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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고려 태고가 원 석옥에게

“나와 남을 이롭게 하되 불법을 천하게 팔지 않을 것입니다”

13살 때 양주 회암사로 출가
19살 때에 화두 참선 시작
목숨 건 수행으로 큰 깨달음

원나라 건너가 석옥과 법거량
임제법맥 잇고 가사 등 받아
고려로 돌아와 불교중흥 매진
공민왕도 전폭적인 후원·지지
개혁 주창한 신돈과 큰 갈등

82살에 가평 소설산에서 입적
오늘날에도 조계종 중흥조 추앙

 

“(저 태고는 석옥 대화상을) 떠나온 뒤 하루도 우러러 사모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다음해 봄에 다시 나아가 종신토록 모시려 하오나 혹 업연(業緣)에 얽혀 원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한결같이 가르침에 의지해 나와 남을 이롭게 하되 불법을 천하게 팔지 않을 것이며, 후세에 이르기까지 (불법의) 종자가 끊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이것이 어찌 제 혼자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다시 절하며 본사 대화상의 기후 만복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행여 고향사람의 편이 있거든 자비로 (소식을) 물어 주시면 못내 위로가 되겠습니다.”

‘조주 옛 부처가/ 앉아서 일천 성인의 길을 끊고/ 취모리(吹毛利)의 칼을 들이대매/ 온몸에 빈틈이 없네/ 여우와 토끼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지고/ 몸을 뒤집어 문득 사자의 모습이 드러나니/ 생사의 견고한 관문을 부수고 난 뒤에/ 맑은 바람이 태고암에 불어오네’

1338년 1월7일. 바람은 쉬고 구름은 고요했다. 38살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모든 분별망상과 만겁의 생사를 그 자리에서 끊어버린 환희의 찬가였다. 이제 마음은 안으로 고요해 흔들리지 않고 밖으로 움직이지 않아 의심덩어리가 부서지니 마침내 지혜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정진하다 죽겠다”며 각오를 다진 지 꼭 20년만이었다.

▲ 태고보우 진영.

조계종 중흥조인 태고는 고려 충렬왕 27년(1301) 9월, 지금의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정씨가 해를 품고 낳은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13살에 양주 회암사(檜巖寺)의 선승 광지(廣智)를 은사로 출가한 태고는 얼마 뒤 가지산(迦智山) 계통의 총림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19살 되던 해, 당시 선승들이 그렇듯 그도 처음 화두를 붙들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를 참구했다. 태고는 ‘하나’를 붙들려 애썼지만 화두는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망상은 추녀 끝의 풍경처럼 심하게 요동쳤다.

태고는 불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26살 때에는 그 어렵다는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할 정도로 안목이 깊어졌다. 그러나 불경을 공부할수록 남의 보물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회의도 깊어졌다. 그는 탄식했다.

“이것 또한 토끼 잡는 덫과 물고기 잡는 통발에 불과하구나. 예로부터 대장부는 목표를 높이 세웠다는데 난들 대장부가 아니랴. 어찌 어리석게 이 일만 하겠는가.”

태고는 불경을 덮었다. 30살의 태고는 용문사 상원암의 관음보살 앞에 눈물로 12대원을 세우고 화두에 온몸을 던질 것을 다짐했다. 그는 모든 인연을 끊고 다시 ‘만법귀일’로 스스로를 옭아맸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하지만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그는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성서(城西)의 감로사에서 태고는 “성격이 나약해 큰일을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고행하다 몸을 바꾸느니만 못하다”며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화두를 타파하려 노력했다. 7일째 되던 날 그에게 첫 깨달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망념의 구름이 걷히고 ‘나’라는 집착이 끊겼다. 불조(佛祖)와 산하(山河)를 입도 없이 한입에 삼킨 것이다.

두 번째 깨달음은 4년 뒤인 37살 때 찾아왔다.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을 읽다가 ‘모든 것이 다해 없어지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 한다(一切盡滅 名爲不動)’는 구절에 이르러 알음알이가 툭 떨어져나갔다. 한 생각이 일지 않아 지혜가 환히 빛나면 고요한 가운데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난다는 이치를 체득한 것이다.

태고는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번뇌까지 완전히 여읨으로써 완전한 깨달음인 구경각에 이르고자 했다. 그는 다시 화두 참구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1700공안의 으뜸이라는 조주의 무자(無字)화두였다. 조주선사는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던 걸까?

두 번의 깨달음을 체득한 태고에게도 무자 화두는 쇠뭉치를 입에 넣고 씹는 것 같았다. 태고는 무쇠소의 등가죽을 뚫으려는 모기처럼 일심으로 달려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고 깨어남이 일여한 경지에 이르더니 나중에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었다. 화두가 태고가 되고 태고가 화두 자체가 되어갔다. 그러던 1월7일 새벽, 그는 생사의 견고한 관문을 부수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태고적부터 불어온 맑은 바람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태고는 그해 3월 고향으로 돌아와 늙은 부모를 봉양했다. 태고는 ‘종문의 제1서’로 꼽히는 ‘벽암록’을 보다가 ‘암두밀계처(巖頭蜜啓處)’에 이르러 그 뜻을 알지 못하다가 한참 만에 무릎을 쳤다. “암두가 활은 잘 쏘지만 이슬에 옷 젖는 줄은 몰랐구나. 말후구(末後句)를 아는 이가 천하에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태고는 순간 미세한 번뇌까지 떨어져나갔음을 알았다. 일대사 본분을 끝낸 그는 깨달음을 노래했다. 소요산 백운암에 머무르며 유유자적했다. 그때 무극(無極)이라는 원나라 승려가 태고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 그는 빼어난 말솜씨로 숱한 선지식들의 속을 다 뽑아본 선승이었다. 무극은 태고의 빈틈을 찾으려 눈을 번뜩였다. 시간이 팽팽한 줄처럼 흘러갔다. 하지만 태고는 한 찰나도 말덫에 걸리지 않았다. 무극은 결국 태고의 깊은 깨달음에 경의를 표했다. 그는 태고에게 원으로 건너가 임제의 적손으로부터 인가를 받을 것을 권했다. 이때 무극이 소개한 고승이 바로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이었다. 무극은 자신이 직접 만났던 석옥에 대해 들려주었다.

석옥은 소주(蘇州)의 상숙(常熟) 사람으로 임제의 18세 법손(法孫)이었다. 23살 때 당대 최고의 선사로 꼽히는 고봉원묘(1238~1295)에게 출가해 태고와 마찬가지로 ‘만법귀일’을 참구했다. 그러나 석옥에게 깨침의 인연은 다른 곳에 있었다. 석옥은 고봉과 사형사제지간인 급암(及庵)을 시봉했다. 그곳에서 수행한 지 6년만에 깨달음을 얻어 급암으로부터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뒤 석옥은 원나라 조정과 철저히 거리를 둔 채 호주(湖洲) 하무산(霞霧山)에 머물며 선법을 펼쳤다.

“불법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비록 지혜가 있어도 깨달을 수 없다. 입을 여는 것도 옳지 않으니 나의 종지에는 어구(語句)도 없고 한 법도 남에게 줄 수 없다.”

그는 말을 아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도인으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는 평산처림(平山處林)과 축원성(竺源盛) 등과 더불어 원을 대표하는 선승으로 알려졌다.

▲ 태고보우가 오랫동안 상주하며 법을 설했던 1902년의 북한산 중흥사 전경. 그러나 2년 뒤 대규모 화재로 이 절은 폐허가 됐지만 서울 불광사 회주 지홍 스님의 주도로 중흥사 복원이 한창 진행 중이다.                중흥사 제공

태고는 원에 건너가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채하중·김문경 등 고위관리들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법을 펴줄 것을 요청했다. 1341년, 태고는 잠시 구법의 뜻을 접고 중흥사에 바랑을 내려놓았다. 오래지 않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쇄락했던 중흥사도 점점 옛 명성을 되찾았다. 태고는 중흥사 동쪽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며 수많은 선객들을 제접했다. 그러나 선의 정맥을 이은 고승을 만나겠다는 마음까지 접은 것은 아니었다.

태고가 원의 수도인 연도(燕都)에 도착한 것은 46살 되던 1346년 봄이었다. 대관사(大觀寺)에 머무르던 그는 이듬해 4월, 축원성 선사가 남소(南巢)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축원성은 이미 입적한 뒤였다. 안타까워하는 태고에게 축원성의 제자인 홍아종과 월동백이 ‘삼전어(三轉語)’를 물었다. 삼전어는 축원성이 납자들의 공부 수준을 알기 위해 자주 물었던 세 가지 관문이었다.

“첫째, 출가해 도를 공부하는 것은 다만 성품을 보기 위해서인데 그 성품은 어디 있는가? 둘째, 삼천리 밖에서는 결정코 그릇된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마주 보면서도 왜 모르는가?, 셋째, (두 손을 펴 보이면서) 이것은 둘째 글귀이니 첫째 글귀를 내게 보이라.”

태고는 곧바로 게송을 읊었다.
“사자의 외침을 크게 열었다기에 저 늙은 남소를 찾아왔더니 손발을 모두 드러내지 않네. 드러내지 않으나 밝기는 해와 같고 숨기지 않으나 검기는 옻칠과 같네. 내가 오자 마침 서쪽으로 돌아갔나니 남은 독기가 꿀처럼 쓰구나.”

홍아종과 월동백은 깊이 읍하며 찬탄했다.
“이 땅에 납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 세 가지 관문에 이르러서는 모두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장로께서 비로소 노화상과 서로 통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머물다 갈 것을 간곡히 청했지만 태고는 사양했다. 그들은 축원성이 “강호의 눈[眼]은 오직 석옥에게 있다”고 했던 말을 전해주었다.

태고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석옥이 있다는 하무산 천호암(天湖庵)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석옥을 만날 수 있었다. 석옥은 태고가 본래면목을 투득했음을 단박에 알았다.

“조그만 광명이 있으면 그것을 진실이라 생각하는 이는 빛 속에 떨어져 사량분별을 하오.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혼자서 그처럼 분명하게 갈림길을 가려내었소.”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가르치신 방편을 구비했기 때문입니다.”
“노승은 비록 이 깊은 산중에 있지만 조사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린 지 오래됐소.”
“선지식이란 여러 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결코 스승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태고의 말에 석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노승은 그대와 함께 이 고요함을 즐기고 싶지만 갈 길이 막힐까 염려되오. 그러나 법은 만나기 어려우니 반달만 이야기하다 돌아가시오.”

그때부터 두 사람은 함께 했다. 태고가 묻고 석옥이 답했으며, 때로는 석옥이 묻고 태고가 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을 무렵 석옥이 정색을 하고 태고에게 물었다. 법을 전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공겁(空劫) 이전에도 태고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허공이 태고 가운데서 생겼습니다.”

석옥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불법이 동방으로 가는구나. 장로여, 그대의 360여 뼈마디와 8만4000여 털구멍이 오늘 모두 열렸소. 그리하여 노승이 70여년간 공부한 것을 모두 그대가 빼앗아 가는구려.”

석옥은 임제의 적손에게 대대로 전해오는 가사와 자신이 평생 지녔던 주장자를 태고에게 건넸다. 고려의 선승에게 법을 전한 것이다. 석옥은 머무르려는 태고를 떠나보냈다. 태고가 법을 펼 곳은 산중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그런 스승의 뜻을 잘 아는 태고는 못내 아쉬워하며 길을 나섰다. 석옥은 태고를 멀리까지 배웅해주며 말했다.

“장로여, 이별이란 본래 없는 것이니 이별이라 생각하지 마시오. 이별이니, 이별이 아니니 하면 그른 것 아니겠소.”

8월3일 천호암을 떠난 태고는 두 달 뒤 연도에 도착했다. 이때 태고의 명성은 황실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태자의 생일을 맞아 그가 영령사에서 설법을 하니 황실에서는 태고에게 향과 가사를 수여했다. 특히 연도에 와 있던 고려의 세자는 감탄하며 “내가 만약 고국으로 돌아가 정치를 펼 수 있다면 스님을 나의 스승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그가 바로 고려 제31대 임금인 공민왕(1330~1374)이었다.

황실과 고려 세자의 찬탄에도 태고의 마음에는 오직 석옥이 있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법을 전해준 스승과 지낸 보름간의 시간을 잊을 수 없었다. 태고는 붓을 들었다. 그리고 종신토록 스승을 모시고 싶다는 마음을 진솔하게 적어 내려갔다. 설령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불법을 천하게 팔지 않을 것과 임제의 법맥이 끊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1348년, 태고는 2년간의 구법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중흥사에 다시 석장을 걸었다. 태고는 은둔하며 조용히 지냈다. 그 무렵 그토록 그리던 스승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이별한 뒤로 건강이 더욱 좋지 않으며 태고의 편지를 받고 무척 반가웠다는 얘기로 시작했다. 석옥은 태고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위할 때에는 반드시 본분의 일로써 어리석은 이들을 격려해 이끌어 줘야 할 것이오. 부디 아첨의 유혹에 빠지면 아니 됩니다. 또한 부귀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 속에 휩쓸려 법을 전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할 것이오.”

▲ 고양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보우의 사리탑은 보물 제749호로 지정돼 있다.

태고는 석옥의 유훈 같은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1351년, 연도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른 공민왕이 미원(迷源, 지금의 가평) 소설산에 머무르던 태고를 궁궐로 청했다. 태고의 법문을 들은 왕은 그가 태어난 고향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는 등 각별한 존경심을 표했다. 1356년에는 태고를 왕사로 책봉하고 개성 광명사에 원융부(圓融府)를 두어 그가 전국의 모든 사찰 업무를 통솔하도록 했다. 태고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묻는 왕에게 거룩하고 인자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자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 볼 것을 권했다. 또 홍건적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이를 왕에게 알려 백성들을 난에서 구하기도 했다.

태고는 왕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불교계를 이끌었으며, 석옥으로 이어지던 임제선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태고는 구산선문을 통합하고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왕에게 직접 상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고에게도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특히 1365년, 공민왕이 권문세족을 제어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돈(辛旽, ?~1371)을 등용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신돈은 불교계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개혁을 표방하면서 국정자문은 물론 일반국정에도 직접 참여해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태고는 왕에게 신돈을 멀리할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신돈이 왕을 설득해 보우를 탄핵하고 속리산에 유폐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신돈의 권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권문세족의 음해가 잇따르고 공민왕의 의심이 커지면서 신돈은 사형되고 말았다. 이후 태고에 대한 공민왕의 신뢰가 다시 커지면서 태고는 국사(國師)로 책봉됐다.

노구를 이끌며 오랫동안 불교 일은 관장하던 그는 1382년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라는 말과 함께 소설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해 말인 12월24일 임종게를 설하고 적멸에 들었다. 세수 82살, 법랍 69살이었다.

‘인생의 목숨이란 물거품처럼 공허한 것/ 80여년이 꿈속에서 지나갔네/ 임종의 오늘에 이 몸 버리니/ 둥근 해가 서봉에 지네.’

태고는 조선 중기 이후 임제선의 법통을 잇는 인물로 크게 추앙됐다. 태고가 원에서 가져와 유포한 ‘치문경훈(緇門警訓)’은 지금도 전통강원 학인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태고가 중국의 임제선을 지나치게 표방함으로써 고려불교 전통의 단절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있다. 또 당시 국가기반을 붕괴시킨 권문세족들을 옹호함으로써 광활한 농장을 소유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한편 스승에 대한 제자의 지극한 존경과 스승의 자애로움이 묻어나는 이 편지들은 ‘태고화상어록’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 자료 : ‘태고화상집’(동국역경원), ‘태고보우의 선풍에 관한 연구’(종범, 중앙승가대 교수 논문집3), ‘석옥청공과 태고보우의 선사상 비교’(차차석, 한국선학 제3호), ‘태고보우의 불교사적 위치’(최병헌, 한국문화7),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의 오도송’(주호찬, 어문논집 46),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보우·신돈의 갈등’(신일균, 한국교원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 ‘공민왕의 신돈 등용의 배경’(신은제, 역사와 경계 제91집)

[1289호 / 2015년 4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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