처음부터 유메도노의 주존으로 봉안된 것이었지만, 구다라관음은 그 자리가 제자리가 아니었음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호류지에 전하는 기록에서도 이미 구다라관음은 강당 등 다른 곳에 봉안된 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어서, 아마도 구다라관음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했던 의도가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만약 이것이 차별이라면, 법당에 봉안되지 않은 일본내 박물관의 모든 일본 불상은 사실상 무시당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한편 구다라관음의 재료가 녹나무라는 것은 일본에서 만든 불상임을 결정적으로 증거하는 것처럼 제시되었지만, 일본 자체 내에서도 이에 대한 반론이 있었다. 한국에도 제주와 남해안 지역 일부에 녹나무가 식생하고 있으며, 설령 지금 녹나무가 없다고 하더라도 삼국시대에도 녹나무가 식생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백제 장인이 일본에서 녹나무를 구해 조각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할 것이다.

일본 내에서 구세관음과 구다라관음이 백제작이 아니라고 보게 된 배경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단지 문헌에 부정확하게 전해지는 내용만으로 백제작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며, 사실 백제양식에 대한 정의도 명확하지 않다. 또한 고대에는 상의 신비함을 강조하기 위해 먼 곳에서 왔다는 것을 고의로 강조하는 경우도 많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안으로 일본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중국불상과의 양식비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구다라관음은 단순히 중국의 불상양식으로 정의하기에는 이질적인 느낌이 매우 강하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에는 백제 규암출토의 보살상처럼 극도로 가늘고 길게 늘어진 인체를 강조한 상이 종종 발견된다. 구다라관음상이 더 경직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금동과 목조라는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너무나 적은 수의 불상으로 백제양식을 정의 내리는데 어려움이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 내의 백제불상 문제를 발만 구르면서 강건너 불구경처럼 보고 있는 사이에 정말 백제양식일 수도 있는 고유의 양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백제장인의 작품일 수도 있고, 백제양식을 모방한 일본불상일 수도 있으며, 백제장인이 일본 취향에 맞게 만든 수출품일 수도 있다. 때문에 ‘오로지 백제’를 강조하기 보다는 켜켜이 쌓여있는 백제의 잔영을 하나하나 들춰내는 세심함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289호 / 2015년 4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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